〈 112화 〉 #17. 촬영 시작 (1)
* * *
강준이와 나는 빡세게 대본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리딩날이 무척 가까웠기에 어느 때보다도 대본에 집중해서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매니저 누나가 대뜸 와서는 뜻밖의 얘기를 꺼내왔다.
“이번 주 수요일 리딩 잡혔다고 했었던 거 금요일로 미뤄졌다.”
“수요일 말고 금요일이요?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심각한 건 아닌…아니지, 심각한 건가?”
매니저 누나의 수상한 말에 정신이 번쩍든다.
“제작사 쪽 말 들어보니까 감독이 막무가내로 금요일 날 하라고 했다나봐.”
“엥?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막무가내로요?”
그날 만났던 감독님을 떠올려보니 마냥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딱 봐도 자기 스타일을 밀고 나갈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강준이와 나는 다른 스케줄 없이 연기 연습에 매진을 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감독 쪽에서 막무가내로 스케줄을 바꿨다는 건 조금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문제로 보였다.
“그쪽 상황이 좀 복잡한 것 같아. 너희들은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니까 가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그쪽에 뭐 문제 있는 거에요?”
“제작사 쪽에서 알력다툼이 있는 모양이야.”
“누구랑요? 최감독님 투자자 쪽에서 보낸 감독 아니셨어요? 그 정도 배경 되시는 분도 알력다툼을 해요?”
투자자가 작가의 아내라고 들었다.
그 정도면 거의 왕처럼 스태프들을 부려 먹을 권력일 텐데 말이다.
“사정이 좀 복잡해. 모르고 있다가 실수할까봐 얘기해주는 건데, 신인 감독한테 전부 맡기는 게 불안했는지 제작사 쪽에서 경력 있는 감독을 붙여 줬나봐. 그게 문제가 된 거지. 배에 선장이 두 명인 꼴이니까.”
“아이고.”
“취지는 좋은데, 결과는 별로 안 좋았겠네요.”
“응, 그렇지. 솔직히 터질 게 터졌다는 분위기야. 도와주라고 붙여 준 감독도 쉽게 물러나진 않을 모양인 것 같고. 이게 어쩌다 보니 자존심 싸움이 된 모양이거든.”
개판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최영지 감독은 개판 나기 전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리딩 날짜를 바꾸라고 강짜를 부린 것 같았고 말이다.
“아~ 그래서 그때 그런 식으로 말하신 건가?”
“그런 식? 최 감독한테 뭐 들은 말이라도 있었어?”
“네, 주변에서 우리 웹드라마 망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보란 듯이 성공시켜서 그런 생각 하는 사람을 콧대를 눌러주자고 하셨어요.”
“흐음, 그랬어? 낙하산 감독도 나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네. 영 맹탕은 아닌 모양이니 거하게 싸움날 것 같은데.”
심각한 건가?
내가 보기에 최영지 감독의 성격이면 결코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투자자가 최영지 감독의 편이라는 점이 최영지 감독을 유리한 상황으로 보이게 한다.
물론 경력이 있는 감독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 누가 이기는 게 나아요?”
강준이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됐는지 질문을 했다.
매니저 누나와 내가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최 감독님이 이겨야지.”
“당연히 최영지 감독님이 이겨야지.”
“다른 감독은 도와주러 온 거지 자기 작품 하러 온 게 아니잖아. 거기다가 스태프들끼리 망할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며. 최영지 감독이 이겨야 돼.”
“해솔이 말이 맞아.”
스태프들 사이에서 망할 거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그들을 지휘하는 감독이 그걸 방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작품을 제작하지도 않았는데 잘 되라고 고사를 지내도 부족할 판에 망할 거라는 비아냥을 하고 다닌다니!
웹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입장에서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잘 되는 게 어려울 거라는 걸 알면서 시작한 일이라도 망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상황이 썩 편하진 않네요.”
“그러니까 최영지 감독이 이겨야 하는 거야. 갑자기 날짜를 바꾼 걸 아무 말 없이 받은 것도 다 그런 배경 때문인 거고. 그러니까 너무 불평하지 마라. 최영지 감독님한테 깍듯하게 대하고 말이야.”
“그럴 일 없어요. 오히려 며칠 시간이 더 생겨서 다행인 걸요.”
“맞아요. 저희 요새 연기 연습 진짜 빡세게 하고 있어요.”
“알아. 너희들 열심히 한다는 거 소문 쫙 났어. 이번에 잘 하면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배우 쪽으로 활동하는 거 밀어줄 생각이니까 기회 왔을 때 잘 해봐. 알았지?”
“넵!”
“네.”
매니저 누나가 연습실을 나가고.
나와 강준이는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연습을 잠깐 끊고 휴식하고 있는 와중에 매니저 누나가 들어 온 터라 제대로 휴식을 즐기지 못했다.
남은 시간동안 필사적으로 휴식을 즐겨야만 한다.
나란히 뻗어서 누워 있던 중.
강준이가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최영지 감독님이 이기는데 우리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우리가?”
“매니저 누나 말 들으니까 가만히 있다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더라고.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최영지 감독님한테 힘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글쎄다. 내가 보기에 강 건너 불구경으로 있어도 충분히 이기고 자기 자리 꿰찰 것 같던데.”
최영지 감독이 술자리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결코 능력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투자자를 등에 업은 낙하산 감독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자기 돈 쉽게 쓰는 사람은 없어. 낙하산으로 사람을 꽂은 것도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검증했으니 한 일일 거야.’
웹 드라마가 잘 되길 바라는 입장에서도 최영지 감독이 이겨야 맞는 일이었고, 뒷배경을 생각했을 때에도 최영지 감독이 이길 확률이 높았다.
그 뿐인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재능면에서도 최영지 감독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생각해 보니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네.”
배경만 생각해도 친하게 지내는 게 이득인 인물이다.
더욱이 감독과 친하게 지내는 건 배우로서 좋은 일.
아직 배우 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넓게 생각하기로 한 이상 인맥은 만들어 둘 수 있을 때 만들어 놓는 것이 좋았다.
“준이 너는 나중에 배우 일을 하고 싶은 거지?”
“가수도 하고 배우도 하고 싶어. 다른 선배님들도 그렇게 해서 꾸준하게 활동하고 계시잖아.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나 싶거든.”
준이는 노래도 잘 부르고, 얼굴도 잘 생겼다.
연기는 유망주 느낌이 풀풀 풍기는 실력을 가졌다.
나와 웹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연기력이 많이 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인맥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문제는 우리가 뭘 해야 감독님한테 도움이 될까 생각해야 한다는 건데….”
“뭔가 기발한 거 없을까?”
“흐음….”
“으으음….”
둘 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으나 배우가 감독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연기 외에 딱히 없어 보였다.
결국 강준과 나는 백기를 들었다.
“그냥 고민 할 이 시간에 열심히 연기 연습이나 하자. 그게 감독님 도와드리는 일인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형.”
연기를 잘하면 웹 드라마가 성공할 테니 그보다 더한 도움이 어디 있겠는가.
???
시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대본 리딩이 있는 금요일 날의 해가 밝았다.
“나 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애.”
정말 후회가 없다 싶을 정도로 연습을 해서 그런지 강준과 나는 대본 리딩장에 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 설랬다.
매니저 누나가 떨지 않는 우리들을 신기하게 바라볼 정도로 말이다.
“카메라로 찍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공들여 입은 거야?”
“처음 만나는 자리잖아요. 예쁘게 보여야죠.”
저쪽에서 우리를 뽑은 이유는 연기력보다 비주얼 때문임이 분명하다.
특히 나는 노골적일 정도로 나오는 씬들이 비주얼에 몰빵 되어 있었다.
강준이도 나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비주얼을 노리고 캐스팅 한 것을 대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대본 리딩장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나?
예쁘라고 뽑았으니 그 역할을 다 할 필요가 있었다.
“대본 리딩 끝나고 회식 있을 거야. 회사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돌릴 예정이니까 알아두고.”
“샌드위치만 돌려요? 음료수는요.”
“음료는 제작사 쪽에서 준비한다고 했어.”
“아항~”
리딩장에 도착하니 시작 시간보다 30분 정도 빠르게 도착했다.
“우리가 제일 일등이겠는데?”
“리딩장 앞까지 오니까 좀 긴장 되는 것 같아.”
“이제서?”
“형은 안 그래?”
“네가 긴장 된다고 하니까 나도 덩달아 긴장 될 것 같다. 속 울렁거리거나 그러지는 않고? 심하면 매니저 누나한테 청심환 받아서 먹던가.”
“아냐, 이 정도는 참아 볼래. 카메라 앞에서 연기도 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쫄순 없지.”
“맞는 말이네요.”
“엑?”
강준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뒤에서 낯선 목소리의 인물이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태호씨!”
“안녕하세요.”
190cm의 거구 남.
더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왕자님 후보 중 하나인 신인 배우 강태호씨였다.
압도적인 피지컬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강준이 슬슬 뒤로 물러났다.
회식 자리에서 몇 마디 나눴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간이 지난 탓에 그때의 기억이 없어졌나 보다.
나는 그래도 키가 180이 넘어서 그럭저럭 괜찮은데, 강준은 키가 작아서 강태호씨와 가까이 있으니 덩치 차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잘 지내셨어요?”
“예. 오늘 멋지십니다.”
“태호씨도 멋지세요. 오늘 리딩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딱딱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귀를 팍팍 파고든다.
나도 나름 아이돌이라고, 좋은 목소리를 들으니 래퍼를 했으면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되게 일찍 오셨네요.”
“네. 신인이니까 부지런해야죠. 그리고 리딩 할 생각에 잠을 설쳐서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아, 저도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특히 준이는 잠을 거의 못 잤거든요.”
“혀엉…?”
“얘가 낯을 좀 가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겁니다. 좀 어렵게 대해도 서운해 하지 말아주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덩치가 커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더라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강태호씨 성격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뜩이나 제작사 쪽에서 마찰이 있는데, 베우들끼리 마찰이 있으면 촬영장은 개판이 됐을 거다.
물론 강태호씨와 부딪치는 씬이 거의 없어서 사이가 나빴어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 이거 좀 드세요. 샌드위치에요.”
“….이런 것도 돌리십니까?”
“회사에서 챙겨주셨어요.”
”부럽네요. 이래서 소속사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허니 엔터 소속이셨죠?”
“네.”
강태호씨는 매니저 누나가 싹싹하게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며 샌드위치를 돌리는 걸 유심히 바라봤다.
허니 엔터야 말하는 게 입 아플 정도로 좋은 회사다.
지원해주는 것도 전문적이고, 체계가 잡혀 있어서 믿고 맡길 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안녕요. 일찍 왔네요.”
하나 둘 배우진들이 모이고….
최영지 감독과 최희민 작가도 리딩장에 도착했다.
“누나는 쌈닭이야? 면전에 두고 그렇게 거절을 해? 내가 다 민망하더라.”
“손 떼라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자기 세상인 줄 알고 참견하는 걸 보고도 너는 날 쌈닭이냐고 묻는 거야? 실례는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하고 있는 거야. 지가 리딩장에 오긴 왜 와? 와서 배우들 연기 지적하겠다는 거잖아. 열 받게.”
다만 그들도 남매라서 그런지 대화하는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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