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14화 (114/849)

〈 114화 〉 #17. 촬영 시작 (3)

* * *

나는 문을 열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한민영씨의 살벌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사람 한 명 잡아먹겠다는 기세로 노려보는 한민영씨의 눈빛은 순식간에 평범해졌지만, 찰나의 순간 봤던 눈빛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꺄악! 해솔씨! 강준씨! 어서 들어오세요.”

“의상 받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호호호!”

나를 살벌한 눈빛으로 맞이한 한민영씨와 달리 스태프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은 호의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왜 저러는 거지?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왜?’

이세계로 와서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으로 오히려 그녀에게 호기심이 들었다.

말 몇 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이인지라 더 그랬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날 싫어하면 이 웃음조차도 싫을 것이 아닌가?

“한민영 선배님이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어서 와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사무적인 태도이다.

그러는 사이 스탭이 발 빠르게 준이와 내 의상을 가져다주었다.

“저기서 갈아입으면 되는 건가요?”

“어휴! 큰일 나려고요. 화장실에서 갈아입으세요. 여기서 갈아입게 했다간 저희가 큰일 나요. 다만 옷을 입으시면 다시 여기로 와주세요. 저희가 의상 잘 입었는지 확인해드릴게요. 화장은 하고 오셨죠?”

“아~ 화장실이 있구나. 네, 화장은 샵에서 받고 왔어요. 가자, 준아.”

“응.”

한민영에게 어색하게 꾸벅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그 한민영 선배님 말이야. 표정 되게 안 좋지 않았어?”

“너도 봤구나?”

“응. 나 엄청 쫄렸잖아.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좀 느꼈거든. 우리랑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다고.”

“너도 그걸 느꼈어? 난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근데 쫄 것까진 없지 않아?”

“앞으로 계속 같이 촬영해야 하는 사이니까 그렇지. 불편한 관계면 힘들잖아.”

준이와 한민영씨는 부딪치는 장면이 가장 많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역할이 같은 반이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든 출연자들이랑 다 친분을 쌓을 필요는 없지 않아? 내가 알기로 사이가 안 좋아서 눈도 안 마주치는 사이인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연인 관계로 베스트 커플상 받고 그런다더라.”

“후우, 그게 프로의 마음가짐인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촬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개인적인 감정은 싹 접고 오로지 캐릭터가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확실히 본받을 필요가 있는 태도였다.

“그리고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면 싫어할 이유를 하나 만들어주라는 말 알아?”

“헉! 그런 말이 있어?! 좀 악당 같지 않은데.”

이 세계에는 없는 말이었는지 내 말을 듣고 준이가 화들짝 놀란다.

“이유 없이 미움 당하면서 억울해 하는 것보단 그게 낫다고 보는데 나는.”

“형은 진짜 안 그런 척하면서 엄청 냉정해.”

확실히 나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걸 좋아한다.

워낙 공과 사가 혼돈 된 사회에서 먹고 살아서 그런가?

일을 할 땐 철저하게 일만 하고 싶었다.

물론 얘네들을 대할 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적당하게 조절을 하고 있는 중이기는 했다.

어리다고 모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사회를 살아가는 노하우라는 거란다, 얘야.”

준이와 대화를 나누며 촬영 의상으로 모두 갈아입고 다시 그곳으로 갔을 때, 한민영 씨는 사라지고 없었다.

스탭들의 손에 의해 옷을 정리하고 촬영 장소로 돌아가니 그곳 한 구석에서 한민영씨가 대본을 보고 있는 게 보인다.

“오~ 교복 잘 어울린다.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기 딱 좋은데? 저쪽에 서봐.”

매니저 누나는 준이와 내 모습을 확인하고 핸드폰부터 들이댔다.

꾸준히 SNS를 하며 팬들에게 소식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교복 차림의 사진은 팬들이 특히나 좋아할 법한 모습이었다.

“와우! 너무 멋져!”

매니저 누나의 손아귀에 잡혀 사진 몇 장 찍히고 있는데, 최영지 감독이 우리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지! 내가 바랬던 바로 그거야. 해솔씨는 환상적이고, 준이씨는 동화 속 왕자님 같애.”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대본이 총 6화까지 나와 있잖아요. 근데 작가가 리딩하고 나서 4화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거든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헉! 정말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두 사람 다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희민이도 신나서 쓰는 거죠. 그리고 나한테 고맙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희민이한테 직접 해요. 그럼 더 효과 좋을 거야. 걔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편애를 엄청 하거든.”

“하하, 네. 감사 인사 꼭 드릴게요.”

작가가 대본을 다시 쓰고 있다는 말은 즉, 우리 분량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리딩장에서 농담처럼 했던 말이 진담이었던 거다.

‘이게 바로 치트키의 맛인가.’

대본 리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게 끝났다.

실제로 리딩 장면을 유티비에 올렸을 때 반응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준이 녀석의 체력을 체력 주머니로 빵빵하게 채워두었고, 나는 연기력을 35%까지 끌어올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노래와 춤을 배울 때 느꼈던 건데, 10% 대는 재능 있는 초보 수준의 실력이 되고, 20%대에서는 슬슬 능숙해져서 배움의 깊이가 생기는 수준이며, 30%대는 중수 정도 그러니까 재능 있는 사람이 약 3~4년 정도 배움을 익힌 수준의 실력이 된다.

그리고 40대에 도달하면 주변인들로부터 감탄사를 받을 정도의 실력이 되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50%대에는 어디 가서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될 거라고 예상 중이다.

현재 내 능력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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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솔]

[정력 : 53.05%]

[노래 : 48.88%]

[댄스 : 47.33%]

[연기력: 35.68%]

[기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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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게 그때그때 필요한 능력치들도 올려두긴 했지만, 워낙 종류가 많기에 생략시켜뒀다.

또한 50%대에 도달하면 조절하지 못하는 능력이 생길까봐 일부러 50%대 이상으로 올리지 않았다.

아예 올리지 않을 수는 없지만, 지금 내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코인을 쓸 곳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35%정도 되면 연기를 배운 티가 나는 정도였다.

그리고 대본 리딩을 할 때 내 실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최영지 감독과 최희민 작가가 나에게 바라는 기준이 워낙 낮았기에 내 실력을 드러내니 효과가 무척이나 컸다.

“곧 리허설 들어갈 거에요. 해솔씨는 좀 기다려야 하고.”

“네.”

설정 상 강준이 연기하는 황상호와 한민영이 연기하는 김지혜는 같은 반이었기에 준이가 가장 먼저 왕자님 후보로 소개가 된다.

더욱이 김지혜와 강준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다녀서 얼굴을 익히고 있는 사이다.

김지혜는 친구들 사이에서 황상호가 왕자님 후보 중 TOP3 안에 든다는 걸 믿을 수 없어한다.

“여기서 표정 연기를 잘 해줘야 합니다. 나레이션 들어갈 거니까 시간에 유념해주시고요. 빠른 것보다 조금 느린 게 편집할 때 편합니다. 맞추기 힘들 것 같다 싶으면속으로 대사를 치세요.”

“네.”

한민영씨가 조금 긴장한 채로 의자에 앉았다.

강준이 앉아 있는 곳보다 뒤쪽에 있어서 한민영씨가 준이를 쳐다보기 편한 구도를 만든 상태였다.

간단하게 리허설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우리 학교에 왕자님이 있다’의 촬영이 시작 됐다.

‘쟤가 재벌아들이라고? TOP3를 도대체 어떻게 메긴 거야? 완전 신뢰성 제로잖아.’

김지혜는 황상호와 친한 건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딩인 지금까지 계속 같은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안다.

같은 반도 많이 해봤으니까.

‘쟨 절대 아냐.’

다른 애들은 저 녀석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있지만, 다년간 황상호를 보아 온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재벌 아들 후보에서 가장 먼저 빠져야 할 놈이 쟤였다.

“상호 씀씀이가 크잖아. 평범하게 용돈 받은 애들이 쓸 수 있는 씀씀이가 아니라니까?”

“집이 좀 사는 거지. 중상층 가정이랑 재벌집이 같냐? 암튼 쟤는 아냐.”

“뭐가 아니야?”

“꺅!”

“악!”

황상호가 왕자님일 거라 우기는 친구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김지혜의 말소리가 좀 컸는지 황상호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흡!”

찐따 친구 녀석은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

저 녀석을 상대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뭐가?”

“아니, 엿들은 건 아닌데 내 이름이 나오는 것 같아서.”

“전혀 아닌데.”

“앗…! 아니었어? 내가 잘못 들었나보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김지혜에게 속아 넘어 간 황상호가 부끄러운지 수줍게 배시시 웃는다.

“엄마야~! 너무 잘 생겼어.”

“하으으~!!”

“꺄악!!!”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이 술렁이며 꺅꺅 비명을 질러댄다.

그리고 정면에서 미소 공격을 당한 김지혜 또한 황상호의 웃음에 설레고 말았다.

분하게도!

“에이~ 난 내 얘기 하는 줄 알고 반가워서 온 거였거든.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친한 사람 많은 마당발 황상호.

그는 우리 학교에 왕자님 후보 중 TOP3에 해당하는 인기남이었다.

???

학교 복도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강준과 한미영의 촬영이 끝나고 내 촬영 시간이 됐다.

간단하게 복도를 걷기만 하면 되는 씬이라서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최감독님이 의외의 부분에서 활활 불타올랐다.

“NG! 바람이 너무 안 불었어. 다시 찍죠.”

“NG! 리액션이 너무 약해! 여학생들 더 과장 되게 호들갑 떨어!!”

“NGNG!! 해솔씨, 걸음을 좀 더 도도하게 해줘요. 왕이 걷는 걸음처럼 말입니다.”

“아~ 좋았긴 한데 다시 해봅시다. 조명 더 빡세게 켜라!”

“바람 좀 더 세게 틀라고!! 다시!”

“이번엔 자켓 벗고 해봅시다.”

“나는 치명적이다! 나는 왕이다! 이 왕국의 황제다! 자신감 있게! 걸음에서 자신감이 뚝뚝 떨어져야 해요. 표정은 차갑게!”

최감독님은 하루 종일 내 복도 걷는 것만 찍을 기세로 마구 몰아붙였다.

다양한 각도, 다양한 방식으로 미친 듯이 내 얼굴을 찍고, 전신샷을 찍기도 하면서 공을 들인 것이다.

‘내가 연기를 못하나? 아닌데, 연습했을 때 나쁘지 않았는데?’

NG의 이유는 다양했다.

그리고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최감독님의 요구 조건도 다양해져 갔다.

“헤어스타일 바꿔서 가봅시다. 머리 올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예.”

“팔에 서류 같은 것도 좀 들죠. 소품팀!! 소품 가져와. 팬클럽들 중에 한 명 골라서 쓰러지는 샷도 찍읍시다. 이건 얼굴이 개연성이라 그 정도 연출은 괜찮을 것 같아.”

최감독님은 결국 대본에 없던 장면까지 추가로 찍고서야 만족을 하셨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하필이면 자아도취하는 모습을 찍어야 했던 나는 첫 씬이 끝나자마자 기진맥진해졌다.

‘체력 주머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촬영이 이렇게까지 사람 기를 쪼옥쪼옥 빨아먹는 것일 줄 몰랐다.

“형, 괜찮아?”

“엄청 힘들다. 나 연기 너무 못했냐?”

“아니! 잘했어. 형이 잘 하니까 감독님도 욕심나서 여러 번 찍으신 거지.”

“연기 진짜 어렵다.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나는 35%로 올려뒀던 연기에 더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내가 좀 더 연기를 잘 해냈다면 이렇게까지 여러 번 찍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한숨 돌리는 사이.

최감독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찍혔는지는 나 또한 매우 궁금했기에 그쪽으로 갔다.

“잘 찍혔나요?”

“휴우~ 아니.”

“네?!”

“기계가 문제인가?”

“뭐 잘못 됐어요?”

최감독님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확인하더니 인상을 더 팍팍 찌푸렸다.

“아무래도 카메라에 실물을 다 담는 건 무리인가 봐. 젠장! 아무리 찍어도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못 나왔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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