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7. 촬영 시작 (5)
* * *
‘선배님, 선배님??’
으음…머야….
‘아예 일어나질 못하네.’
‘핸드폰도 잠겨있지?’
‘응.’
‘어떡하죠, 누나?’
시끄러어…
‘어쩔 수 없지. 내가 책임지고 근처 모텔에다 옮겨야지.’
‘누나 들 수 있겠어요? 저희도 같이 도울게요.’
쿠울….
‘큰일 날 소리!! 너희들을 데리고 어떻게 모텔을 가니?’
‘방법이 없잖아요.’
‘아! 회사로 데려가죠. 회사에 직원들 자라고 있는 숙직실 있잖아요.’
‘그럴까?’
번쩍!
“헉!”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으으…내 머리…!”
머리가 찌를 듯이 아프고, 속이 쓰렸다.
배는 부글부글 끓으며 비명을 지른다.
놀랍지는 않았다.
익숙한 숙취였으니까.
이 끔찍한 숙취를 느낄 때마다 다음에 또 술을 마시면 내가 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술이 없으면 안 되는 삶인지라 영 다짐이 지켜지지가 않는다.
속이 울렁거려서 헛구역질을 한 한민영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보고 깜짝 놀라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 흡!?”
주변이 낯설었다.
‘어제 어떻게 된 거지?’
뒤늦은 자각이었다.
황급히 잘 떠지지 않은 퉁퉁 부은 눈을 비벼 뜨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창고 같이 작은 공간.
이층 침대들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모텔 같은 곳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더불어 이곳은 절대 그녀의 원룸방도 아니었고 말이다.
시끌시끌
‘밖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지나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추측에 근거를 더해주고 있었다.
‘미친년! 술 처먹고 뭐한 거야!!!’
휙휙!
고개가 빠르게 돌아간다.
도르륵 도르륵
눈동자가 거칠게 떨린다.
아래로 몸 상태를 확인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있는 장소를 추측해본다.
‘모르겠어!’
울렁대던 속이 너무 놀라서 그런지 착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바깥을 확인했다.
역시나 모르는 곳이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방 안을 서성였다.
어제 있었던 일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한다.
“미친년미친년또라이년돌은년! 아아아아아 이제 얼굴을 어떻게 보지? 망했어. 내 인생은 망했다고.”
어제 술자리에서 했던 추잡한 술주정.
낯을 들고 있을 수가 없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절로 부들부들 몸이 떨린다.
이곳엔 왜 쥐구멍이 없는 걸까?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곳에 들어갔을 거다.
똑똑똑
“힉!”
어찌 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몸이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한민영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사이 기어코 문이 열렸다.
“어? 깨셨네요.”
“그, 그, 그…!!”
안으로 들어 온 사람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진해솔.
자신이 술자리에서 술주정을 부렸던 그 남자였다.
???
한민영씨를 회사 숙직실에 두고 문 앞에는 출입금지를 적어두었다.
나름 그녀도 배우이고,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으면 불쾌해 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숙직실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었기에 하루쯤 출입금지해도 문제는 없었다.
회사에서 잠을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회사 숙직실로 곧장 향했다.
한 손에는 숙취 해소제를, 한 손에는 일회용 세안도구를 든 채로 말이다.
“어? 깨셨네요.”
“그, 그, 그,…!!”
숙직실 안으로 들어가니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한민영씨가 잔뜩 당황해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깨기 전에 와서 메모 적어두려고 했는데 엄청 놀랐겠다. 여기 저희 회사 숙직실이에요. 어제 술기운에 잠들었는데 집이 어딘지 알아낼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모셨어요.”
“죄,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원래 그, 그런 사람이 아닌데…시, 실례 했습니다!!”
잔뜩 오그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짠해진다.
여태까지 만난 여자들 대부분이 나름 한 자락(?)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저렇게까지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찐따’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는 한민영씨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음, 일단 여기 나가서 바로 맞은편에 샤워실이 있거든요? 여기 일회용품 있으니까 사용하시고 나오세요. 아! 속 안 좋으실 테니까 숙취 해소제도 사왔거든요. 이거 마시면 속이 좀 편하실 겁니다.”
“괘, 괜찮습니다. 하룻밤 재워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민폐였어요. 집으로 돌아가 볼게요.”
“어…아뇨. 좋지 않은 생각이에요. 씻고 가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네, 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한민영씨의 모습에 나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거울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
내 말을 들은 한민영씨가 사색이 되더니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내 손에 들린 일회용 세안도구를 빼앗듯이 낚아채 사라졌다.
꺄악!!
샤워실 안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를 보아 하니 자기 몰골을 확인한 모양.
사람이 도의심이 있지.
저런 얼굴을 한 사람을 그냥 보낼 순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민영씨도 배우였으니 말이다.
잠시 후.
촉촉하게 젖은 머리와 화장이 지워진 얼굴을 드러내며 주춤주춤 샤워실 밖으로 나온다.
내가 벽에 기대서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한 한민영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왜 여기 있어요?”
“해장하러 가야죠. 저 일부러 아침 안 먹고 왔는데.”
“…저랑 해장을 하러 간다고요? 제정신이에요? 그쪽 아이돌이잖아요.”
“누가 보면 제가 월드 스타인 줄 알겠어요. 안경만 써도 사람들이 저 못 알아봅니다. 그러니까 스캔들 걱정하지 마세요.”
솔직히 스캔들 걱정은 내가 해야 하는 게 맞다.
무명 배우에 불과한 그녀가 나와 스캔들이 나면 화제에 오르며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을 테니까.
“전 기사 나도 책임 못 져요. 저 소속사 없는 거 알죠?”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스캔들이 나면 제가 책임지고 해명할 게요. 근데 정말 그럴 일 없어요. 이 안경에 특별한 힘이 담겨 있거든요. 이렇게 안경을 착용하면 사람들은 절 못 알아보는 거죠.”
“장난해요?”
진짜인데 믿지 않는 한민영씨에게 씨익 장난기를 담아 웃어 보인 뒤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가시죠. 우리 회사 근처에 맛집 있어요. 해장으로 뭐 먹는 거 좋아해요? 콩나물 해장국? 순대국? 뼈해장국? 북엇국?”
“…이 손 놔주시죠? 그리고 콩나물 해장국이요.”
“하하, 야무지시네. 좋아요, 접수했습니다!”
냉정하게 떨어지라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 손목을 슬그머니 놓은 뒤 콩나물 해장국 집으로 움직였다.
의외로 한민영씨는 내 뒤를 순순히 따라왔다.
이곳이 어딘지 전혀 모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콩나물 해장국이 그녀에게 꽤 절실했던 게 틀림없다.
후루룩! 후루루룩!
냠냠냠.
한민영씨는 맛집의 콩나물 해장국을 만나 비로소 행복을 맞이했다.
나도 즐겨 찾는 가게인데, 올 때마다 이 집은 항상 실망시키지 않는 퀄리티를 자랑했다.
평소에 먹어도 맛있는데, 술까지 잔뜩 먹어서 해장국으로 먹는 상황이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터.
“움…우움…움!”
다람쥐가 도토리 숨기는 것 마냥 두 볼이 빵빵해진 채로 콩나물 해장국을 먹는다.
솔직히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마신다는 표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귀엽네.’
나는 콩나물 해장국을 먹는 대신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먹는 거 CF 찍으면 대박 날 듯.’
이쪽의 예쁜 여자들을 워낙 많이 봐서일까?
화장기가 사라진 수수한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예쁘다곤 못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못 생겼다고 해서 매력이 없는 건 아니다.
복순 누나도 얼굴 자체는 뛰어나지 않은 편이지만, 나는 그녀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한민영씨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녀는 못 생겼다는 취급을 당할 지언정 평범하다는 평가는 받지 않게 생겼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예쁘고 잘 생긴 미녀, 미남들만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얼마든지 좋은 배우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모 콤플렉스가 어마어마했지만.’
1차 술주정을 부리고 쓰러진 후 한민영씨가 다시 깨어났을 때.
2차 술주정이 시작 됐었다.
잔뜩 혀가 풀린 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본인의 얼굴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한 것이다.
내 얼굴 가죽 좀 뜯어서 자기 주면 안 되겠냐는 살벌한 바람도 숨기지 않은 채 말이다.
‘나 연기 정말 잘 하거든? 근데 얼굴이 못 생겨서 배우가 못 된대. 너무 억울해. 내 노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처음에 보였던 우리에 대한 적대감은 본인에 대한 낮은 자존감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무언가 일을 벌일 만큼 대범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평범 그 자체네.’
배우는 평범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연기의 매력에 푹 빠졌는지 알 수 없으나 정말 그녀가 미녀가 된다면 대단한 스타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는 했다.
‘연기하는 걸 좀 잘 봐둘 걸 그랬네.’
후루루루루룹!!!
콩나물 해장국의 마지막 국물까지 모조리 뱃속에 때려넣는 걸 본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자리에 내 몫의 콩나물 해장국을 밀어주었다.
“하나 더 시켜드릴까요?”
“!!!”
맛집 콩나물 해장국에 푹 빠져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내 말에 화들짝 놀란다.
다람쥐처럼 입에 한 가득 콩나물 해장국을 넣고 씹어 먹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기에 내 몫의 해장국을 선뜻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흠흠, 맛집이라 그런가 맛있기는 하네요. 배불러서 더 못 먹어요.”
“속은 어떠세요.”
“많이 풀렸어요.”
샤워실 안에서 토하는 소리도 들렸기에 속이 안 풀릴 리가 없기는 하다.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각 잡지 말죠, 누나.”
“예? 누, 누나요?”
“어제 기억 안 나요? 우리 누나 동생 하기로 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녀 말대로 우리는 누나 동생하기로 한 적이 없다.
“아닌데. 기억 못하시는 거에요? 하긴, 술에 많이 취해 있긴 했었죠. 그래도 낙장불입이에요. 못 바꿉니다. 반말 하시고, 해솔이라고 불러주세요.”
“거짓말!! 기억 안 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쪽이랑 제가 왜 누나 동생을 해요? 뭐가 좋다고!”
“앞으로 같이 촬영할 거니까 친하게 지내면 좋죠. 누나는 저 싫어요? 술 마셨을 땐 좋다고 했으면서.”
“내, 내가 그랬다고요? 사기 치지 말아요! 저 다 기억하거든요?”
“정말 다 기억해요?”
“네!!”
“쯧, 아쉽네.”
“?!”
내 말에 경악한 한민영씨가 입을 쩍 벌리고 굳는다.
검지손가락은 나를 향한 채로다.
“그냥 누나 동생 하시죠. 저랑 친해지는 게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아실 필요가 있어요.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게 좋아요.”
정말 흔치 않은 호의였다.
나라면 그녀가 술에 취해 한탄을 하던 그녀의 외모를 바꿔줄 수 있었으니까.
“그 얼굴이면 자의식 과잉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드는데요, 좀 무례하지 않아요?”
“애교부린 건데 무례하다고 느끼셨어요? 이건 좀 서운하네.”
역시 남자 애교는 나랑 안 맞나?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데 한민영씨가 눈을 질끈 감더니 외친다.
“자, 자꾸 미인계 쓰지 마요!!”
내가 언제 미인계를 썼다고 그래?
억울하다.
“저 같은 동생 얻는 거 진짜진짜 쉽게 안 오는 기회에요. 이걸 놓치면 평생 후회할 텐데 정말 제 누나 안 할 거에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고. 누나는 여태까지 준비를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 잡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진해솔씨, 당신이 기회라고요? 절 유명한 스타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말하네요.”
“누나가 정말 술 취해서 말한 것처럼 연기를 잘 하는데 미모가 부족한 거였다면요.”
“…….”
오랜만에 여자 꼬시려고 여우짓을 하고 있으려니 혓바닥이 잘 안 돌아간다.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후회되진 않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내가 가진 능력을 사용해서 내 이상형인 여자를 만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자기 얼굴에 불만이 많은 그녀라면 내가 어떻게 변화시키든 좋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제 누나가 되면 저랑 섹스하셔야 돼요.”
푸우우웃!!!
내 황당한 말에 속을 식히려는지 물을 아시던 한민영씨가 물을 분수처럼 쏟아냈다.
인식저하 안경도 그녀의 화려한 분수쇼는 막아내질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