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18. 한민영 (2)
* * *
그리고 여기에도 설익은 첫 연애를 시작한 여인이 한 명 있다.
이름은 한민영.
직업은 배우.
본인이 연기하는 김지혜가 오늘 한 남자에게 반해 첫사랑을 시작한 것과 비슷하게 그녀도 오늘 인생 처음으로 애인이 생겼다.
그 애인은 아이돌이며, 이 세상 얼굴이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생긴, 자신에겐 너무 과분한 남자였다.
그래서 일 것이다.
‘실감이 안 나.’
그녀, 한민영은 눈앞에 있는 남신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남자의 모습이 적응 되질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자꾸 허벅지를 꼬집게 된다.
그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을 뛰어넘었다.
촬영이 끝나고 진해솔의 매니저 차를 타고 집까지 편하게 온 그녀는 곧이어 집 앞에 도착한 진해솔과 만났다.
‘몰래 만나는 거라서 더 짜릿했던 걸지도.’
집으로 잠깐 들어오겠냐는 형식적인 말은 하지 못했다.
너무 낡고 초라한 자신의 집을 보여주기엔 부끄럽고 창피했으니까.
그는 한민영의 손을 덥석 잡고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택시를 탔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하핫! 괜찮다니까요?”
첫 데이트라서 좀 기념 될 만한 곳을 데려오고 싶었다며 패밀리 레스토랑에 덜컥 와버린 그는 그녀가 걱정할 걸 안다는 듯이 계산을 먼저 해버리고는 스테이크와 각종 음식들을 시켰다.
‘맛있어. 고기가 입에서 녹네. 스테이크가 원래 이렇게 맛잇는 거였구나.’
15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의 스테이크 A코스 2인분에 샐러드바.
가벼운 식전 빵과 더불어 건강에 좋은 생 과일 주스까지.
그곳에서 그녀는 배 터지도록 밥을 먹었다.
아직까지 다 지워지지 않은 진해솔에 대한 반발심에 일부러 더 열심히 먹었던 것 같다.
‘언급하기 싫어서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누가 봐도 지금 이거 스폰인 거잖아.’
남자한테 스폰 받는 여자라니.
웃긴 얘기이긴 한데, 아예 없다고는 못할 일이다.
물론 조건이 무척 까다로워진다.
예쁜 여자가 워낙 많은 터라 못 생긴 여자는 몸을 팔고 싶어도 못 판다.
수요가 없으니까.
“어딜 가자고?”
밥을 모두 먹고 난 후.
적당히 한적한 곳에서 음흉한 짓을 하게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을 하던 중, 진해솔로부터 전혀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저쪽에 야시장처럼 여러 가지 파는 가게들이 많더라고요. 거기 구경하러 가죠.”
진해솔은 대뜸 꽉 찬 배를 꺼트리자며 그녀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나랑 거길 가겠다고?”
“그럼 여기서 누구랑 같이 가요? 나랑 같이 있는 사람은 민영 누나잖아요.”
“무슨 배짱인 거야? 무조건 들킬 거야.”
“말했잖아요. 안경이 있어서 괜찮다고. 그리고 누나는 저랑 스캔들 나는 걸 바라야 하는 입장이라니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 저한테 다 맡긴다고 했죠? 약속 지켜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절 믿으시라니까요?”
이 남자는 간 덩어리가 남들보다 2배는 되는 모양이다.
뭘 믿고 저러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켜도 정말 난 모르는 일이야. 네가 하자고 한 거다?”
“넵!”
결국 한민영은 진해솔이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
그 자신감의 끝이 어디까지 가나 보고자 한 것이다.
그녀의 허락을 받은 진해솔은 잔뜩 신나서 해맑게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수시로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구매해서 그녀의 품에 안겨줬다.
“이거 누나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어…이것도 주세요!”
“…또 사려고?”
“이거랑 이거 주세요.”
“그만 사!”
“이 인형 누나 닮지 않았어요? 킥킥! 이거 주세요!”
“야! 그만 좀!! 나 이제 들 손도 없어!”
정신없이 쏟아지는 선물에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다.
어어어 하면서 끌려다니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더불어 이 쇼핑백들이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이게 다 내 거라고?’
남에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
생일파티를 했어도 이것보단 적었을 터.
한민영은 이 갑작스러운 선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물 준 사람이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에 불쾌해 했다면 몰라도 진해솔은 그녀가 기뻐하던 안 기뻐하던 상관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녀에게 준 각종 선물들이 ‘선물’이라기 보단 ‘기념품’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애석하게도 한민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 아무도 못 알아 보는 거지? 내가 이상한 거야?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이 정도로 오랫동안 돌아다녔는데, 한 명도 진해솔을 몰라?’
진해솔은 워낙 잘 생긴 얼굴로 데뷔하자마자 여러 곳에 얼굴을 알렸다.
아이돌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진해솔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진해솔을 몰라도 저런 남자가 지나가는데 여자가 안 쳐다본다고? 말이 안 되잖아.’
모자를 쓰고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워낙 훤칠한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좋은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하물며 남자가 없어서 수많은 여자가 독수공방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주변에 남자가 있어서 그런 건가?’
길거리에 데이트 나온 사람이 그녀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 주변에 연애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솔로인 건 아닌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다녔구나.’
허탈함이 밀려온다.
왜 나는 저런 여유를 갖지 못했는가.
나는 무엇이 부족해서?
저들은 무엇이 특별해서?
꽈악
“아?”
“누나, 무슨 생각해요? 저랑 데이트 하고 있는데 다른 남자한테 한 눈 판 건 아니죠?”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힘.
자신과 손을 잡고 있는 남자로부터 전해지는 생동감 있는 온기였다.
“다, 다른 남자라니! 그런 거 아니야. 널 두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죠? 저처럼 잘 생긴 남자를 옆에두고 못 생긴 남자한테 관심 가질 리 없잖아요.”
“당연하지!”
그녀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각하지 못한 채 질투심(?)을 보이는 진해솔에게 활급히 변명했다.
“그냥 믿겨지질 않아서 멍했던 거야. 태평하게 남자 손 잡고 데이트를 하게 될 줄 몰랐으니까.”
“저랑 데이트하는 게 싫은 건 아니죠?”
“아니! 절대 안 싫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는 게 문제인 거다.
꽁꽁 닫아놨던 문을 진해솔이 미친듯이 두드리며 문 열라고 협박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 협박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끝은 분명 비극이 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를 붕 뜨게 만들고 버리려는 걸 거야. 이게 진짜 내 거인 줄 알고 행복해 할 때 지옥으로 처박겠지!’
이건 질 나쁜 악마의 수작질이다.
그렇게 자신을 계속해서 세뇌하고 세뇌했다.
그래야 버림받았을 때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받을 테니 말이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민영의 속은 역으로 곪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누나 표정이 안 좋아서 너무 내 생각만 했나 했거든요. 그럼 더 놀아도 되는 거죠?”
“응. 근데 사는 건 그만해. 오늘 사준 것만으로도 나한텐 벅차는 일이야.”
“많이 무거워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들겠다니까 꾸역꾸역 가져가서는. 이리 줘요.”
“아니아니! 무거워하는 말이 아니라 부담 돼서 그래!!”
한민영의 말을 들은 진해솔이 돌연 씨익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다.
“부담 됐어요?”
“부담이 안 될 리가 없잖아.”
“그럼 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 되잖아요.”
“당연히 그러려고 했어. 근데 이래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방법이야 많죠. 예를 들어보면…이쪽으로 와 봐요.”
진해솔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녀를 데리고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으슥한 골목길인지라 이목을 집중시키진 않을 듯했다.
“여, 여기는 왜?”
“감사 인사 하고 싶다면서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요.”
“뭐, 뭔데?”
사실 그녀도 분위기를 알기에 지금 진해솔이 하려는 게 뭔지 알았다.
하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차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눈 감고 가만히 있어요.”
초옥!
갑자기 훅 다가오는 진해솔의 얼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돌려야 할까 고민했으나 손에 든 묵직한 무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닥칠 일이 막연하게 언젠가는 해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왔던 일이기에 더더욱 피할 수가 없었다.
‘키, 키, 키스!?!? 키스 맞지? 꺄아아악!!!’
촉촉하고 물컹한 것이 입술에 맞닿는다.
따듯하고 몰캉한 그것은 생전 처음 느끼는 생경한 감촉이었다.
두근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과 복잡해진 머릿속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하는 거야?
여자니까 좀 능숙하게 리드를 해줘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녀는 경험이 없는 처녀인지라 이런 쪽에 대한 지식이 백지나 다름없었다.
영상에서 봤던 수많은 키스신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몸을 알았던 걸까?
진해솔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배, 뱃살!!’
허리에 둘러진 팔이 그녀의 아랫배를 기분 좋게 압박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키스에 정신이 쏙 빠졌더라면 좋았겠으나, 그녀는 진해솔의 팔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소중한 뱃살이 더 신경 쓰였다.
‘다이어트 좀 할 걸.’
초옥! 쪽!
그녀가 본인의 뱃살에 신경쓰는 사이.
자잘하고 가벼운 키스의 시간이 지나가고, 조금씩 열린 그녀의 입속으로 뭉클하고 질척한 혓바닥이 쑤욱 들어왔다.
‘흐읍!!’
이 순간부터는 미친 듯이 신경 쓰였던 뱃살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입 안으로 들어 온 낯선 혓바닥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아는 게 없었던 그녀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아!’
떠진 눈으로 보이는 긴 속눈썹과 영롱한 검은색 눈동자.
‘예쁘다.’
그는 그녀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서툰 모습을 다정하게 지켜봐주고 있었다.
그리고 입 안에 들어왔던 혀가 그녀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걸 가르쳐주려는 듯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게 해솔이 향기…?’
그와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어서 일까?
진해솔의 짙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츄릅, 츄웁!
쪽, 쪼옥!
“후웅…웅….우움…쪽.”
정신이 몽롱해진다.
분명 발에 땅이 닿아 있는데, 어쩐지 공중에 붕 뜬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나를 구원해줄 사람.’
그것도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난 여주인공이다.
백마 탄 왕자님이 너무 착하고, 비현실적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줘서.
재투성이 공주님은 선뜻 그를 믿을 수가 없었더랬다.
하지만 그와 숨결을 나눈 이 순간.
재투성이 공주님은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결국 빠져버렸어. 이런 거 당해놓고 없었던 일처럼 태연해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새로 받게 된 배역에 푹 빠진 한민영은 완전히 그 캐릭터에 동화 되어 버렸다.
데이트 내내 드는 비용은 모두 해솔이의 지갑에서 나왔고, 그의 이끌림에 따라가면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꽃들도 오늘은 예뻐 보였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나는 싱그러운 향기도 그녀의 코끝을 살살 자극하며 평화로움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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