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22화 (122/849)

〈 122화 〉 #18. 한민영 (5)

* * *

내가 얼떨결에 만든 곡은 아현이에게 완전히 맡기기로 했다.

이 곡을 통해 아현이가 본격적으로 작곡가 데뷔를 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작곡가 활동명은 따로 만들어서 쓰자. 내 본명을 쓰는 건 아닌 것 같아. 아이돌이 연기하고 있는데 작곡까지 한다고 하면 이상한 시선을 받을 거야.”

“어떤 걸로 할 건데? 생각해둔 거 있어?”

“음…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내 이름이 알려져서 귀찮은 것도 있지만, 자칫 내 인지도 때문에 아현이에게 쏠려야 할 관심을 빼앗아 갈 수 있었다.

때문에 내 이름은 깔끔하게 숨겨두고 예명으로 활동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현이도 예명을 쓰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우리 둘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블루&베리 라는 다소 상큼한 예명으로 활동을 결정 내렸다.

예명까지 척척 해결이 됐는데, 마지막으로 공동작곡가를 하자는 건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공동 작곡가야?”

“오선지에 있는 걸 음원으로 만들어줬잖아.”

“그건 아무나 다 할 줄 알아! 미디 프로그램 다룰 줄 아는 사람한테 만들어달라고 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솔직히 이런 영감을 언제 또 얻을지 알 수가 없잖아. 나는 본업이 있어서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하긴 어려워. 근데 반대로 오늘처럼 영감이 또 떠오르면 만든 곡을 썩혀두는 건 아까운 일이라며.”

그래서 내가 ‘영감’으로 떠오른 멜로디를 오선지에 적으면, 아현이는 그 곡을 음악 프로그램을 이용해 곡을 만들고 다듬는 부분을 맡아줬으면 했다.

“그냥 해주면 되는 거잖아. 굳이 공동작곡가로 올릴 필요 없어.”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아현이는 무료로 해주겠다며 우겼다.

“앞으로 미디 프로그램에 더 익숙해지면 얼마 걸리지도 않아.”

“대가 없이 이걸 해주겠다고? 우리가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호의가 계속 되면 둘리가 되는 법이야. 네가 공짜로 해주겠다고 내가 좋다고 계속 곡을 맡길 것 같아? 그냥 서로 부담 갖지 않게 공동 작곡가로 하자.”

대가 없이 도와주겠다는 아현이의 말은 내 쪽에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선지에 적힌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각종 악기들로 색을 입히는 과정 또한 작곡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인지 우리들은 각자의 의견을 쉽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한참 말싸움을 하고나서야 아현이는 공동작곡을 받아들였다.

‘영감 받은 곡들을 싹 다 버려버리겠다고 협박하니까 그제야 받네. 어휴, 고집쟁이.’

아현이는 미안함과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해볼게. 네 곡이 묻히지 않게.”

“고마워. 내가 너 아니면 마음 놓고 부탁할 사람이 어딨겠어? 잘 생각한 거야.”

앞으로 아현이는 내가 만든 곡에 각종 악기들로 색을 입히면서 더 대단한 곡이 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진짜 아현이가 아니었으면 그 곡은 오선지에 적고 끝이었을 거야. 내 스케줄에 작곡까지 추가시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더군다나 이 곡은 내 그룹이 부를 수 있을 만한 곡도 아니지 않은가?

아마 기억 속에 금방 묻혀버렸을 것이다.

아현이와 나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겨우 설득했으니까 아현이를 위해서라도 영감이 부지런히 일 해줘야 되는데 얘가 또 언제 터질지 알 수가 없네.’

일단 섹스를 하고 나서 ‘영감’이 떠올랐으니 부지런히 같은 방법을 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기승전 섹스인 건가.’

능력의 사용이 성적인 것에 관련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아현이는 축 늘어진 게 언제였냐는 듯 본격적으로 내 곡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덕분에 2차 섹스는 없는 일이 됐고, 나는 쓸쓸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아현이의 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진짜 곡을 만드는 걸 좋아하긴 하는 모양인지 부리 입을 해선 집중하는 아현이의 모습을 보고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열정을 보고 있으려니 앞으로 맡기게 될 곡이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라면 좋은 곡으로 완성시켜 줄 게 분명했다.

? ? ?

“이게 모형인 거죠?”

“네. 자세히 보면 가짜 티가 나요.”

오늘은 강준과 민영 누나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서 찍는 촬영이었다.

내가 연기하는 학생회장 유은탁이 수상한 짓을 하는 걸 황상호(강준)와 김지혜 (민영)이 우연히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마냥 친절하고 사람 좋아 보이던 완벽한 ‘엄친아’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만약 내가 연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면 이 설정은 없는 일이었을 거다.

‘연기를 잘해서 분량이 엄청 늘었지.’

4화부터 수정을 시작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지 촬영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히고 있었다.

촬영 날이 많아지는 건 예정에 없는 일이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수정 된 대본이 예전보다 훨씬 좋았기에 순순히 따르고 있는 중이다.

단순히 ‘왕자님 찾기’만 있는 것보다는 유은탁의 수상한 행동들로 인한 ‘스릴감’과 ‘공포’를 챙기는 것이 웹드라마의 인기를 위해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배우들도 바뀐 대본을 훨씬 좋아하는 눈치고.’

분량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신인이라서 그런지 작가와 감독에게 분량으로 투정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유은탁을 연기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런 캐릭터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단순히 엄친아는 연기하기 재미없었어.’

본의 아니게 악역을 연기하게 될 예정인데, 그 악역 연기가 왜 이렇게 기대되고 재밌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할까?

평범한 사람은 절대 해보지 못할 짓을 연기라는 가면을 핑계로 해볼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이래서 배우들이 연기에 빠져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자세히 봐도 감쪽같은 데요? 징그러워서 오래 못 보겠어요.”

고양이 시체 모형을 자세히 보다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래 보기엔 좋지 않은 외형이다.

특히 가짜 피가 묻어 있는 부분과 죽어서 초점이 없이 떠져 있는 눈은 모형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득한 느낌을 주었다.

“돈 많이 들었겠네요.”

“아무렴요.”

스태프가 정확한 액수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한두 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웹드라마 만드는 것 치곤 투자금이 꽤 많이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이런 사소한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걸 보니 투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구나 싶다.

“형! 그게 가짜 고양이 시체야? 으아, 징그러워!”

“진짜 같지?”

준비를 끝내고 온 강준이가 고양이 모형을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완전. 가까이에서 보니까 가짜 티가 좀 나는 것 같긴 한데, 모르고 봤으면 무조건 진짜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솔직히 모형을 만드는 것보단 검은색 봉다리에 피가 세어나온다는 식의 연출로 떼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들여서 모형을 만들어주신 걸 보니 내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 같았다.

‘진짜 잘 해야겠네.’

한껏 끌어 올린 연기력 스탯과 더불어 연기 이론 서적까지 완벽하게 적용 된 현재 내 연기력은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다.

준이가 신경 쓰여서 연기력을 올리는데 소극적이었는데, 실전으로 뛰다보니 그런 식의 여유는 기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준이도 실력이 늘어나는 나를 보며 질투를 하기보단 자기 실력을 늘리는데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마음을 놓고 치트를 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런 기회도 잡은 거지.’

생각보다 빠르게 대기 시간이 흐르고.

촬영에 들어갔다.

나는 고양이 모형이 검은 봉지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저렇게 잘 만들어놓고 봉지로 가리는 이유는 심의 때문이었다.

‘대충 검은 봉지에 피로 때우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제작진 쪽에서 디테일에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퀄리티 좋은 제작품에 걸맞은 연기가 필요할 듯하다.

조명이 꺼지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든 상황에서 온통 검정색인 옷을 입고 한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든 내가 거리를 걸었다.

어딘가 조급하고 주변의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골목길을 찾아 들어갔다.

비라도 내렸다면 좋았을 텐데, 밤하늘에 뜬 달은 무심하게도 주변을 너무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유은탁은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은 담벼락 아래에 우뚝 섰다.

하필이면 그 담벼락이 그를 아는 누군가의 집 담벼락인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잉? 이게 뭔 소리야?”

푹! 푹! 푹! 푹!

무더운 더위에 지쳐 마당 평상에 드러누워 있던 김지혜(민영)의 귓가를 자극하는 이상한 소리에 저절로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2시.

이상한 소리는 무더위에 지쳐 잠 못 들던 김지혜의 신경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누가 또 담벼락에 오줌싸나?”

가끔 술 취한 아저씨들이 집 담벼락에 노상방뇨를 하는 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

그녀는 가만 두지 않겠노라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노상방뇨 범인은 현장에서 잡아야 발뺌을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소리의 근원지로 향한 김지혜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겨우 막아냈다.

푹! 푹! 푹! 푹!

‘저, 저거 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를 하고, 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수상한 남자가 땅을 덮고 있었다.

그녀가 오기 전, 무언가를 이미 묻어둔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뭔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겠으나 그녀의 본능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겨,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김지혜가 갈등하고 있던 그때.

‘흡!!’

땅을 덮다가 실수로 모자를 떨어트린 남자를 본 김지혜의 두 눈이 커진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숨을 참은 뒤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소름끼치는 인기척을 갖고 있는 수상한 남자의 얼굴은 김지혜에게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불가능했다.

‘유은탁, 학생회장이었어.’

독보적인 미남으로 유명한 유은탁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누가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공부 잘하며, 잘 생기기까지한 완벽한 남자가 한밤중에 사람들 몰래 무언가를 땅에 묻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지혜는 끝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채 잠들지 못하고 밤을 지세운다.

‘뭘 묻었는지만 확인하자. 내가 오해한 걸지도 모르잖아.’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다고 큰 범죄를 저지른 범인 취급을 할 순 없었다.

증거가 있어야 했고, 마침 그가 수상한 걸 묻었던 장소는 자신의 집 담벼락이었다.

차마 밤에는 무서워서 가볼 수 없었고, 결국 아침이 되어서야 땅을 파보기 위해 담벼락으로 향했다.

“하씨, 개무서운데. 그냥 경찰 불러다가 파달라고 할까?”

“너 뭐하냐?”

“엄마야악!!!”

“어우! 깜짝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김지혜가 쭈그려 앉아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황상호를 노려봤다.

“너 때문에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아침부터 기차 화통을 삶아드셨나…그리고 떨어질 애는 있고?”

“아오씨! 저리 가! 장난 칠 기분 아니니까.”

“너 수상해. 날 좋은 주말 아침부터 땅은 왜 파고 있는 건데?”

운동을 하고 있었는지 운동복을 입고 있는 황상호가 영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김지혜는 고민하다가 그에게 모종삽을 내밀었다.

“가기 싫으면 여기 네가 파.”

“…내가?”

“싫으면 가고.”

“알았어. 파면 되잖아. 여기에 뭘 묻어 놨기에 그래?”

툴툴대면서도 황상호가 쪼르려 앉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드러나는 정체 모를 검은색 비닐.

황상호와 김지혜가 황급히 코를 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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