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8. 한민영 (7)
* * *
“많이 아는 건 아니고, 그냥 관심 있어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다니는 정도입니다. 저기 걸려 있는 ‘라올로의 해질녘’은 저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내 이러한 말이 최희민 작가의 아내에게 잘 먹혀들어갔는지 박수를 짝짝치며 굉장히 좋아했다.
“자기야, 이 친구 너무 마음에 든다. 친하게 지내요.”
“잘 생겨서?”
“응. 얼굴만 떼다가 우리 집에 걸어두고 싶다.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제가 아름다운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외모도 외모지만, 대화가 통하잖아. 자기랑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두 사람의 관계가 참 재밌다.
일방적으로 누구 하나에게 유리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진 관계라는 게 보인다는 거다.
“우리 집 요리 맛있으니까 많이 먹고 가요.”
“예.”
“좋은 여자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고요. 해솔씨한테 도움이 되어 줄 좋은 여자를 많이 알고 있거든요.”
“하하, 제가 아이돌이라서요.”
“아이돌이면 뭐 어때서요. 좋은 여자는 남이 채가기 전에 쟁취해야 좋은 거에요. 지금이야 여자 만나지 말라면서 막겠지만, 좋은 여자 한 명 챙기면 이후로는 그쪽에서도 함부로 터치 못해요.”
들어 본 적 있다.
상류층 여자를 만나기 위해 아이돌을 하면서 얼굴을 알리는 애들이 있다는 걸.
그렇게 상류층 여자 한 명 낚으면 미련없이 이 바닥에서 은퇴를 해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여자 만나는 수단으로 생각한 적 없다.
‘아이돌을 하느라 여자 만나는데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된 적은 없었어.’
그녀도 나름 나를 위해 상류층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걸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호의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음악을 하려고 아이돌을 하는 거라서요. 좋은 인연이 될 여자를 만나는 건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 좋은 기회를 주시려는 건 알지만 아직은 제가 바라고 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네요.”
내 거절을 그녀는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내 대답을 더 흐뭇해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좋은 만남을 바랄 때 꼭 저한테 말해줘야 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을 이어주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을 이어준다.
그 뜻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겠다는 뜻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보, 내 드라마 주연 배우 허파에 바람 그만 불고 나가줘. 일 얘기 아직 남았단 말이야.”
“기분 나빴어요?”
“내 마음에 쏙 드는 배우님한테 바람 불어넣는데 기분 안 나쁠 수 있겠어? 좋은 여자 만났으니 활동 안 하겠다고 은퇴해버리면 나만 곤란해지잖아. 이 얼굴은 최대한 오랫동안 널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구.”
최희민 작가의 투정에 황급히 그녀가 변명했다.
“미안해, 자기. 자기 입장 생각을 못했어. 사실 이번에 내가 투자한 드라마에 진해솔씨가 캐스팅 됐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부탁이 들어왔거든. 진해솔씨랑 연결 좀 해달라고 말이야.”
“정말?”
“해솔씨처럼 매력적인 남성한테 여자가 접근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야 그렇지.”
“그런 사람들 중에서 평소 행실 똑바르고, 성격 괜찮은 애가 있어서 연결시켜주면 좋을 것 같아서 제안해본 거야.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다시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그런 제안이 아예 안 들어오는 것도 아니라서요. 익숙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돈 좀 있다 싶은 여자들이 내게 추파를 던지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담 되는 선물이 소속사로 전달되는 상황이다.
오늘 그녀의 제안도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다.
“대단하다, 해솔씨. 괜한 자신감이 아니었네요.”
최희민 작가가 순수하게 감탄을 한다.
진해솔의 태도를 보면 상류층 여자는 자기가 바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으니 말이다.
“제 성격이 어떻든, 제 주변 환경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남자를 사람이 아니라 장신구처럼 생각하는 여자가 꼭 있지.”
“난 안 그래, 자기.”
“알아.그래서 내가 여보랑 결혼한 거잖아.”
쪽! 쪼옥!
두 사람은 손님을 앞에 두고도 스킨십에 거침이 없었다.
한참 키스를 나누던 그녀는 아쉬움을 한 가득 담은 채 헤어졌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해솔씨 가면 한판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
정말 거침없는 사람이다.
자기 성생활을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과 거침없이 공유하는 걸 보면.
“내가 지금 한 가지 고민하고 있는 게 있어요. 동생 유은진 캐스팅에 대한 건데, 원래 계획에 없던 캐릭터잖아요. 새로 캐스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해솔씨 아는 사람 중에 얼굴이 좀 비슷한 사람있어요? 가령 동생이나 형 같은 사람으로요.”
“제가 외동이라서요.”
“아~ 아쉽네. 아무나 캐스팅하면 분명 얼굴 차이로 엄청 까일 것 같아서 캐스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고민 중이거든요. 그냥 깔끔하게 캐스팅 하지 않고 연출로 커버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해솔씨는 둘 중에 뭐가 더 편해요?”
“연출로 가능하다면 굳이 캐스팅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동생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청자들에게 궁금증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럼 연출로 커버하는 쪽으로 가죠!”
“근데 이런 걸 배우랑 상의하는 게 맞나요?”
이쪽 바닥 일에 아는 게 많지는 않지만, 배우랑 이런 걸 상의하는 작가가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신인 핑계 대고 이것저것 다 해보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보지 마요. 작가는 배우랑 상의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네요.”
최희민 작가의 말이 백 번 맞았다.
나는 그때부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와 대본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연기에 관련 된 지식은 대본을 쓰는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희민 작가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대충 듣지 않고 경청하는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과하게 친근함을 보이며 접근해서 꺼려졌는데, 괜한 경계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최희민 작가네 집에서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
한편, 양아름은 남편 방에서 나와 곧장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다.
문자 메시지 몇 번 오가고, 곧 전화가 연결 됐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꼼꼼하게 방문을 닫은 후 전화를 받았다.
“응.”
…….
“저쪽에서 거절했어.”
…….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니까? 너 또 형편없는 남자 만나서 상처 받을 거야?”
…….
그녀가 지금 통화하고 있는 이는 어떻게든 진해솔과 다리 한 번만 놔달라고 재촉을 하던 친구였다.
오늘 진해솔에게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친구는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전화를 걸어 진상짓을 하고 있었다.
“어쩌겠어. 싫다는데. 강제로 만나는 건 너도 싫으니까 나한테 부탁한 거잖아.”
…….
“그래, 그래. 다음에 기회 되면 꼭 소개시켜 줄게. 네가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닌 건 알겠더라. 사람 참 괜찮아 보여.”
……
“난 우리 희민이만 사랑하거든? 견제하지 마! 기분 상하게 하면 소개 안 시켜준다?”
…….
“그래. 기회는 또 올 거야.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려. 알겠지? 응. 그래, 끊어. 나 저녁 준비해야 돼.”
…….
“야! 요리는 내가 안 하지만, 그래도 옆에 있어야 주방이 돌아가거든?”
…….
“그래, 끊어.”
전화를 끊은 양아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어쩜 이렇게 애가 찐따 같은지 모르겠네. 멀쩡한 년이 남자 문제만 나오면 찐따 냄새가 풀풀 나니 어휴. 한심해.”
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치근덕대는 걸 본 것만 해도 다섯 번이 넘는다.
돈도 많고 얼굴도 예뻐서 그 정도로 남자한테 치근덕대고 다녔으면 팜므파탈 소리를 들었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처녀 찐따지.’
돈은 돈대로 쓰고, 남자에게 호구 잡혀서 질질 끌려 다니다가 결국 다른 여자가 남자를 자빠트려서 빼앗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남자는 자기 몸이 가장 큰 가치라는 걸 알았기에 쉽게 잠을 자주지 않았고, 그녀는 몸을 사리는 남자를 자빠트리는 기술이 없어 생긴 일이었다.
‘이번에도 환승이별 당하면 아예 혼자 살겠다고 할 수도 있어. 뭐 금사빠 운명론자라서 아닐 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랑 만나기 시작했으면 꽁꽁 숨겨둘 것이지, 상류층 파티에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바람에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 버리곤 하는 친구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자신의 진짜 인연을 아직 만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빡빡 우긴다.
이제 그 친구에겐 자존심 밖에 남은 게 없다.
너무 불쌍해서 좋은 남자와 연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해솔씨가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자리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마침 그 친구도 이번에 빠진 남자가 진해솔이라서 좋은 기회다 싶었다.
‘희민이한테 해솔씨 좀 잘 살펴보라고 해야겠네. 그 남자도 환승이별 할 만큼 질이 나쁘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을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녀가 보기에 친구는 적극적으로 당겨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본 진해솔의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짐작해보면 적어도 우물쭈물하다가 다른 여자에게 홀랑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운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자신의 소개로 만나 좋은 인연이 된다는 건 그녀 입장에서 정말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었다.
양아름은 소중한 친구가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찐따 친구 구제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눈만 드럽게 높아가지고는.”
눈높이만 좀 낮췄어도 귀여운 남편 하나 딱 찍어서 결혼하고 알콩달콩 살았을 거다.
친구의 꿈이 바로 귀여운 남편 만나서 사랑 가득한 결혼 생활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혼가정에서 큰 친구였기에 유난히 가족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남자 보는 눈은 더럽게 없지.’
아마 그녀가 찐따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이혼을 3번 이상은 했을 거다.
하나같이 그녀가 찍은 남자는 나쁜 놈들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양아름이 진해솔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남자 보는 눈 없는 년이 찍은 남자라서 걱정 된단 말이지.”
겉은 멀쩡해보여도 속은 안 그럴 확률이 높았다.
남편 최희민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해서 긴가민가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녀 또한 진해솔을 만나서 받은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인가?’
드디어 얘도 결혼이라는 걸 하려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자를 찍은 걸지도 모른다.
양아름은 친구의 앞날을 걱정하며 와인이 저장 되어 있는 술 저장고로 향했다.
적절하게 곁들인 술이 저녁 식사 자리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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