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8. 한민영 (11)
* * *
“공식 팬클럽에서 보낸 게 아닌가 봐요. 확인하려고 매니저 누나가 전화번호 받아갔어요.”
“와~ 공식 비공식도 있구나. 하긴, 팬들이 많으니까. 그럼 먹어도 되는 거지?”
“네, 뭐….”
이미 스태프들이 밥차, 커피차, 간식차를 모두 이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은 무를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밥차가 왔는데 먹지 말라고 막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찰칵 찰칵
민영 누나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찍어 매니저 누나에게 보냈다.
쉬는 날 일을 해야 하는 매니저 누나에게 애도를 표하는 글도 함께 보냈다.
[나 : 죄송해요, 누나. ㅠㅠ]
[매누나 :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곰돌이)]
“아이고.”
일을 매니저 누나에게 맡겨두니 그래도 마음이 편해져 밥차를 즐길 수 있었다.
“퀄리티 미쳤다.”
“맛도 미쳤음. 먹어봐.”
스태프들이 호화로운 메뉴에 감탄하며 함박 웃음을 짓고 먹고 있었다.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가져 온 민영 누나가 연신 맛있다며 재차 리필을 해서 먹어댔다.
“자자, 그만 먹고 촬영해야죠. 언제까지 먹기만 할 겁니까?”
“우우~~”
“이미 1시간 30분이나 지났어요! 빨리 일해요!”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감독님이 시간을 좀 더 줬더라면 정말 밥차를 거덜 낼 수 있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스태프들 모두 배 터지게 먹고 나서 인지 다들 일하는데 의욕을 보였다.
이미 밥을 다 먹고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밥차를 정리하는 요리사에게 가서 물었다.
“여기 남은 음식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엄청 많이 남은 것 같은데.”
“근처 고아원에 기부 될 예정입니다.”
“아~ 그래요?”
누가 보냈는지 몰라서 찝찝한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남은 음식들이 고아원에 기부 된다고 하니 마음이 많이 풀린다.
“고아원에 기부하기엔 양이 좀 적지 않을까요? 스태프들이 꽤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부족한 부분은 제가 추가로 금액을 더 내도 될까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안쪽에 보시면 재료가 넉넉하게 더 있거든요. 여기 있는 음식 전부 다 떨어졌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고아원에 기부 될 음식이 따로 또 있었던 거군요? 근데 설마 이 차 그대로 고아원에 가는 건가요?”
“네, 해솔씨 이름으로 고아원에 기부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몰라도 엄청난 스케일이다.
내 이름이 떡하니 그려진 밥차가 줄줄이 고아원에 서게 될 것을 상상하니 민망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팬들 마음이 다 그런 거죠. 해솔씨가 잘 되는 게 좋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좀 편하네요. 아! 그리고 오늘 정말 감사히 잘 먹었어요. 음식 솜씨가 정말 좋으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팬이라서 그런데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렴요. 사진 찍으셔도 돼요.”
“우왓! 감사합니다.”
요리사 분이 다른 간식차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까지 불러서 내 싸인과 사진을 모두 받아갔다.
“촬영 다시 시작합시다!”
배도 든든하게 채워졌겠다, 본격적으로 다시 추격전 촬영을 시작할 때였다.
? ? ?
밥차를 보낸 사람에 대한 정보는 다음날 매니저 누나가 출근하면서 알게 되었다.
“개인 팬이 그걸 보낸 거라고요?”
“응. 어제 네가 보내 준 사진은 그쪽에 전달했어. 대신 SNS에 올리진 않겠다고 했고.”
“그걸로 괜찮대요?”
“어. 내가 따끔하게 경고했으니까 또 이런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막 보내면 엄청 민폐 된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순순히 사과를 하더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낸 거고 곤란하게 만들 생각 없었다면서 말이야.”
“고아원에 제 이름으로 기부까지 하겠다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네요.”
“만약 문제가 생겨도 통화 내용 다 녹음 되어 있으니까 대응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는 밥차에 대한 건 신경 안 써도 돼.”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래그래. 어휴~ 하여튼 하루라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개판이 돼서 큰일이다. 인재가 없으니 원. 이제 너희들 개인 활동도 시작해서 가뜩이나 매니저가 부족한데 말이야.”
로드 매니저의 난데없는 탈주에 매니저 누나는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그에게 맡겨졌던 스케줄을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데, 이미 고용했던 두 명의 로드 매니저들은 다른 멤버들을 케어하느라 스케줄이 빡빡했다.
결국 피보는 건 매니저 누나였다.
새로 로드 매니저를 구하는 게 당장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매니저 누나가 내 스케줄을 모두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인한 피해는 나에게도 미쳤다.
“둘이 뭔 사이야?”
“….”
매니저 누나가 나와 한민영의 사이를 눈치 채버린 버린 거다.
내가 실수를 한 건 아니다.
연애 초보인 민영 누나가 티를 내도 너무 내버렸다.
하지만 이해한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니까.
그녀는 한참 사랑에 불 타오르고 있었다.
“사귀는 거 맞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까요?"
"쓰읍!"
"하하, 티가 좀 났죠?”
“너는 괜찮았는데 한민영씨가 정신을 못 차리더라.”
“으음...”
진작 자제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20대 한창인 나이니까 못 막을 일이라는 건 아는데, 어쩌려고 그래? 저렇게 티내는 거 보면 좋은 꼴 못 본다?”
“조심할게요.”
“근데 정말 이게 맞아?”
매니저 누나의 의미심장한 말.
저런 못 생긴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다.
나중에 그녀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알면 절대 저런 소리 하지 못할 텐데 말이다.
“사랑에 이유가 있나요.”
“와우.”
매니저 누나가 감동의 박수를 쳤다.
“세상에 너 같은 남자가 좀 있어야 되는데. 그래야 우리 같은 여자도 남자 냄새 맡고 살지.”
“하하하.”
“아니면 민영씨한테 내가 모르는 특별한 매력이라도 있는 건가?”
“그 매력은 저만 알면 돼서요.”
“부럽다!! 젠장.”
매니저 누나는 언제쯤 너 같은 남자를 만나겠냐며 한탄하면서 이어서 말했다.
“이제부터 연애할 때 남들한테 안 들키는 법, 주의해야 하는 점 같은 걸 알려줄 거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고 잘 들어야 된다.”
“주의해야 하는 점이요? 그게 다에요?”
내 연애를 알게 됐을 때, 소속사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헤어지라고 으름장을 놓거나상황에 따라 내 연애 사실을 이용하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예상 중에는 지금처럼 매니저 누나가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줄 거라는 것은 없었다.
“왜? 내 반응이 예상이랑 달라서 당황스러워?”
“아시네요. 헤어지라고 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식으로 아티스트를 다루는 건 삼류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그렇게 헤어지라고 해도 걔네들이 순순히 헤어지겠니?”
순순히 말을 듣는 애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안 듣는 놈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글쎄요, 근데 순순히 듣진 않을 것 같아요.”
“맞아. 거의 대부분 그래. 더 꽁꽁 숨기고 몰래 행동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
“기사가 터지겠죠.”
“그렇지.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터지면 소속사도 답이 없어져. 패닉이라고. 더군다나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을 텐데, 괜히 헤어지라고 해서 소속사에 대한 반감을 높일 이유도 없지. 들키지 않게 도와주고 내버려두면 결국 사랑도 시들시들해지면서 헤어지게 되는 법이거든.”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지저분하게 헤어지지 않도록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주는 것까지 해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사진같은 거 진짜 조심해야 돼. 메시지도 주기적으로 삭제시켜줘야 하고. 비밀SNS하다가 계정 털려서 사진 퍼지는 게 제일 최악이야. 조심성 없이 그게 뭐니? 아무리 사진을 남기고 싶어도 좀 참으란 말이야. 그리고 정 사진을 남기고 싶으면 계정 털릴 일 별로 없는 민영씨 계정으로 해. 그리고 연애 초기 때는 커플인 거 티 내고 싶어서 난리라는 건 알지만, 커플티, 반지 같은 거 절대 맞추지마. 그거 맞추고 사진 찍히면 최악이야. 팬들이 그런 거 추적 잘 하는 거 알아?”
팬들은 상상도 못할 것들을 해내는 엄청난 능력자들이라며 그들의 집착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제 한참 얼굴 알리고 팬들도 왕창 끌어당길 준비가 다 됐는데, 여기서 뜬금없이 열애설이 터진다? 팬들 정 떨어져서 다 떨어진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하란 말이야.”
“네엡.”
“사귀는 여자 있는 거 다른 멤버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 너는 워낙 그런 거 잘하는 것 같아서 걱정은 안 하지만, 괜히 애들 허파에 바람 들일 수 있어.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멤버 애들은 내게 여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내가 매번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꾸준히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가끔 감쪽같이 사라져서 전화 통화를 하고 오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메시지랑 전화만 주구장창 하는 줄 아니까.’
가끔 외박을 하긴 하지만, 대부분 아이템을 이용해서 숙소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꾸준히 보였다.
때문에 나는 여자친구가 있어도 자주 밖을 나돌아다니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괜찮은지 걱정할 뿐.
“저도 그룹에 문제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아요. 최대한 조심할게요.”
“그래그래. 너는 그래도 연애에 눈이 뒤집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야.”
사랑에 눈이 뒤집힌 아이돌을 맡으면 얼마나 속이 뒤집히는지 모른다며 그녀는 풍문으로 들어왔던 아이돌 엽기 연애사를 들려주었다.
여자 친구가 아파서 스케줄을 펑크 낸 철 없는 아이돌도 있는가 하면, 여자 친구와 싸웠다고 방송에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기분 안 좋다는 티를 팍팍 내는 놈도 있다고 한다.
또 반대로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일부러 뽀뽀하는 사진을 주변 친구들에게 뿌린다거나 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놈도 있었단다.
놀랍게도 이 모든 상황들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엄청나네요.”
“사랑에 빠진 애들은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안 돼. 이런 말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사랑을 해도 상식선에서 했으면 좋겠어. 다들 너무 혈기왕성해서 그런지 극단적이야. 웃긴 게 뭔지 알아? 걔네들 그렇게 불 태우듯 사랑한 결과가 99.9% 헤어지는 걸로 끝나.”
0.1%가 있다는 게 놀랍다.
“0.1%는 둘이 사귀다가 애 배서 은퇴한 경우를 말하는 거고.”
“헐.”
매니저 누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직업을 ‘매니저’로 삼고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새삼스럽게 확 와닿는다.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 직업이니, 이 바닥은 정말 사명감이 없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누나, 항상 감사하고 있는 거 아시죠?”
“…뭔가 엎드려 절 받기 같지만 알아주니 고맙네. 아무튼 제발 하지 말라는 건 하지마. 연애하지 말라고 막는 거 아니잖아.”
“넵.”
감춰둔 연인이 많다는 걸 알면 매니저 누나는 혈압이 올라 쓰러질 거다.
그녀는 빙산의 일각을 보며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안도하고 있었다.
미리 누나에게 애도를 보내자.
미안해요, 누나!!
"회사에는 말 안 할 거야."
"정말요?"
"일단은 비밀로 하고, 네가 정말 진지하게 한민영씨랑 사귀는 거면 그때 얘기할 생각이거든."
"저희 진지한데요?"
민영 누나의 외형을 딱 내 취향에 맞게 바꾸기 위해 코인을 투자했다.
코인까지 투자한 여자를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매니저 누나는 내 말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절절하게 사랑해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 물거품이다. 누나가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오래가는 사랑을 못 봤어요. 지금은 평생 같이 살 것 같고, 백년해로 할 것 같지? 아니야, 그거. 나중 되면 다~ 변해."
단순히 돈으로 환산 될 수 없는 '코인'의 존재를 모르는 매니저 누나 입장에서 내 사랑이 다소 풋내나 보일 수 있었다.
내 입장에선 회사가 연애 사실을 아는 것보다 매니저 누나만 알고 있는 게 훨씬 이득이었기에 가소로운(?) 취급을 당하는 것에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납득을 하게 될 거다.
"알겠어요. 저야 회사에서 아는 것보단 누나만 알고 있는 게 훨씬 편해서 좋아요."
"대신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누나한테 알려줘야 한다? 예를 들어 임신을 했다거나, 기자한테 사진이 찍힌 것 같다거나, 팬으로부터 협박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 말이야."
"...예시가 왜 이렇게 살벌해요?"
"그런 바닥이니까."
거참.
그런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내 앞날이 깜깜하다.
코인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이래서 계약을 잘 했어야 하는 건데.'
만약 내가 술을 먹고 포니와 계약을 할 때 아이돌이 아니라 재벌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지금보단 여자들과 만나는 게 훨씬 쉬웠을 것 같다.
새삼 그날 술에 만취했던 순간이 아쉽고 또 아쉬운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