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35화 (135/849)

〈 135화 〉 #20. 접근 (2)

* * *

“이렇게 조금만 수정을 해도 훨씬 좋아질 것 같아서 대충 그려본 거에요.”

“대충이라기엔 너무 잘 그렸잖아. 미술 배운 거야?”

“어머어머어머!”

“아뇨. 배운 적 없어요.”

“이 디자인 그대로 수정해드릴게요. 해솔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가면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될 것 같은데요?”

작가님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대박을 발견한 것처럼 눈이 초롱초롱했다.

“앗! 이거 찍었어야 했는데.”

“이거 그림 다시 그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죠.”

결국 작가들은 호들갑을 떨며 기어코 내가 가면을 그리는 모습을 찍어냈다.

가면과 닉네임이 결정 되자 2라운드와 3라운드에 부르게 될 곡이 결정 되면 연락을 달라는 것을 끝으로 미팅이 끝났다.

1라운드는 대결 형식으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제작진 쪽에서 곡을 정해준다.

방송국을 나와 로비를 걸어가던 중.

웅성웅성­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이러는 게 한 두 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쪽에 거물 연예인 왔나보네.”

“후딱 가죠.”

괜히 마주쳤다간 피곤해진다.

거물 연예인이라면 무조건 내 쪽에서 인사를 해야 하는 후배 입장이다 보니 최대한 안 마주치는 게 좋았다.

그냥 적당히 인사만 받고 가는 선배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각또각­

시원시원한 구두굽 소리가 로비를 울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사람에게 쏠리는 게 느껴진다.

‘저 사람들이 연예인 왔다고 저렇게 관심 주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예외로 치고, 하도 심심치 않게 연예인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보니 저렇게까지 시선이 쏠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나는 방송국 로비를 지나면서 자연스레 시선을 그쪽으로 뒀다.

새하얀 원피스였다.

비단결이라는 말이 왜 있나 했더니 저 머릿결을 표현하기 위해 탄생한 단어겠구나 싶을 정도로 찰랑이는 머릿결을 가진 여자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도도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지 알 것 같았다.

연예인이라서 쳐다 본 게 아니라 너무 예뻐서 쳐다 본 거다.

인형이 돌아다니나 싶을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로비를 지나 주차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신인 배우인가?’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여성이라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방송국 밖으로 나왔기에 주머니에 걸쳐두었던 안경을 착용했다.

불필요한 시선을 모으지 않기 위함이었다.

매니저 누나의 차에 올라타 숙소로 향한 나는 내 뒤를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걸음도 멈추고 뚫어져라 쳐다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 여자와 다시 재회하게 된다는 것 또한 말이다.

? ? ?

“저희가 모르는 재능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푸쉬를 해줘도 충분히 제 값을 할 아이에요.”

“우리 애들 재능 있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새삼스러운 말이네요.”

“회사에서 애들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썩히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룹으로 보면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애들이에요. 괜히 한 명을 집중 푸쉬했다가 애들 사이 파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에어플레인 담당 매니저 실장 유슬하는 갑자기 튀어버린 로드 매니저 때문에 진해솔을 담당해서 스케줄을 따라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어 회의를 소집했다.

우리들의 안일한 대응으로 저렇게 재능 있는 애들을 썩혀두는 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회사 사람들에게 썩 먹히지 않았다.

“다른 애들도 재능이 있다면 얼마든지 푸쉬해줘야죠. 근데 다른 애들 중에 우리가 푸쉬해줄 만큼 새로운 재능을 갖고 있는 애가 있었나요? 능력이 부족해서 푸쉬를 못 받는건데, 그게 문제가 될 일인가요? 여기가 고등학교도 아니고, 애들끼리 친하게 지내야 하니까 네 재능은 좀 숨기고 썩히자 하면 잘도 그러겠습니다 하겠네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에 한 명만 푸쉬를 받으면 관계가 나빠질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그 말 아닌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뜻이 아닙니다. 강준이랑 해솔이 연기 활동 잘 하고 있고, 다른 애들도 각자 개인 스케줄 잘 하고 있는 중이에요. 여기서 뭘 더 푸쉬하라는 건데요? 아니,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는 거죠? 저희는 에어플레인을 최선을 다해 돕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그게 부족하다는 걸 확인한 상태입니다.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그게 최선이라고 우기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하죠?”

“…….”

회의장에 침묵이 돌았다.

자칫 감정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각자 사정이 있기는 했다.

최선을 다해 서포터 해주고 있고, 그 결과도 좋아서 뿌듯해 하고 있던 에어플레인 전담 팀에게 담당 매니저의 말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진해솔의 재능을 본 매니저 실장 입장에서는 이대로 내버려두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얘한테 집중해서 푸쉬를 해주면 금방 대박이 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든 탓이었다.

때문에 에어플레인 전담 팀과 유슬하의 사이에는 쉽게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생기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서로 우기는 주장만 할 순 없습니다. 풀건 풀어야죠.”

한참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 중 한 명이 의견을 말했다.

그건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었다.

천천히 상황을 풀어가야 한다.

“슬하씨가 말하는 해솔이 재능. 도대체 그게 뭔가요? 해솔이한테 뭘 더 시키고 싶으신 거에요? 솔직히 이번에 해솔이 연기 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푸쉬를 해준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저희는.”

“처음에 연기 시킬 때만 해도 해솔이한테 연기에 대해 크게 기대하는 사람 있었습니까?”

“없었죠.”

“근데 해솔이가 해낸 것 좀 보세요. 이제 어느 연기자 부럽지 않게 연기 잘 합니다. 그런 애에요. 재능이 넘친다고요. 지금도 방치 되고 있는 재능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재능을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좋냐구요.”

“…….”

“그룹이 고루고루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해솔이는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애잖아요. 얘는 밀어주면 됩니다. 무조건 되는 애에요.”

“해솔이가 제일 포텐션 많다는 건 여기에 모르는 사람 없어요. 실장님은 그래서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푸쉬하는 방법은 다 같이 생각해야죠. 그래도 제가 몇 가지 생각해온 건 있습니다.”

회사에서 힘을 써서 프로그램에 집어 넣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잘 성장하고 있는 그룹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이름을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하지 않은 일이었다.

애들을 함부로 굴려봤자 대중들에게 이미지 소모만 빠르게 진행 될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매니저 실장은 해솔이를 한해서는 그런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솔이를 방송에 막 굴리자는 뜻이세요?”

“제가 하고 있는 말의 근본은 맞습니다.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밀도록 하자는 건. 근데 방송의 종류가 한정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송도 다양하잖아요. 요리도 있고, 노래 프로그램도 있고, 여행 프로그램도 있고요.”

“이미지 소모는 어쩌시려고요.”

“해솔이는 까도 깔게 있는 양파 같은 아이에요. 여러분들 중에 해솔이가 미술 잘 하는 거 알고 계신 분 있어요?”

“…미술이요?”

“이거 제가 사진 찍어놨는데, 보십시오.”

해솔이가 방송국에 가서 끄적였던 가면을 본 직원들이 깜짝 놀란다.

“이걸 해솔이가 그렸어요?”

“네. 순식간에 휙휙 움직이더니 이걸 그리더라고요. 이렇게 아직 발굴 되지 않은 재능이 많은 앱니다. 명색이 전담팀인데, 이런 애를 썩혀 두실 겁니까? 너무 아깝잖아요.”

“…….”

“…….”

전담팀 직원들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왜 그녀가 난데없이 찾아와 해솔이를 더 적극적으로 푸쉬하자는 소릴 하는지는 이해가 되는 듯하다.

“다음 활동부터는 해외로 나가기 시작할 텐데, 굳이 국내 활동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해외 활동 집중한다고 국내 활동 소홀히 하는 회사였습니까?”

“근데 우리끼리 이러고 있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에요. 본인이 원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평양 감사도 본인이 싫으면 아닌 겁니다.”

“그럼 해솔이 의견을 들어보죠. 걔라고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멤버들 때문에 참고 있을 게 분명하다며 매니저 실장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재능이 많은 아이인 줄 알았으면 아이돌을 시키지 않았을 거다.

해솔이는 그룹일 때 손해를 보는 아이다.

만약 솔로로 데뷔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팬들을 모으고 다녔을 터다.

“해솔이가 숨기고 있다는 재능이 뭔지도 궁금하네요.”

한편, 이런 상황을 모르는 나는 갑자기 올라오라는 말을 듣고 툴툴대고 있었다.

숙소에서 소속사까지 거리상 가깝기는 하지만 갑작스러운 부름이 좋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부른 거지? 촬영 스케줄에 문제 생겼나.”

더군다나 왜 불렀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초반 웹 드라마가 엉뚱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조회수 대박을 치긴 했으나 그것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흥미로 찾아 온 뜨네기들은 모두 사라지고, 우연히 웹 드라마를 보고 재밌다고 생각해서 꾸준히 찾아주는 사람과 웹 드라마를 보는 걸 좋아하는 진짜 시청자들, 그리고 에어플레인 강준과 진해솔의 출연 때문에 찾아온 팬들만이 남아 조회수를 올려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초반에 너무 대박이 나서 꾸준히 줄어드는 조회수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웹 드라마를 재밌게 봐주고 있는 진짜 팬들이 있어서 기운이 났다.

촬영하는 것도 즐거웠고.

‘애초에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웹 드라마였잖아. 이 정도면 성공한 거지.’

웹 드라마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나에게 큰 영향이 없다.

나와 강준이의 연기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걸 대중들에게 증명해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앞으로 연기를 또 하게 된다면 이번 웹 드라마 출연이 큰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시청률을 위해 아이돌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진해솔과 강준은 연기력이 증명 된 아이돌로 각인 될 테니 말이다.

“저 왔어요.”

회의실 문을 대수롭지 않게 열었는데 안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해솔이!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하으~ 오늘도 얼굴이 열일하는구낭~”

“난 해솔이가 화장 안 할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

“청순한 맛(?)이 있죠.”

“이리 와서 앉아봐.”

“해솔이 온다고 해서 누나가 청포도 에이드 사놨어.”

“엇, 감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청포도 에이드!

이걸 받으니 이곳까지 와야 했던 귀찮음이 사르르 녹는다.

쭈우웁­!

시원한 에이드 한 잔 마신 후.

부담스럽게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물었다.

“근데 전 왜 부르셨어요?”

“응응, 우리가 오늘 회의를 좀 했거든.”

“네.”

“회의 주제가 뭔지 알아?”

“저야 모르죠.”

“너였어.”

“저요?”

“유슬하 실장님이 너한테 숨겨진 재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고.”

“재능이요?”

그야 그렇기는 하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그래서 그게 왜요?”

“…뭔가 반응이 묘하네. 진짜 우리가 모르는 재능이라도 있는 거야?”

“없진 않죠.”

“!!”

별스러운 걸 묻는다는 듯 시큰둥한 내 대답에 직원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평소와 다른 과한 리액션들이다.

내 시선이 매니저 누나로 향했다.

그녀는 직원들에게 거보라며 득의양양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그녀가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날 두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뭔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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