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20. 접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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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진행 되는 줄 알았던 식사 자리는 호텔로 바뀌었다.
그 레스토랑이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레스토랑이었던 거다.
누가 봐도 고오급에 한껏 비싸 보이는 외형의 호텔 레스토랑.
우리들은 새하얀 식탁보가 깔려진 동그란 테이블에 쪼르륵 앉았다.
여기에 군대 가본 녀석은 하나도 없을 텐데, 어쩐지 애들 몸가짐에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다.
왜 저러나 싶지만, 사실 상황을 따져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소속사 대표에 투자자까지 있으니까.’
애들 멘탈이 바사삭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유일하게 고개를 들어 투자자와 대표를 살피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봤던 그 여자인 것 같은데.’
방송국 로비에서 봤던 하얀 원피스의 미인.
스쳐 지나간 것뿐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멤버들도 미인 투자자의 등장에 눈이 슬쩍슬쩍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성욕이 아무리 하향 패치 됐다지만, 그들도 호로몬이 나오는 멀쩡한 사람이다.
예쁜 미인에 흔들리는 건 똑같은 것이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제가 좋은 결정을 내렸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네요.”
“우리 애들 참 매력적이죠?”
“네.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가 될 게 분명해 보이네요.”
대표님은 팔불출 모드가 되어 연신 우리를 칭찬해주셨다.
제대로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는 대표님이어서 어떤 분일지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우리를 좋게 봐주시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우리를 보고 투자하겠다는 투자자가 나타났으니 예뻐 보일 수밖에 없긴 하겠다.’
그나저나 도대체 뭐하는 여자이기에 방송국을 드나들고, 투자자라며 우리 회사에 오기까지 하는 걸까?
그래도 리더라고, 제키가 가장 먼저 정신이 깨어났다.
나는 나머지 애들에게 눈짓으로 정신을 깨우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에어플레인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제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멜리사 케이에요.”
“기, 기우연입니다!”
“강경태입니다.”
“보컬을 맡고 있는 강준입니다.”
우리 애들이 엉성하고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소개를 이어갔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소개를 끝내니 투자자 멜리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과 식사를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대표님께 무리한 요청을 드리긴 했는데, 여러분들이 기분 나빠할까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역시 대표님께 부탁을 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제가 투자를 정말 잘 했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저희 그룹을 보고 투자를 결심하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키가 놀랍도록 의젓하게 투자자에게 말을 했다.
“언젠가 TV를 봤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들이 나오는 거에요. 깜짝 놀라서 어떤 친구인지 정보를 모았어요. 갓 데뷔한 친구들이라는 말에 잘 됐다 싶었죠. 저는 사람을 후원하는 걸 좋아해요. 제 후원으로 재능을 꽃 피우면 그것만큼 뿌듯한 게 없죠.”
“아…!”
“누가 채가기 전에 빨리 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활약이 대단하지만, 아직 대중들이 여러분들의 진짜 매력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리고 이번에 연기를 시작했죠? 강준씨랑 해솔씨가 나온 웹 드라마 정말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흡! 가, 감사합니다.”
투자자의 칭찬이 이어지니 멤버들의 표정이 몽글몽글 풀린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가 투자자라는 것 때문에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여러분 팬이거든요. 그러니까 평소에 팬 대하듯 대해줘요.”
“패, 팬이요?”
“알겠습니다.”
“엄청 미인이세요!”
“맞아요. 처음 뵀을 때, 엄청난 미인이셔서 깜짝 놀랐어요.”
팬처럼 대해달라는 말에 급격히 투자자가 어려워진 멤버들.
기우연이 센스있게 장난처럼 멜리사 케이의 미모를 칭찬했다.
여자에게 미모 칭찬은 언제나 옳은 법.
그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고마워요. 정말 오랜만에 외모 덕을 보는 것 같네요. 항상 이 외모 때문에 손해만 봤는데 말이죠.”
털털하게 말하고 있지만, 멜리사의 미모는 그런 식으로 폄하 받을 수준이 아니었다.
‘주아 누나랑 외모 비교를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는 처음인 것 같은데.’
하얀 원피스가 잘 어울리던 그녀는 오늘도 흰색의 여성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반짝이는 귀걸이와 목걸이들이 그녀의 심상치 않은 재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값비싼 보석들과 그녀의 외모가 서로 상호보완 되어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귀티가 좔좔 흐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준이도 만만치 않게 귀공자인데, 저 여자 앞에선 반딧불에 수준이야.’
진짜와 가짜의 차이라면 바로 이런 걸까?
식사를 하는 멜리사 케이의 행동 자체에 고귀한 기품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물 한 잔을 마시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음식은 좀 어때요?”
“엄청 맛있어요.”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기쁘네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더 시켜요. 여기 비싼 값을 하거든요. 제가 여러 호텔 다녀봤는데 이곳만큼 음식을 만족스럽게 하는 곳이 없더라고요.”
확실히 비싼 곳에서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지 음식의 퀼리티가 대단했다.
일단 먹자마자 재료의 질이 굉장히 좋다는 게 느껴졌다.
“값이 나가도 한 번쯤은 와서 먹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 맛인 것 같아요.”
맛 좋은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풀어졌다.
몸무게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멤버들은 활동기간이 아니어도 몸무게를 염두하고 음식 조절을 하는 편이었다.
못 먹는 음식이 많다 보니 이런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무장해제 되곤 한다.
대표님과 나는 낯설 수 있는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하고 투자자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 멤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내가 왜 아빠 마음이 되어 있는 거냐. 정신 차려야 되는데.’
흐뭇한 마음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다 컸네, 다 컸어. 맹탕이들인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냐?’
열심히 사회생활 하는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해진다.
더욱이 투자자의 행동이 깔끔해서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아 안도가 되기도 했다.
‘애초에 우리 회사가 스폰을 주선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어.’
허니 엔터는 스폰 문제에 깔끔한 회사이다.
그래서 진짜 아이돌이 꿈인 소년들이 허니 엔터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것이었다.
허니 엔터 소속이라고 하면 적어도 스폰과 같은 소문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저렇게 예쁜 여자가 스폰해주겠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저런 여자가 뭐가 아쉽다고 스폰하려고 거액의 돈을 쓰겠는가?
‘아무리 남자가 귀한 세상이라도 저 정도 미모면 남자가 줄을 설 텐데 말이야.’
지금도 봐라.
여태까지 ‘여자’에게 시큰둥하거나 대면대면하게 굴곤 했던 멤버 애들이 적극적으로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음식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대화의 내용이 ‘다이어트’로 튈 수밖에 없었다.
멜리사 케이씨는 우리들의 다이어트 썰을 듣고 굉장히 놀라워했다.
“이렇게 말랐는데도 몸무게 관리를 받는다고요?”
“카메라에 담기면 이 정도 수준은 아슬아슬해요. 활동 시작하기 전에 바짝 빼둬야 해요. 그래야 뚱뚱하게 안 나와요.”
“한참 자라날 나이인데 너무 팍팍하게 다이어트하면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요.”
“호호호, 우리 애들 팬이라고 하시더니 정말 맞았나보네요. 이렇게 애들 걱정을 해주시는 걸 보니 말이에요.”
“아무렴요. 설마 제가 거짓말 한 줄 아셨어요? 저 정말 에어플레인 팬이에요.”
“헉!”
“오늘 여러분들 헤어지기 전에 싸인 해주시는 거 잊지 말아줘요. 사진도 찍어주시고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고마워요.”
딱 봐도 대단한 사람일 게 분명한 여자가 자신들의 팬이라는 말에 멤버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투자를 받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멤버들이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게 매우 좋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더군다나 식사 자리에서 대표님과 투자자 분이 미래가 더 기대되는 친구들이라며 금칠을 해주었기에 한껏 가슴이 부푼 상태였다.
나는 말을 많이 하기 보단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주는 쪽으로 시간을 보냈다.
투자자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어보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덧 함께 식사를 한 지 2시간이 훌쩍 지났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
멜리사 케이는 진짜 사진과 싸인을 받아갔다.
그리고 2시간동안 부쩍 멜리사 케이와 가까워진 제키는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전번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기우연이야 워낙 친화력이 좋은 아이라서 예외로 쳐야 했고, 식사시간에 제일 대화를 많이 나눈 게 제키와 멜리사였다.
제키가 리더라서 억지로 나설 뿐이지, 기본적으로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닌데 멜리사와 대화하는 걸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대표님은 화장실도 안 가시네.’
제키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자왕하고 있는 걸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대표님이 옆에 계셨을 땐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저희야 말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제키는 끝끝내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못했고, 멜리사 케이와 헤어질 시간이 왔다.
그녀는 멤버들 한 명, 한 명과 직접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나눴다.
나 또한 그녀의 손을 잡고 별 생각 없이 인사를 나눈 때였다.
바스락
“!!”
“만나서 반가웠어요, 해솔씨.”
“…네.”
야…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손아귀에 잡히는 익숙한 종이 감촉에 난감해졌다.
저기, 주인을 잘못 찾으신 거 아닙니까?
의문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는데 안타깝게도 종이의 주인은 내가 맞았던 모양이다.
‘이게 왜 나한테 오냐고. 골 아프네. 투자자니까 앞에서 무안 주는 건 좀 그런데.’
맞닿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방송을 오가며 너무 많은 쪽지를 받아 봤기에 숨기는 것 자체는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종이 쪽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다.
보통 나는 쪽지를 받으면 곧장 매니저 누나에게 줬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투자자이지 않은가?
거액이라고 했으니 한두 푼 투자한 게 아닐 텐데, 함부로 버리기가 뭐했다.
‘연락을 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뭐한데.’
차라리 제키한테 주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골치 아파 하지도 않았을 텐데.
투자자라는 존재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이 당황스러움을 섣불리 바깥으로 표출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골치 아픈 종이 쪽지를 꾸깃꾸깃 구겨버렸다.
‘제키한테 마음 있었던 게 아니었나보네.’
그럼 왜 식사 자리에서 제키와 하하호호 대화를 나눴단 말인가?
정말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제키가 쪽지 알면…어휴.’
상상만으로도 이건 아니다 싶다.
가뜩이나 자존심 센 성격인데!
지금도 제키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제키의 마음도 모르고 대표님은 옆에서 헐헐 웃고 있을 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숨기자. 연락처는 저장해두는 걸로 끝내는 거야.’
쪽지의 존재를 제키에게 알리는 것도 감정싸움을 만드는 일일 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쪽지 존재 자체를 숨기고,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이다.
쪽지를 받았음에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 대충 내 마음을 짐작할 것이다.
식사 자리 내내 투자자가 깔끔한 행동을 보여주었기에 거절을 표해도 큰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여러 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달려 있는 인간은 자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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