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20. 접근 (10)
* * *
멜리사와 비앙카.
두 사람 모두 매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불려갔다가는 X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를 덮쳤다.
강제 초대를 받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상점을 열심히 뒤졌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문제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아이템을 이용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주 상점을 둘러보고 다녔기에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을 찾는 게 어렵지도 않았고 말이다.
“모두 나가있어.”
“예? 하지만 .”
“나 지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거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꺼지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으나 목소리가 살벌했다.
그제야 찔끔한 여성 경호원들이 우르르 바깥으로 나간다.
나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아까부터 저들이 신경 쓰여서 아이템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자리를 비워준다고 하니 잘만 하면 아이템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부터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내보냈어요.”
“당연히 불편하죠. 저런 사람들이 근처에 서 있으면 겁이 날 수밖에요.”
“병풍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에요. 어디 가서 우리 얘기를 옮긴다거나 하지 않고, 내가 해솔씨한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죠.”
“당신 같은 사람이야 저 사람들을 병풍처럼 볼 수 있는 거죠.”
뒤늦게 내 편의를 봐주는 척 하며 내보낸다고 해서 내가 저 여자한테 호감을 보이는 일은 없을 거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이미 눈치 챘다.
자기 경호원들을 내 근처에 세워둔 건 나의 심리에 압박감을 주기 위함이고, 지금처럼 내 편의를 봐주겠다며 내보낸 것은 내 호의를 사기 위함이다.
‘계산적인 여자네. 나한테 압박이 안 통하는 것 같으니까 짜증을 내면서 나가라고 한 걸 거야.’
먹혔으면 저 경호원들을 치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내게는 분홍색 곰돌이 인형이 있었다.
자켓 주머니에 있는 분홍색 곰돌이의 성능을 떠올리면 쫄 이유가 없었다.
외형은 귀엽기 그지없지만, 성능은 흉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내가 갖지 못하면 아무도 못 가져]
오랫동안 짝사랑해오셨다고요? 열 번 찍어 봐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면 이 제품을 사용해보세요!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원망스러운 연인을 나만을 사랑하는 인형으로 만들어 줍니다. 비록 그 마음이 진실 된 마음이 아닐지라도 말이죠!
(강력한 세뇌가 걸려 있는 제품입니다. 사용시에 매우 주의가 필요합니다. 법적인 제재를 받았을 시에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강제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걸로 사람을 강제하는 게 여태까지 이런 아이템을 써본 적도 없다.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고 잘 되겠거니 하면서 있을 생각 없다.
‘저쪽에서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친다.’
이번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까다로웠지만, 그 정도 까다로움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성능을 갖고 있었다.
[사용 효과]
대상에게 세뇌 저주를 가합니다.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스스로보다 사용자를 더 깊게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용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곰돌이 인형이 모두 흡수합니다. 어떠한 명령에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대상자의 정신력에 따라 효과가 반감 될 수 있으니 인형을 꾸준히 대상자의 곁에 두시기 바랍니다.
*인형이 훼손 되면 저주가 해주 될 수 있습니다.
*인형을 소중하게 보관하십시오.
*해주 되었을 시 곰돌이 인형이 흡수한 감정이 2배가 되어 대상자에게 되돌아갑니다.
[사용 조건]
1. 상대에게 ‘저주 받은 인형’을 선물하십시오.
2. ‘저주 받은 인형’의 눈동자와 대상의 시선을 마주하게 하십시오.
3. 저주가 발동 되면 저주 대상자와 인형을 60분간 가까이에 두십시오.
즉, 나는 인형을 선물함과 동시에 60분 동안 그녀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처음 만나는, 억지로 끌려 온 내가 갑자기 인형을 선물한다?
60분 동안 나눌 대화거리도 없거니와 그 인형을 좋다고 받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 인형을 소중하게 간직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래도 이걸 사용하는데 성공하면 저 여자를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단 말이지.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야.’
재벌 가문에서 접근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앞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은 일들이 자주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여자를 방패로 쓸 계획을 세웠다.
내게 좋지 않은 짓을 한 사람이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딱 좋았다.
“내 말에 기분 상했나요?”
강제로 끌려왔으니 내 태도가 뾰족한 것이 당연한 일인데, 비앙카는 내 뾰족한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기분 상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병풍이 된 것도 아닌데요. 다만 제 개인적인 스케줄을 위해 빨리 본론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강제로 데려오신 거잖아요? 말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그렇군요. 보통 이런 방식으로 초대를 해도 가문 이름을 들으면 있던 불만이 쏙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라서 실수했네요. 당신을 부른 건 멜리사 때문이에요.”
“드라마 같은 얘기가 펼쳐질 건가요? 돈 봉투 주고 내 동생이랑 만나지 말라는?”
“전혀 다른 얘기에요. 사실 지금 좀 창피해요. 아무리 친언니라지만, 동생 연애에 참견하는 게 웃기잖아요?”
창피한 거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계속 참지 그러셨습니까?
속마음을 꿀꺽 삼키고 있으니 비앙카씨가 이어서 말한다.
“멜리사가 해솔씨한테 관심이 많아요. 문제는 제 동생 버릇이 좋지 않다는 거죠. 자기가 찍은 남자는 반드시 자기 걸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에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맞아요. 특히 돈을 어마어마하게 써서 그 남자를 붙잡죠. 보통 그렇게 해서라도 남자를 붙잡았으면 결말이 좋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걔는 그러지도 않아요. 자신에게 흥미 없던 남자를 쟁취하는 순간 걔 사랑은 끝인 거에요.”
“쟁취하는 순간 사랑이 식는다라….”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지?
“그 아이의 사랑이 남들과 많이 달라요. 짝사랑이 시작 되는 순간이 연애의 시작인 거죠. 그리고 남자를 꼬시는 과정이 걔한테는 연애 과정이에요. 남자가 꼬셔져서 넘어왔다? 그 순간 멜리사의 연애는 끝나는 거에요. 남자를 방치하죠.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다가 사귀자마자 관심을 딱 끊으면 남자 입장에선 어떨 것 같나요?”
“…….”
말해 뭐하겠나?
기분이 엄청 더러울 거다.
기분이 더러운 걸로 끝나면 다행이게? 그 남자 입장에선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잘못이 없는데도 자책을 할 수도 있었다.
“연애관이 많이 독특하시네요.”
“시간이 좀 지나면 못된 버릇이 고쳐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훈계를 해봤지만 듣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여전히 걔는 버릇을 고치질 못했어요. 이제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그 버릇을 못 고치면 결혼 생활이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기껏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사람의 감정을 갖고 논다는 점에서 악질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나는 해솔씨가 그 아이 버릇을 고쳐줬으면 좋겠어요. 돈을 원하면 돈을 줄 거고, 인맥을 원하면 인맥 쪽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어요. 멜리사가 지금 상황을 다 안다고 해도 당신한테 보복하지 않게 막아줄 거고요.”
내 약점을 왜 찾아다녔나 했더니 이런 걸 부탁하려고 그랬구나 싶다.
아마 내 약점을 찾았다면 서로 웃는 얼굴로 대화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제가 그걸 해야 하는 이유는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때에요. 해솔씨 미래를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이유? 당연히 있죠! 보상을 생각해봐요. 내가 당신한테 뭘 해줄 수 있는지 상상해보라고요.”
“뭐든 다 해주시겠다는 건가요?”
“오늘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게 해줄게요.”
당당한 태도를 보니 어중이떠중이 같은 재벌 가문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뜸을 들였다.
상황파악을 했을 때부터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으면서 말이다.
“쉽게 결정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시간은 충분히 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시는 건 맞습니까? 버릇을 고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해솔씨가 적극적으로 절 도와준다면 충분히 해낼 거에요. 실패한다고 해도 보상은 그대로 줄 거고, 당신한테 오는 불이익도 없을 거에요.”
하이 리스크 없는 하이 리턴이라.
받지 않으면 바보인 상황이다.
물론 저 여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면 말이다.
‘거짓말을 하는 거라도 상관없지.’
저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 목적만 이루면 된다.
“…좋습니다. 협조하죠.”
“잘 생각했어요!!”
협조하는 게 어렵겠나.
여동생의 못된 버릇?
아이템을 쓰면 고치는 거 어렵지 않다.
극단적으로 해결 방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멜리사와 섹스를 해서 내 정액에 중독 시키면 끝나는 일이다.
다른 남자는 아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자기 동생한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 저 여자도 만만치 않게 또라이야.’
비앙카에게도 꼭 고쳐야 할 게 있었다.
멜리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놀이처럼 대하며 가지고 노는 것이 못된 버릇이라면, 비앙카는 사람의 약점을 캐서 함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주 못된 버릇이었다.
나에게 했던 일들이 한두 번 했던 일이 아닌 게 티가 났다.
그녀들을 위해, 그리고 인류애를 한껏 끌어올려 모두 싹 고쳐줄 생각이다.
‘제키한테 그런 못된 여자는 아깝지.’
비앙카와 멜리사의 버릇을 고치고 난 뒤, 제키를 위해 제대로 새끼를 쳐야겠다.
재벌가문에서도 제대로 된 정신 박혀 있는 여자가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협조하면 됩니까?”
“멜리사가 앞으로 당신을 다방면으로 도와줄 거에요. 마음 편하게 모두 받으세요. 걔는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하는 걸 즐기거든요. 나한테 왜 이러지? 부담스러운데? 막 이런 거요. 어렵고 부담스럽고 자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대충 알죠?”
“네.”
“적당히 연기하면서 걔가 해솔씨한테 더 빠지게 여우처럼 행동해줘요. 계속 간을 보고, 넘어갈 듯 안 넘어가는 거죠. 여태까지 제일 오래 버틴 게 5개월인데, 적어도 한 1년 정도는 버텨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멜리사의 애간장을 녹이게 하고나서 넘어가는 척 하다가 다른 여자와 사귀란다.
“그럼 걘 당황할 거에요. 다 넘어온 줄 알았는데, 다른 여자랑 사귄다고? 왜?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혼란스럽겠죠.”
비앙카가 본 멜리사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도 분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자존심 상해야 하는데, 그녀 입장에선 이미 마음이 뜬 남자여서 나중에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던 거다.
“아직 마음이 안 접힌 남자를 다른 여자한테 빼앗기면 아마 정신이 번쩍 들 거에요. 그 정도 충격이면 못된 버릇도 없어지지 않겠어요?”
남자 뺏기는 충격을 줘서 동생의 버릇을 고친다?
변수가 많아 보이는 허술한 계획으로 보였다.
“상황이 예측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변수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예측하는 대로 상황을 만드는 건 내가 할 일이에요. 해솔씨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죠. 당신은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해주면 돼요. 불이익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들 거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