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20. 접근 (11)
* * *
동생 버릇 고치는 걸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녀의 말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저렇게 자신하는데, 신경 써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딱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겠네.’
괜히 오지랖 떨지 말자.
굳이 이번 일에 깊게 발을 담글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해줄 것이 무엇인지 얘기가 끝났으니, 이제 내가 받을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눌 차례였다.
“이제 제가 받을 걸 말할 차례군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 저한테 뭘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호호호! 뭘 하지 못하는지 묻는 게 더 빠를 거에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뭐든 다 할 수 있다, 못하는 걸 묻는 게 더 빠르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그녀의 당당함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몸이 바뀌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을 경험하고서야 조금 당당해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뭘 보상으로 할까?
‘오래 끌 것도 없지. 엉뚱해도 보상으로 해달라는데 지가 어쩔 거야?’
아이템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일반인들에겐 백날 설명하고 납득시키려 해봤자 나만 손해였다.
“그럼 이걸 선물로 드릴 테니 항상 곁에 두고 보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주머니에서 구매한 인형을 꺼냈다.
손바닥보다 살짝 작은 핑크 곰돌이.
제법 귀엽게 생겨서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법한 외형이었다.
“인형이네요? 지금 나한테 인형을 주겠다는 거에요?”
“그냥 인형은 아닙니다. 이 인형 눈알이 비싼 보석으로 되어 있죠. 한 번 보실래요?”
“…혹시 저한테 장난치시는 거에요?”
“진심으로 선물하는 겁니다.”
“…요즘 아이돌은 인형도 파나보네요.”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요구였으나 비앙카는 순순히 인형을 받아들였다.
어디 한 번 재롱 부려보라는 얼굴이다.
보석으로 만들었다는 곰돌이 인형의 눈을 빤히 응시한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보석이라고요? 무슨 보석인데요?”
1단계, 선물하기. (완료)
2단계, 곰돌이의 눈과 마주하게 하라. (완료)
3단계, 60분간 가까이에 두기. (진행 중)
2단계까지 순조롭게 해결 되었으니 3단계만 남았다.
“다이아몬드에요.”
“검은색이잖아요. 검은색 다이아몬드가 어딨어요?”
“자세히 보세요. 안쪽을 살펴보시면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을 겁니다. 동공 부분이요.”
곰돌이를 구매하려는데, 커스텀 기능이 있더라고.
그래서 동공을 다이아몬드로 바꿔 봤다.
2단계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한 꼼수였다.
인형 눈이 보석이라는데 관심 없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멜리사 얘기도 잠시 미루고 비앙카는 곰돌이 인형에 흥미를 보였다.
째깍 째깍
“어머! 진짜 안에 반짝거리네요? 진짜 다이아몬드를 여기다가 넣은 거에요?”
“네.”
“이걸 왜 날 주죠?”
“사실 다른 사람한테 줄 생각이었는데, 오늘 비앙카씨를 만나고 잘 좀 봐달라고 뇌물 바친 겁니다.”
“…뇌물이요?”
보상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뭘 더 주니 비앙카 입장에선 황당할 만 하다.
“무슨 꿍꿍이에요? 솔직히 말해요. 이해가 안 돼서 기분 나빠지려고 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 싫어했잖아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 몫 단단히 잡고 싶은데 뭘 달라고 할까? 건물 달라고 하면 주려나?”
“건물이 최고이긴 하죠.”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는 말이 괜히 있겠나?
“근데 건물로 끝내기엔 아쉬워서요. 인맥 쪽으로 도움이 되어주겠다고 하셨으니 비앙카씨가 제 인맥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보상을 받기보단 뇌물을 드린 거고요. 별 거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껄끄러운 일을 잊을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내가 선수는 잘 선택한 것 같긴 하네요.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 아무튼 당신이 나서면 동생 버릇 고치는 문제는 시간문제겠어요. 차라리 건물을 받겠다고 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말이에요.”
“제가 셈이 좀 밝습니다. 뭐가 더 제게 이득이 될지 계산을 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데 이런 기회를 허투루 쓸 순 없지 않습니까?”
째깍째깍
착실하게 시간이 흐른다.
비앙카의 손에는 여전히 핑크색 곰돌이가 들려 있었다.
다이아몬드 눈을 가진 곰돌이는 그녀의 심미안에 합격점을 주기 충분했던 모양이다.
외형도 제법 귀엽게 뽑혔고, 감촉도 나쁘지 않았으며,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도 손에서 놓지 않은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제가 제시한 보상. 들어주실 건가요?”
비앙카가 고민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한결 편안 얼굴로 말했다.
“해줘야지 어떡하겠어요? 다 해주겠다고 이미 약속해버렸는데.”
“좋네요! 식사하셨습니까? 다짜고짜 끌려와서 점심도 못 먹었는데.”
“미남이 식사하자고 하는데 숙녀가 되어서 거절할 순 없죠. 뭐 좋아해요?”
인맥이 되어 달라고 했으니 식사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다행이도 비앙카씨는 식사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좋아하는 음식인 뭔지 알아둘까요? 제 인맥이 되어주신다고 했으니 친하게 지내려면 좋아하는 것쯤은 알아야죠.”
사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었다.
시간을 끄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째깍째깍
시간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침없이.
멈춤없이.
? ? ?
안녕하세요, 블루베리 작곡가님. 보내주신 곡 잘 들었습니다. 곡 계약을 진행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되실 때 연락……
“엄마야! 진짜 됐어! 꺄아악!!”
해솔이가 뜬금없이 영감이 왔다며 뚝딱 만들어냈던 곡이 팔려버렸다.
아현이는 이 기쁜 소식을 해솔이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얼마를 받아야 하지? 계약을 잘못했다간 큰일 나는데!”
정말 해냈다는 기쁨도 있지만, 계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겁도 났다.
곡을 너무 싸게 팔아버리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반드시 제 값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녀가 법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마땅히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던 아현은 결국 자신에게 미디를 가르쳐주시는 선배 작곡가님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는 곡이 팔렸다는 사실도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좁은 작곡실에서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어? 네 곡이 팔렸다고?”
“아현아! 너 곡 팔았다며?”
“축하해, 아현!”
“…선배니이이임! 비밀로 해달라구 했자나요!!”
“좋은 소식을 왜 비밀로 해? 마음껏 자랑해! 그래야 얘네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노력한단 말이야.”
“언제 그렇게 실력이 좋아진 거야?”
“팔린 곡 들려주면 안 돼?”
“아, 안 돼요. 음원 유출시키면 안 되니까 보안에 신경 써달라고 해서요.”
“음…보안이 중요하긴 하지.”
“그리고 아직 계약을 한 건 아니에요.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까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요.”
아현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곡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해명을 했다.
사실 대단한 게 맞는데 말이다.
“네가 쓴 곡에 자신 있으면 곡비를 받지 않고 음원수익에 대한 지분을 가지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좀 특이한 경우야,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 거니까. 보통 회사에서 제시한 금액을 듣고 조율을 하는 편인데, 못 받는 경우에는 70만원도 받고 100만원을 받는 경우도 있어. 잘 받으면 한 400? 500 정도? 이 바닥에서 제대로 곡 값을 받으려면 경력이 필요해.”
경력이 없는 신인 작곡가는 곡비 조정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한다.
‘정말 좋은 곡인데….’
고작 100만원을 받고 곡을 팔아야 할까?
“근데 너무 짜지만 않으면 그냥 넘기는 게 좋아. 이 바닥에서 비슷한 곡 만드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알잖아. 양아치 같은 회사 걸리면 허무하게 곡 뺏기는 거거든. 곡비도 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
여러 흉흉한 얘기를 듣고 있으니 곡을 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곳에 곡을 보내놓은 상태였는데, 진작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해솔이의 곡이었기에 최대한 숨기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아현이의 머릿속에는 각종 안 좋은 경우들이 둥둥 떠다녔고, 어느새 곡비 70만원에 넘기게 되는 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 섣불렀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바보! 멍청이!’
아현이는 적어도 해솔이의 곡이 천만 원은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귀한 곡을 10분의 1 값만 받고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으니 억울 할 밖에.
이 소식을 해솔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면목이 없었던 아현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의 암울한 생각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아현이가 울고 있는 사이에, 그녀의 핸드폰과 메일에 난리가 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LM 엔터테이먼트입니다. 블루&베리 작곡가님께서 보내주신 곡이…….]
[상아 엔터테이먼트입니다. 블루&베리 작곡가님. 작곡가님께서 보내주신 곡 너무 잘 들었습니다.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부득이하게 메일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건 펑펑 울고 한숨을 푹푹 쉬다가 겨우 진정한 아현이 해솔이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내들었을 때였다.
“에엣?! 이, 이게 뭐야?”
연결 되지 않은 통화만 해도 10통이 넘었다.
아현은 멍해져서 돌이 된 것마냥 한동안 굳어 있었다.
그녀는 메일과 핸드폰을 멍하니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하고 해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건 혼자서 감당 못해.’
곡의 진짜 주인인 해솔이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군다나 메일에는 ‘허니 엔터’에게서 온 메일도 있었다!
여보세요?
“해, 해솔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흐이이잉!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써어.”
왜 그러는데? 울었어? 목소리가 잠겼는데.
다정한 해솔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울컥해져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현이는 옹알대는 목소리로 해솔이에게 이르듯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해솔이가 과연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앞뒤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횡설수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곡을 사겠다는 연락이 너무 많이와서 무서워졌다 이거지?
“으응…훌쩍!”
아이구~ 우리 애기, 많이 놀랐다보다.
“해솔이 네가 만든 곡이 너무 좋긴 했엉. 그래서 부담이 많이 돼. 내가 징짜 잘 파라야 하는뎅.”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애기로 변한 아현이는 남자친구에게 마음껏 애교와 투정을 부렸다.
그라면 감당하기 힘든 이 상황을 척척 해결해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해솔이는 아현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허니 엔터랑 계약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허니 엔터 출신 연습생이잖아. 아마 계약을 하면 네 얼굴을 보고 더 잘 챙겨주실 거야.
“그럴까?”
응. 그리고 나도 우리가 함께 만든 곡이 이상한 곳에서 쓰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마, 맞아! 나도 그게 제일 걱정됐어.”
더군다나 신인 작곡가는 경력이 중요하다며. 허니 엔터면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응응, 맞아.”
하나 같이 맞는 말들이다.
아현이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가격은 얼마였으면 좋겠어?”
보통 100만원 받는다면서. 그래도 100만원은 너무 서운하니까 300만원 제시해봐. 내가 생각하기에 300이면 좋다고 할 것 같거든?
“응응. 그렇게 할게!”
아현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해솔이가 딱딱 이렇게 하라고 말해주니 믿음직스러워서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현이는 전화를 끊고 바로 허니 엔터 쪽과 연락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