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21. 곰돌이 인형 (4)
* * *
“난 여태까지 내 애인한테 이런 비싼 보석들을 줄줄이 안겨준 적 없어. 넌 그걸 알아야 돼. 영광으로 알란 말이야.”
[고마워. 나도 널 사랑해.]
“당연히 그래야지.”
[네가 보석을 안겨주지 않았어도 사랑했을 거야. 나는 곰돌이 인형이라서 돈이 필요 없거든.]
“…….”
그건 또 그렇다.
곰돌이 인형을 꾸미는데 열성을 올리는 것은 비앙카의 만족감 때문일 뿐.
곰돌이 인형에겐 대단히 좋은 일인 건 아니다.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장신구들 덕분에 조금 더 예뻐지는 것일 뿐.
“그런데도 넌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당연하지.]
“그 사람도 너처럼 날 사랑해줄까?”
[나보다는 못할 걸? 하지만 나보다 못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닐 거야. 내 사랑이 너무 대단한 것뿐이니까.]
“풋, 엄청난 자신감이네.”
[장담할 수 있어.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지직은 없을 거야.]
내 전부를 다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네 전부를 내게 넘겨주지 않을래?
? ? ?
[내가 갖지 못하면 아무도 못 가져]
*분홍색 곰돌이 인형 (커스텀1)
*진척도 : ●●●●●◐○○○○ (55%)
‘드디어 50%를 넘겼네?’
생각보다 진척도가 느리게 올라서 슬슬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늘 잠에서 깨어나고 확인해보니 55%가 넘어가 있었다.
초반에는 잘 오르지 않더니 후반이 되니 쑥쑥 오르는 느낌이다.
이 진척도가 100%가 되면 비앙카는 내 말을 거부할 수 없는 인형이 된다고 한다.
사람에게 이런 아이템을 썼다는 게 찜찜하면서도 이걸 쓰지 않음으로서 오게 될 피해를 떠올려보면 잘 했다 싶어진다.
“이쪽에서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네.”
웹 드라마 촬영은 종료 되었다.
강준이가 연기한 황상호가 민영 누나가 연기한 김지혜와 이어졌다.
황상호는 재벌3세가 맞기는 했지만 사생아였음이 밝혀지고, 내가 연기한 유은탁은 감옥에 들어갔다.
다만 시즌2를 의도한 듯 마지막에 유은탁의 동생으로 추측 되는 남자가 황상호와 김지혜가 팔짱을 낀 채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이 들어갔다.
덕분에 댓글창은 난리가 났다.
멤버들도 그걸 보고 묻더라.
시즌2 하냐고.
‘시즌2라니. 난 이제 해외 가야 되는데 될 리가 없잖아.’
팬들은 시즌2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글쎄.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진 모르겠다.
애초에 작가도 감독도 시즌2에 대한 생각이 깊지가 않다.
근데 끝을 왜 그렇게 냈느냐.
‘이유가 참 어이없긴 해. 여운 남으라고 그렇게 만들다니.’
정확히는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의 끝이 ‘완결’이라는 단어에 끝나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즌2가 제작되는 것 마냥 마지막 장면을 집어넣은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 학교에 왕자님이 있다가 끝났다는 생각보단 시즌2를 기다리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작가와 감독의 수작질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아무튼.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방송국 대기실 안.
바깥이 굉장히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곧 이곳에서 방송 녹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가면싱어.
오늘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가면싱어 녹화날이었다.
‘가면 답답하네.’
내 닉네임은 [흑마 탄 백발 왕자님].
긴 백발이 찰랑이며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주문 제작한 흑마 인형은 어깨에 다소곳하게 올려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흑마는 주문 제작하길 잘했다 싶다.
제작진 쪽에서 준비해주는 흑마를 허리춤에 매달고 무대를 올라야 했다면 정말 짜증 났을 거다.
주문 제작한 흑마는 갈기털이 멋있는 녀석이었다.
“물 좀 마실래? 답답하지는 않고?”
“괜찮아요. 대기실에서 가면 떼고 있으면 안 되죠?”
“조금 있다가 인터뷰하러 오거든? 그거만 하고 벗자. 더우면 에어컨 온도 좀 내릴까?”
“넵, 조금만 더 내려주세요. 옷이 통풍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슬슬 더위가 물러나고 있는 계절인데 통풍이 안 되는 옷을 입고 있으니 땀이 줄줄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막 벗을 수 없는 이유는 가면에 머리가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직접 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허리춤까지 오는 백발을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인터뷰 좀 딸게요.”
“네.”
스태프가 들어와 내 개인 인터뷰를 빠르게 진행했다.
간단하게 가면싱어에 나온 이유와 목표 그리고 멤버들에게 하고 싶은 말, 프로그램에서 하고 싶었던 말 등을 따냈다.
아마 TV에서는 몇 초 나오고 말겠지만, 화면을 딸 때는 몇 배에 해당하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제 상대편이랑 듀엣 리허설 있을 거에요. 가면은 아직 벗지 말아주시고 그대로 나가서 리허설 대기해주세요. 리허설 끝나고 나서는 벗고 계셔도 되는데, 바깥으로 나오지는 말아주세요. 보안 중요한 거 아시죠? 필요한 게 생기면 매니저 분 시켜주세요.”
“넵.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직원의 안내를 따라 곧장 대기실을 나와 리허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움직였다.
“오! 이분이 제 상대편이에요?”
무대에는 오늘 내 1라운드 상대가 먼저 올라가 있었다.
“말씀 많이 하시면 안 됩니다.”
스태프가 황급히 말을 막았지만, 내 상대편은 방송짬이 좀 되는 사람인지 스태프의 말을 별스럽지 않게 무시하고 넘겨버렸다.
“에이, 사람이 만났는데 인사도 못해요? 안녕하세요? 와~ 체격이 장난 아닌데. 누구지? 목소리 좀 들어보게 말 좀 해봐요.”
“…….”
깐족깐족!
TV를 많이 보지 않기에 상대방의 목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껄렁이는 태도가 영 질 나빠 보이긴 했다.
“가수에요? 뭔가 느낌이 이쁜이 스타일인데. 혹시 아이돌?”
“…….”
“대답 없는 거 보니까 맞나보네? 아니면 고개라도 저었을 거 아냐. 하핫! 편의 봐주겠다고 제작진한테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배려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1라운드에 아이돌을 붙여버리면 너무 양심 없단 소리 들을 것 같다고. 아이돌 팬덤 엄청나잖아.”
“…….”
어이없는 소릴 한다.
“나 욕먹지 않게 잘 좀 해줘요. 투표수가 좀 비등비등하게 나오게. 너무 차이나게 이겨버리면 미안해서 어떡하냐구.”
당연히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수인 건 확실하네.’
아이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나저나 아이돌이 여길 나온 거 보면 제법 좋은 줄을 잡았나봐. 몸도 반반한 게 응? 그쪽으로 보통 잘 하는 게 아닌가 본데.”
능글능글
이젠 성희롱까지 한다.
“나는 어때? 아가. 가면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모르려나? 이것 참, 아쉬워 죽겠네. 정체를 밝히면 아이구 감사합니다 누나! 하고 앵길 텐데 말이야.”
듣고 있으려니 귀가 썩는 느낌이다.
무시하자.
어차피 저 사람은 오늘 내 가면을 벗기지 못할 테니까.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인이어를 귀에 꼈다.
MR이 깔리고, 눈을 감은 채로 집중했다.
손에 쥐어져 있는 마이크를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
그녀는 가수로 데뷔한지 20년이 넘는 배태랑 가수이다.
한때는 인기 있는 최고의 가수였지만, 무심한 세월은 그녀를 최고의 가수 자리에서 끌어내려오게 만들었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그녀의 노래를 질리게 만들었고, 어느덧 대중들에겐 익숙하다 못해 지겨워져버린 가수가 된 것이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비슷한 느낌이 나게 하는 가수.
개성이 너무 강한데, 그 개성이 너무 지겨워져버린 가수.
앨범을 내기만 하면 TOP10에 들던 그녀의 노래들이 이젠 TOP100 안에 들기도 힘들어져버렸다.
현재는 앨범을 내기보다는 드라마 OST 의뢰를 받아 곡을 내고 있었다.
드라마 효과를 받은 OST가 아니고선 자기 노래를 흥하게 할 힘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대중들 모두 안다.
그녀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래가 팔리질 않는다.
왜?
또 비슷한 노래 냈네. 지겨움.
저번에 냈던 곡이랑 이 곡이랑 다른 게 뭐지?
지겹다. 얘 노랜 거른지 오래
노래만 주구장창 내면 뭐함. 아무도 안 듣는데ㅋ
지겨워지겨워지겨워지겨워
‘나야말로 니들이 지겨워!!!! 빌어먹을 새끼들아!!’
왜 내 노래를 안 듣는 거야!! 뭐가 부족하냐고 뭐가!!
내 노래는 완벽한대!!
억울했다.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대중들은 그녀의 노력을 인정해주질 않는다.
최고라고 아부할 때는 언제고!
노래의 여신이라고 칭찬할 때는 언제고!!
그래서 그녀는 고민 끝에 가면싱어에 나오기로 결심했다.
얼굴을 가리고, 오로지 노래 실력으로만 평가 받는 프로그램.
가면싱어에서 우승해서 대중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거봐라. 내 노래는 완벽하다! 내 노래를 듣지 않는 너희들의 선택이 잘못 된 거다!
가면싱어 쪽에서도 그녀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환영해주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노래 실력은 그 누구도 깔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드디어 가면싱어 촬영날이 밝았다.
1라운드 상대?
신경도 안 쓰인다.
자신이 이길 테니까.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되냐고!! 시발시발시발!!’
까득, 까득, 까득!
“도대체 어떤 새끼야?”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그녀는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고 리허설이 끝난 지금.
그녀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위기감이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제작진들!! 방송국 년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저런 실력자가 아이돌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착각이었다.
배려를 해주겠다고 해놓고 나를 이렇게 엿 먹여?
그녀는 곧장 대기실을 나와 제작 피디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어엇? 승천하는 화룡님! 이렇게 막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비켜, 이 새끼야!”
퍽!
말리는 스태프를 확 밀치고, 피디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가면을 휙 벗어버리고 말했다.
“뭐하는 짓입니까, 지금?”
“저야 말로 황당한데요. 노희경씨. 보안이 중요한 프로그램인데 이런 곳에서 가면을 벗어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배려해준다면서요. 근데 내 1라운드 상대가 왜 저 지랄이 난 건데?!”
“지금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러신 겁니까?”
“배려해준다며!!”
“충분히 배려 해드린 겁니다. 노래 잘 부르시잖아요. 새파랗게 어린애, 뭐가 무섭다고 이런 짓을 합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세요?”
새파랗게 어린애라고?
“내 사정 뻔히 알면서 이러깁니까? 딱 봐도 요즘에 잘 나가는 애인 게 보이는데!! 그런 애랑 나랑 대결을 시키면 딱 봐도 결과가 보이잖아!”
“여긴 인지도, 얼굴 전부 쓸모없는 프로그램입니다. 오로지 노래 실력으로 승부를 겨루는 곳이에요. 문제 될 일 전혀 없다는 겁니다. 설마 노래 실력에 자신 없으세요?”
“…!!”
노희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노래 실력에 자신이 없냐고?
‘내 노래는 완벽해. 자신 없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냐며. 나 노희경 모르냐며.
큰 소리를 떵떵 쳐야 했다.
그게 노희경의 프라이드였으니까.
노래 하나로는 남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에서 턱 걸린다.
‘이게 다 리허설 때 들었던 노래 때문이야!! 빌어먹을!’
피디도 아마 리허설을 확인했을 테니, 그녀가 왜 머뭇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쪽팔렸다.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피디도 그녀가 느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화끈 열기가 오른다.
‘질 거야. 압도적으로 져버릴 거라고!!’
도망치고 싶었다.
질 게 뻔한 대결인데 해서 뭐하겠나?
노희경이 슬쩍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피디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도망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리허설 곧 끝납니다. 녹화 곧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내, 내가 왜 도망을 쳐?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하! 하하!”
“그래요. 그러셔야 할 겁니다.”
피디의 눈빛을 보니 이대로 도망쳤다간 보복을 당할 것 같았다.
가뜩이나 요즘 방송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섭외가 안 들어와서 골치 아파하고 있는데, 방송국 피디랑 척을 진다?
‘시발, 시바아아아알!!!!!’
외통수에 걸렸다.
그녀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어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억지로 가면을 다시 쓰고, 대기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러던 중, 대기실 하나의 문이 열렸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에이씨…이? 어! 너!”
대기실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한 노희경이 인상을 팍 찌푸린 순간.
대기실 안쪽에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띄였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어깨에 얹어 있는 흑마 인형은 눈에 너무 띄어서 못 알아차리면 병신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