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21. 곰돌이 인형 (5)
* * *
“뭐하시는 겁니까?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매니저 누나가 대기실 안으로 침입하는 가면 쓴 여자의 앞을 황급히 가로막았다.
가면을 썼다는 건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이라는 뜻.
때문에 매니저 누나는 상대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었다.
나는 대기실로 들어 온 이가 무대 위에서 추잡한 말을 했던 여자라는 걸 눈치 채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 들어와서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너 어디 애야?”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저기요. 나가주십시오. 안 나가시면 제작진 부르겠습니다.”
“시끄러워! 지금 매니저 따위가 나서도 되는 자리인 줄 알아?”
버럭 소리를 목소리를 들은 매니저 누나가 상대를 알아봤는지 말했다.
“이 목소리는…아! 가수 노희경씨 맞죠?”
“그래. 나 노희경이야.”
그녀는 매니저 누나가 자기를 알아보자 더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문제는 내가 노희경이 누군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노희경씨, 방송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막 함부로 행동하시면 안 되죠.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한테 말씀하세요. 해솔아, 너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댁한테 할 말 없어. 후배랑 얘기 좀 하자는 건데 막긴 왜 막아? 나 노희경이야! 내가 애 잡아먹기라도 해?”
“그러시지 않겠지만 가면싱어 프로그램 특성상 대결 상대 대기실을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리고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해서 집중이 필요합니다.”
“내가 쟤 1라운드 상대야. 집중은 개뿔.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너 이리 좀 와봐.”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하는 무례한 여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분 나쁜 말을 서슴없이 해대던 여자였다.
매니저 누나도 슬슬 열이 받았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우리 애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경고할 때 물러나십시오.”
“하! 가만히 있지 않으면 네가 어쩔 건데? 스폰한테 가서 찡찡거리라고 시키기라도 하시게?”
“뭐요? 스폰? 지금 말 다 했습니까?”
매니저 누나의 얼굴이 벌게진다.
무대 위에서도 더러운 얘기를 하더니 여기서도 똑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매니저 누나에게 무대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메니저 누나가 돌연 정색하더니 말했다.
“야!!! 노희경!! 왕년에 잘 나갔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입 함부로 놀리다가 이 바닥에서 매장 당한 년들이 한 둘인지 알아?! 너도 그렇게 해줘?!”
“!!”
자기가 노희경이라며 기세등등하던 여자가 매니저 누나의 말에 주춤 뒤로 물러선다.
누나가 저렇게 강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누나의 엄청난 기세에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뭐, 뭐라고? 지, 지금 너 나한테 한 말이야?”
“그래! 썅년아. 너한테 한 말이야. 노희경 너! 여기에 너 말고 노희경이 또 있냐? 한물 간지 오래인 썩은 물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릴 지껄여? 애지중지 귀하게 키워놓은 우리 애한테 감히 그딴 말을 하고도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무, 무, 무슨…! 미, 미친 거 아니야?”
너무 당황해서인지 말도 잘 하지 못한다.
무슨 깡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노희경은 매니저 누나의 기세에 완전히 밀렸다.
매니저 누나에게 완전히 기세가 꺾여버린 노희경은 결국 누나의 밀침에 의해 대기실 바깥으로 쫓겨났다.
"꺄악! 매니저가 사람 팬다!!"
“시끄러워, 시발년아. 우리 애한테 말 걸지 마라. 방송 핑계대고 말 걸어도 넌 아웃이야. 알아들었어?!”
“내, 내가 노, 노희경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너는 내가 누군지는 아냐? 주둥이가 트여 있다고 해서 말을 막 해도 되는 게 아니야, 이 사람아!"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밟혀서 묻히고 싶으면 해보든가. 너만 보복할 수 있는 줄 아냐? 어디 한 번 누가 더 빽이 좋은지 대결 해보자고. 너 인맥 다 날아간 거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건 5년 전에 끝냈어야지.”
웅성웅성
"이, 이이이!!!"
다툼 소리가 컸는지 사람들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노희경이 분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복도로 쫓겨난 노희경을 매니저 누나가 픽! 하고 비웃은 뒤 말했다.
"난 경고했다. 한 번만 더 건드려봐. 난 너 묻을 자신 있거든? 궁금하면 건드려."
스태프들이 지척에 도착했다.
매니저 누나는 제작진들에게 노희경과 더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쾅! 소리를 내며 대기실 문을 닫아버렸다.
“어우, 열 뻗쳐서 소리지르느라 목아파 죽겠네. 어따대고 저질스런 말을 지껄여?”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매니저 누나는 거칠게 숨을 쉬며 작게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누나, 이것 좀 마셔요.”
“후우! 미안하다. 험한 소리 듣게 해서.”
“저 여자 유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거에요?”
“한 물 간지 오래 된 년이야. 방송국에서 골수까지 빼먹고 버리려고 여기 출연시켰나본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랑 붙인 거 보니까 딱 봐도 1회용이잖아. 쟤가 그래도 실력 하나는 인정 받은 년인데, 그 화제를 네가 쏙 빼먹게 될 거다.”
매니저 누나가 원래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나 싶다.
그동안 누나가 사생팬들로부터 우리들을 열심히 지켜주긴 했지만, 연예인들과의 분쟁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움직이곤 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상대와 부딪치지 않게 뒤로 물리는 건 오늘과도 같았지만, 최대한 분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저자세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헌데 오늘 매니저 누나는 서슴없이 욕을 하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노희경이라는 여자가 도대체 누구지?’
저 여자의 영향력이 적어서 매니저 누나가 과민하게 반응한 건 아닌 듯했다.
‘스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나를 몸 파는 사람 취급한 것이 매니저 누나의 분노 버튼을 누르게 한 원인일 것이다.
매니저 누나가 좀 진정이 됐는지 내게 말했다.
“저 여자가 접근해서 뭐라고 하면 누나 불러. 대꾸도 하지 말고 남들 눈치 보이면 인사만 딱 깍듯하게 해. 더럽고 치사해도 네가 저 여자 후배라서 인사를 안하면 꼬투리 잡을지도 모르거든.”
“많이 유명한 사람이에요?”
“너 노희경 몰라?”
“네.”
“이야~ 노희경 많이 죽었네. 하긴, 옛날 사람들이나 잘 알지. 요즘 애들은 모를 만도 해. 왕년에 좀 먹어주는 가수였어. 노래 실력이 좋기도 했고. 근데 지금은 아니거든. 마약한 거 걸려서 경찰서 들락거리면서 인기 팍 꺾이고 지금은 이 바닥에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추한 늙은이야.”
“…헐.”
마약까지 한 사람이었어?
연예계에는 마약 스캔들이 심심치 않게 터지기에 새삼 놀라울 건 없지만….
‘마약한 사람 첨봄.’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내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약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니 매니저 누나가 말했다.
“너희들도 슬슬 마약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할 때가 왔구나.”
“그런 교육도 받아요?”
“당연하지. 연예인들도 바보는 아니거든. 멀쩡한 사람들은 마약 절대 안 해. 근데 멀쩡한 사람도 마약을 할 때가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는 경우야. 담배라고 속이고 펴보라고 해서 폈다가 마약을 접하게 된 경우도 있어.”
“저도 그런 소문 들어 본 적 있어요. 보통 주변 사람들한테 권유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호기심 같은 것 때문에 시작한다거나.”
“맞아. 대부분 그래. 근데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한테 너 마약 해볼래? 하면 할 것 같니?”
“절대 안 하죠.”
“그런 놈들은 연예인들 감정을 노려. 예를 들어 우울증 걸린 연예인들 말이야. 한 번 해보라고. 우울한 감정이 사라질 거라고 말이야. 우울증 때문에 죽고 싶어 하던 사람이라면 마약을 해서라도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지.”
본격적으로 인기가 많아지기 시작하면 멤버들 모두에게 상담을 받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관리를 해줘도 엇나가는 애는 엇나가긴 하더라.”
최대한 케어를 해준다고 하고는 있지만, 엇나가는 애가 나올 때마다 힘이 쭉 빠진다고 한다.
“너네들은 그래도 클럽 같은 곳도 안 좋아하고 다들 집순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클럽 좋아하는 애들 보면 꼭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더라.”
활동을 하다가 좀 친해진 연예인들이 종종 클럽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오기는 한다.
클럽에서 춤추고 노는 분위기가 재밌다면 갔겠지만….
‘취향 아님.’
애석하게도 내 취향이 아니다.
더욱이 클럽에 남자가 뜬다?
거기 와 있는 여자들 전부가 다 날 노리고 눈을 빛낼 거다.
그냥 길가를 걸어가도 시선이 쏟아지는데, 굳이 클럽에 가서 먹잇감이 되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클럽에 가자고 꼬시는 이쪽 세계 남자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갑자기 마약 얘기로 화제가 바뀌어 매니저 누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또 그년 인가? 내가 나가볼 테니까 넌 저쪽 구석에 있어. 안 보이게.”
“넵.”
순순히 매니저 누나의 말에 따랐다.
누나가 대기실 문을 열자 다행이도 노크한 사람은 노희경이 아니라 피디님이었다.
“여기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아! 피디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해솔씨는 어디…?”
“해솔아, 나와도 돼.”
매니저 누나의 말에 구석에서 스윽 나왔다.
피디님은 내가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눈치 챘는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노희경씨가 여기서 난리를 치고 간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와서 우리 애한테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우리 애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후, 죄송합니다. 그 인간 요즘 소문이 안 좋긴 했는데 그 정도로 막가는 줄 몰랐습니다.”
“피디님 잘못 아니라는 건 알지만 우리 애가 너무 놀라서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대로 바로 촬영을 한다고 실력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노희경의 꼬장에 놀란 적 없다.
매니저 누나의 썅욕에 놀랐을 뿐.
“아까 리허설 때 해솔씨 노래 솜씨를 듣고, 기에 눌린 것 같더군요.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여기와서 꼬장을 부린 것 같은데, 촬영 순서를 좀 뒤로 미뤄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아! 그리고 노희경씨랑 최대한 동선이 안 겹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희경씨가 우리 애한테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보니 걱정이 돼서요. 막무가내로 대기실 안에 들어와서 하…. 정말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퍼붓는데, 해솔이가 그래도 멤버들 중에 제일 깡이 센 녀석이거든요. 그런데도 무섭다고 저기 숨어 있었습니다. 다른 애였으면 무조건 울었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대 위에서도 두 사람이 대화 나누지 못하게 대본 바꾸겠습니다.”
피디가 이 정도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노희경이 꼬장을 부린 것이지, 피디가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지 않은가?
피디가 삐딱하게 나온다면 우리 입장에선 서운해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피디가 조금 저자세로 나와준 덕분에 매니저 누나는 한껏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피해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해서 그런지 그때부터 부쩍 스태프들이 내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노희경씨가 무슨 협박을 했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별 거 없는 사람이에요. 끈 떨어진지 오래죠.”
“리허설 때 개 발리고 쪽팔리지도 않나. 쯧쯧!”
“해솔씨 엄청 놀랐겠다. 어쩜 좋아.”
스태프들은 내가 노희경에게 크게 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안쓰러운 시선으로 나를 동정했다.
매니저 누나는 티내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했기에 기꺼이 스태프들의 동정과 선의를 받아들였다.
촬영 순서가 조정 되고.
1라운드 가장 마지막에 무대에 올랐다.
피디에게 무언가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반대편에서 나오고 있는 가면 쓴 노희경의 몸짓이 무척이나 얌전했다.
대기실에서 있었던 소란을 알고 있는 MC가 조심스럽게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1라운드 마지막 무대입니다. 흑마 탄 백발 왕자님 대 승천하는 화룡님이 부릅니다. I want toholdyourhand”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노래의 시작을 알렸다.
순서는 나부터 부르는 것이었기에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는 커플을 봤어.”
음색을 한껏 살려서 부른 첫 마디에.
와아아아~!
가면싱어 관객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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