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22. 가면싱어 5관왕? (2)
* * *
“어….”
“음….”
작가들의 요청에 의해 때 아닌 개인기 연습에 들어갔다.
적당히 짜깁기한 댄스 메들리를 뚝딱 만들어서 보여주자 작가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진다.
“너무 잘 추는데요….”
“어…그게 문제가 되나요?”
“되죠. 단번에 아이돌인 걸 알 것 같으니까요”
“며칠 전에 알려드린 것도 아니고 겨우 두 시간 전에 알려드린 건데 이 정도 퀄리티라니….”
“이렇게 열심히 안 해주셔도 되는 거거든요. 그냥 약간 토크타임에 MSG 살짝 뿌리는 정도인데….”
나는 당황하는 작가들의 말을 듣고서야 뭐가 잘못 된 건지 이해했다.
보통 개인기를 부탁하려면 촬영 전에 미리 말을 전달해서 부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오늘처럼 촬영이 있는 날에 덜컥 찾아와 개인기를 부탁한 건 엄연한 무례였다.
“그러니가 율동을 준비해달라고 말했던 건데 제가 군무를 준비해버린 거네요?”
“그으렇죠?”
“으음….”
너무 잘 춰서 문제가 될 줄이야.
물론 율동으로 바꿔서 추면 되는 일이긴 하다.
문제는.
“이걸 안 보여주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요?”
“그건 그래.”
버리긴 아까운 댄스 메들리라는 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꽤 힘을 줘서 만든 댄스 메들리였다.
작가들은 이걸 추면 분명 화제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버리기엔 아깝고, 취하기엔 부담스럽고.
결국 이 일은 피디에게까지 전달됐다.
“진짜 재주꾼이네요. 과하게 준비할 것 같아서 일부러 미리 말 안 드렸던 건데.”
신인 아이돌이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을 무시하고 과하게 준비해 올 것 같아서 일부러 사전에 알리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실력이 너무 좋아서 2시간 만에 이런 퀄리티의 댄스 메들리를 뚝딱 만들어버린 상황.
“피디님, 이걸 버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요? 어차피 눈치 챈 사람 한 명도 없는데 확 풀어버리죠?”
“저 댄스 메들리면 분명 화제가 될 거에요.”
‘화제 = 시청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기 위해 사람 하나쯤 담그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방송쟁이들에게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은 그리 문제 될 게 없었다.
“지금 흑마 탄 백발 왕자님이 화제가 되는 건, 네티즌들이 정체를 알아내지 못해서잖아.”
“어차피 정체는 나중 되면 들켜요. 우리 쪽에서 힌트 살살 풀려고 했잖아요.”
“흐음.”
“제가 보기엔 실력으로 홍보를 해도 충분할 것 같거든요.”
불과 몇 시간 만에 만들어낸 댄스 메들리가 엄청나다.
그렇다고 노래에 소홀한 것도 아니다.
오늘 준비한 노래는 저번 가왕전 때 보여주었던 실력보다 더 대단했다.
“오히려 흑마 탄 백발 왕자님이 아이돌이라는 게 알려지면 더 난리가 나지 않을까요? 남자 아이돌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잖아요. 엄청난 반전이 될 거에요.”
작가의 설득을 들은 피디가 결국 마음을 바꿨다.
“해솔씨, 처음에 보여줬던 댄스 메들리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아이돌이 아니라 프로 댄서로 오해할 수준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
내 패기 있는 말에 피디와 작가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부탁해요, 왕자님!”
제작진들이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대기실을 나갔다.
매니저 누나도 내가 기특했는지 등을 두들겨줬다.
“말을 어쩜 그렇게 예쁘게 잘 해?”
“제가 그랬나요? 저기 소파 좀 치워주세요. 연습 하게.”
“알았어!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까. 옷을 좀 편한 걸 입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제작진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다.
보통 가왕은 1라운드 때부터 왕좌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3라운드가 될 때까지 대기실에 있어도 되는 편의를 준 것이다.
그때까지 열심히 댄스 메들리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기왕 프로댄서가 되어보겠다고 했으니 수준을 더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3라운드가 시작 됐다.
1,2,3 라운드를 걸쳐 올라 온 도전자는 ‘해바라기 요정왕’
여자 출연자로, 노래 솜씨가 대단해 가왕에 도전 할 충분한 자격이 됐다.
흔들림 없는 단단한 발성으로 소름끼치는 강약 조절을 보여주었는데, 정체가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가수인 건 틀림없었다.
“자, 이제 도전자에 맞서는 가왕의 무대만이 남았습니다.”
MC가 의미심장하게 방청객들에게 다음 순서를 알렸다.
“모두의 귀를 사로잡았던 폭발적인 고음의 노래를 불러주었던 도전자 해바라기 요정왕! 그리고 화제를 일으키며 가뿐하게 2관왕에 오른 가왕 흑마 탄 백발 왕자님의 대결인데요.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가왕께서는 해바라기 요정왕님의 무대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곡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무대였던 것 같습니다. 3라운드에서 불렀던 ‘해지는 밤’이 되게 부르기 어려운 노래거든요. 왕보다는 황제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무대였습니다.”
와아아아~!!!!
“가왕께서 극찬을 해주셨습니다. 해바라기 요정왕님!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도전해봐야겠지만, 해낼 자신 있습니다.”
헬륨가스를 마신 듯한 목소리.
가왕에 도전하는 입장답게 패기만만하다.
“오호, 도전자가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가왕은 어떠십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3관왕을 이루기 위해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노래를 좋아해주시는 걸 보고 용기를 많이 얻었거든요. 지금은 누구에게도 쉽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야아~! 가왕께서도 승리를 자신하고 계십니다. 흥미진진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가왕의 무대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와아아아~!!!
“여기서 잠깐 끊고 가겠습니다! 30분까지 방청객분들 자리에 착석해주셔야 합니다. 화장실은 왼쪽 출구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 무대가 시작되기 전,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휴식 시간동안 스태프들은 쉬지 못한다.
내 무대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 하고 와.”
“걱정 마세요.”
“그래. 너만 믿는다! 뭐 필요한 건 없고?”
“물 다 떨어졌는데 물 좀 구해주세요.”
“오케이!”
물 구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매니저 누나가 후다닥 물을 구하기 위해 나가고.
나는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을 꺼냈다.
3라운드를 보는 동안에는 핸드폰을 보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 연락이 와 있었다.
“정화씨?”
정화씨에게 전화가 5통이나 와 있었는데, 전부 받지 못해서 인지 메시지도 와 있었다.
이런 식의 전화를 걸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불길한 예감이 나를 휘감았다.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하자 내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벌떡!
[정화씨 : 산통이 왔어. 주아 지금 병원에 가는 길이야.]
“시발.”
예정일이 아직 이주일 정도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건강부적 때문에 주아 누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리 없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런 날벼락이 올 줄은 몰랐다.
황급히 가왕 자리에서 나와 정화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솔아!
“어떻게 된 거에요?”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하더라고. 그게 산통이었나봐.
“누나는요? 괜찮은 거에요?”
괜찮아. 병원 도착했고 아직 아기 낳을 때가 안 돼서 대기 중이야. 많이 놀랐지? 일하는 중이니?
“당장 갈게요.”
지금 시발 가왕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해솔아! 왜 나왔어? 너 어디가? 곧 촬영 시작해야 돼.”
그때, 하필 매니저 누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나의 말을 정화씨가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촬영 중인 거니? 내가 괜히 연락했네. 주아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촬영하고 와. 애 1~2시간 안에 쑥쑥 낳을 수 있고 그런 거 아니야. 10시간 대기할 때도 있고, 아니면 오늘 안 나올 수도 있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어디 병원이에요? 지금 갈게요.”
“야야야! 지금 촬영 곧 시작하는데 어딜 간다는 거야? 병원이라니? 뭔 일인데!!”
매니저 누나가 내 앞을 막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누나, 막지 마세요.”
“그럼 말을 제대로 하고 가야지! 너 하나 사라지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
야, 진해솔!
내 입장에선 당장 주아 누나에게 달려가는 게 옳은 일이 맞다.
하지만 매니저 누나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불안하게 두근두근 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너 촬영하고 있는데 그냥 튀어나오려고 한다며? 나 배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신경 쓸 겨를 없거든? 최대한 빨리 여기로 튀어와. 네가 해야 할 일 전부 다 해놓고서. 책임 있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줘야죠? 축복이 태어나는 날인데 네가 욕먹는 걸 봐야겠어?
“…하. 알았어.”
주아 누나의 말을 듣고 있으니 흥분이 좀 가라앉아졌다.
매니저 누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팔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것도 보였다.
“미안해요, 누나.”
“무슨 일인 거야? 안 갈 거지? 야 제발 나 좀 살려줘라. 이대로 나가면 안 돼. 진짜 너 큰일 나!”
“지금 당장은 안 갈 거에요. 대신 누나가 피디님한테 말 좀 잘해주세요. 저 노래만 부르고 바로 나갈 수 있게요.”
“노래만? 개인기는?”
“개인기…후, 해야겠죠?”
“해야지! 너 열심히 준비했잖아. 심각한 거야? 병원이라고 한 거 보니까 뭐 아는 사람이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지금 제 피를 이은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이랍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럼 누나가 책임지고 개인기 취소시켜놓을게. 너는 노래만 부르고 나오면 돼. 그 정도 편집은 가능할 거야. 만약 네가 3관왕에 오르면 다음 촬영 때 더 열심히 준비해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
“네.”
매니저 누나가 자신만 믿으라며 나를 돌려보내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사라졌다.
나는 가왕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해야 빨리 대결을 끝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휴식을 취하고 돌아 온 방청객들이 좌석에 앉았다.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매니저 누나는 내가 무대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영웅처럼 나타나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피디님이랑 얘기 끝냈어.”
“된다고 하셨어요?”
“응. 개인기는 다음에 하는 걸로. 대신 노래 기깔나게 불러달라고 하신다. 무조건 3관왕 해내라고 말이야. 최대한 결과 빠르게 발표해주겠다고 약속도 받았어.”
불끈!
주먹을 꽉 쥐었다.
저쪽에서 날 배려해주었으니 나도 그 값을 할 때였다.
“방청객들이 투표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게 압도적으로 이기겠습니다.”
“그래.”
“오늘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미안해요, 누나.”
“지인이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 에휴, 그래도 다음에는 이렇게 급발진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 좀 해줘. 내가 발견 못했으면 너 그냥 나가버렸을 거 아냐? 그거 뒷감당 못해.”
“네. 누나. 무대 끝내고 제대로 다시 사과드릴게요.”
“무대만 잘 해줘. 난 그걸로 됐으니까.”
“네. 그럴 겁니다.”
내가 압도적인 실력을 보인다면 방청객들은 고민하지 않고 빠르게 투표를 끝낼 것이다.
그럼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을 끝내고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갈 수 있을 터.
매니저 누나에게 버림받은 물병을 따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가면을 정리하고 있으니 촬영이 시작 됐다.
커다란 무대 위.
평소와 달리 홀로 선 무대가 처음에는 다소 낯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낯설음도, 방청객들의 무수한 시선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게 분유로이드인가?’
곧 축복이가 태어난다.
축복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묵직한 책임감이 몸을 휘감았다.
전주가 흐르고.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댄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모두 토해내듯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사를 뱉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