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23. 스케줄스케줄스케줄 (4)
* * *
“누나,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 들으면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넌 진짜 그런 능력을 갖고 있잖아.”
“아무도 안 믿을 일이에요. 누나도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는 게 저한테는 더 피곤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누나도 제 비밀을 알고 있는 거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누나가 신경 쓰는 거 보면 미안해져요.”
“으응.”
내 체질에 대해 예민하게 굴 것 없다.
플렉스 해서 능력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됐으니까.
원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는 언제든 OFF 시킬 수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내 몸에 대한 정보가 흘러가도 건질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게 네가 예매한 영화야? 기대작이네.”
엄청나게 홍보를 많이 한 액션 영화.
이 세계에 와서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영화의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라는 점이다.
‘로맨스는 손 댈 수 있는 장르가 아니고.’
내가 그나마 재밌게 볼 수 있는 장르는 액션 영화인데, 노출에 대한 심의가 느슨해서 여자들이 가슴을 반 이상 드러낸 채로 땅을 구르고 뛰어다니고는 한다.
그리고 이 액션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킬러로 키워져 자라난 윤지현, 어느 날 의뢰 대상인 남자가 눈에 익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지현은 그를 죽이지 못하고 의뢰 실패와 포기를 선언하게 되는데…. 뒤늦게 남자의 정체를 떠올려낸 지현은 다른 킬러가 의뢰를 받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살리기로 결심하는데.』
전형적인 줄거리의 영화였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남자 배우가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고 해서 엄청난 기대작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세계에서 남자가 액션을 했다는 건 엄청 드문 일이다.
항상 영화 속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구함을 받거나
‘남자 액션 따위 관심 없지만, 그래도 킬러 여주인공은 못 참지.’
킬러 역할을 맡은 여배우의 몸매가 아주 대박이었다.
키도 175cm인데다가 배우를 하기 전에 했던 일이 무려 헬스 트레이너.
‘우리 주아 누나보단 못한 가슴이겠지만! 그래도 기대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커플 세트를 구매해서 양 손을 무겁게 만든 우리들은 지정 좌석에 앉았다.
영화 시간이 되니 대형 스크린에 선전이 주구장창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 됐다.
? ? ?
“어떡해!! 나 영화 찍고 싶어!!!”
오늘 봤던 영화가 많이 인상 깊었는지 민영 누나가 영화에 대한 의욕을 드러낸다.
“드라마 끝나면 영화 쪽으로 한 번 기웃거려볼까? 내가 캐스팅 될 수 있을 것 같아?”
“누나가 뭐가 부족해요. 주연 배우보다 누나가 더 예쁘고, 연기도 더 잘하는데.”
“히힛! 그래두 아직 인지도는 부족하잖아.”
참 신기한 게, 이 바닥이 예쁘다고 전부 주연 배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자기보다 못 생기고 연기도 못하는 사람은 주연 배우인데, 정작 자신은 조연 배우인 경우가 심심치 않게 존재한다.
누나도 그 과정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드라마가 제법 괜찮게 돼서 얼굴을 알리는데 성공했는데, 아직 주연을 맡기엔 무게가 가벼운 거다.
여기서 영화판으로 들어가 탄탄한 커리어를 만드는 것은 영리한 선택이라 볼 수 있을 듯했다.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아요. 근데 좀 아쉽지 않겠어요? 이제 막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영화판에서 활동하다가 잘못 되면 묻혀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 영리한 선택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으나 잘 하지 않는 이유는 이제 겨우 드라마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주제도 모르고 영화판 기웃거리다가 잊힐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용기만 있다면 현명한 선택이지만,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결심하기 힘든 결정인 것이다.
“못 생겼던 얼굴로도 배우 하겠다고 꿋꿋하게 버텼던 나야. 잊힐 까봐 두려운 건 평생 느껴왔던 감정이야. 아니, 애초에 잊힐 만큼 대단한 임팩트를 줘본 적도 없었어. 나는 최고가 아니면 안 돼. 평생 어중간하게 살아왔는데, 이 얼굴을 갖게 됐는데도 어중간하게 살고 싶지 않아.”
“…….”
“어중간하게 살 때는 타고난 얼굴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아니잖아. 못하면 내 능력이 부족한 거였고, 내 노력이 부족한 게 되어버려.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예전처럼 못난 질투나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쪽팔리잖아.”
“…기특하네요. 우리 누나.”
“힛, 딱 기다리고 있어! 언젠가는 오늘 봤던 영화 같은 거 너랑 같이 찍을 거야. 너도 주연하고, 나도 주연으로 캐스팅 받아서 말이야.”
과거 누나의 꿈은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캐스팅이 되는 배우가 되는 거였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별 거 아닐 수 있는 말이지만 누나한테는 평생 노력해서야 이룰 수 있을까 말까한 꿈이었단다.
하지만 이제 누나는 그 꿈을 버렸다.
나를 만나고 나서 꿈을 바꾼 것이다.
“같이 주연배우가 돼서 영화를 찍는다라…멋진 것 같아요.”
“거기에 천만배우 어때?”
“어…천만까지요?”
영화배우까지는 어떻게 가능할 법도 같은데, 천만배우까지는 너무 어렵지 않나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자 한다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나한테는 못한다는 생각 자체가 엄살인 거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나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 나갈 준비를 끝낸 민영 누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술 마실 거에요?”
“당연하지! 맥주 먹자!”
…편의점에서 누나가 몰래 콘돔을 사는 것도 기꺼이 모르는 척 해줬다.
여태까지 콘돔을 쓰지 않았을 때 아무말 없다가 갑자기 콘돔을 챙긴다는 건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뜻으로 보인다.
‘근데 나 콘돔 못 쓰는데.’
콘돔 쓰면 찢어진다는 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려나 고민하면서 맥주와 안주들을 챙겨 계산했다.
‘에휴, 사실 저게 문제가 아니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 되지 않으면 오늘 섹스는 물건너 한 것이다.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아.’
아마 그녀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만나야 직성에 풀리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민영 누나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가는 탓에 무서웠다.
“누나.”
“응?”
상에 차려진 음식을 한 입 먹으려는 누나의 눈을 피하며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 해외 나가요.”
“아~ 정말? 화보 촬영 같은 거 가는 거야? 부럽다~ 나두 해보고 싶은데. 며칠이나 걸려?”
“잠깐 나가는 게 아니라 이번에 활동을 아예 해외에서 하게 될 것 같아요.”
“…….”
“그래서 아마도 해외에 오래 있게 될 것 같아요. 1~2주로 끝나지 않구요.”
“정확히 언제 들어오는데.”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침대로 다이빙 할 생각에 해맑았던 누나의 얼굴이 굳어진다.
‘시발, 개쫄린다.’
후웁, 후웁!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글쎄요, 정확히 언제라고 말을 해드릴 수가 없어요. 활동이 잘 되면 스케줄이 계속 쭉쭉 늘어날 거고, 잘 안 되면 계획 된 활동만 하고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럼 만약 너희가 외국 가서 잘 되면 1년이고 2년이고 계속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
“그, 그 정도로 오래 있지는 않을 거에요. 길게 봐도 3개월은 안 넘을 걸…요?”
아마도?
“…….”
꿀꺽
“…….”
나는 그녀의 얼굴 변화를 보며 ‘좃 됐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어 자꾸만 침이 마른다.
누나의 콧구멍이 격렬하게 벌름거린다.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오른다.
눈가에는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어, 언제 가는 거야?”
“다음 주 화요일이요.”
누나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곤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누, 누나?"
"...."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흑! 훌쩍...흑흑!”
“아이고.”
결국 나는 누나의 얼굴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민영 누나가 웅얼거리며 눈물과 함께 호소했다.
“이러는 게 어디써어~! 이러케 갑자기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라구우…흐아앙!!”
퍽퍽!
윽! 억! 누나 거기 명치야!
민영 누나가 눈물을 폭포처럼 흘리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나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살려고 끌어안은 게 아니다.
“미안해요! 누나한테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흑흑, 나보고 어떠케 살라구우! 너 업쓰면 안 댄단 마리야아…허어엉!!”
가슴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운 민영 누나는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한숨을 푹푹 쉬며 그녀는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를 혼자서 들이키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크으~!!!
맥주가 한 캔, 두 캔 쌓이기 시작하고.
물배가 차서 결국 화장실에 다녀오기까지 한 누나가 잔뜩 취한 얼굴로 휘청휘청 가까이 다가왔다.
풀썩!
내 무릎 위에 당당하게 엉덩이를 대고 앉은 누나가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나를 앙칼지게 노려봤다.
“주머니 여러.”
“주머니요?”
“나 데꾸가.”
“?!”
설마 주머니에 자길 넣어서 데려가라는 건가?
“나 안대. 너 업스면 다 꽈앙이야!!! 엉망징창이라구!!”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아까부터 때린데 또 때리는 집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프다.’
취해서 힘 조절을 못하는 민영 누나의 손은 매우 매웠다.
“어떡하꺼야? 나 어떡하꺼냐구! 채김져! 채김져어어어어~!!!!!!”
“으악! 누나, 쉿쉿! 소리가 너무 커요!”
옆집 윗집 아랫집 다 들리게 생겼다.
누나의 입을 허겁지겁 막고 버둥대는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맥주 4캔 원샷하고 거기에 반 캔을 더 마셨으니 취기가 확 올라올 만도 했다.
“이거나아아아아~!!! 꺄아아읍으읍!”
“쉿~ 쉬이이잇~ 이웃이 욕해요. 소리는 지르면 안 돼요.”
누나의 입을 막고 후다닥 침대에 눕혔다.
이렇게 된 이상 누나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안대에엣!”
침대에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해 버둥대는 누나의 몸을 강제로 잡아 눌렀다.
“누나, 편하게 누워봐요. 자장자장 잡시다. 생각은 내일 하고 오늘은 그만 쉬자구요.”
“안대!! 못 자!! 가지마!! 가면 안 대에에에!!”
울음 다 그친 거 아니었어!?
도대체 어디서 스위치가 눌린 건지 누나가 다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미치고 팔짝 뛰것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누나를 달래는데 공을 들였다.
그리고 울음을 그쳤을 때즘, 누나는 확 올라왔던 취기가 싹 사라졌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퉁퉁 부은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으응.”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취해서.”
“나, 나 원래 이렇게 술 안 약해.”
“알죠. 극단 생활할 때 술고래 별명을 가질 만큼 잘 마셨다면서요. 아무래도 울다가 술을 갑자기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진상 짓도 안 하는데, 나 왜 그랬지? 되게 민망하다. 미안해.”
정신을 차린 누나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습이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누나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누나가 나한테 굉장히 집착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상상 이상이었던 거야. 본인 스스로보다 날 더 믿고 있었는데, 내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하니까 눈이 돌아버린 거지.’
믿고 의지하던 상대가 갑자기 떠나는 상황인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린 누나의 정신력이 대단한 거였다.
“…네가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
“오랫동안 아예 안 들어오진 않을 거에요. 들어올 때마다 연락할게요. 영상통화 자주하고, 문자도 자주 하고요. 아예 헤어지는 거 아니잖아요. 조금만 참아줘요.”
“아니야, 난 못 버틸 거야! 모든 걸 다 망칠 거야. 어, 얼굴도 다시 못 생겨지면 어쩌지? 네 정액을 안 먹으면 다시 되돌아갈 거야! 그 끔찍했던 얼굴로!!”
“되돌아가지 않을 거에요. 오해에요.”
“네 정액을 먹고 예뻐졌으니까 정액을 못 먹으면 다시 못 생겨지게 되는 게 당연하잖아!”
한 번 바뀐 얼굴.
또 다시 바뀌게 되는 일이 아예 없을 거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누나의 이런 집착은 어느 정도 내가 의도해둔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내가 해외 활동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그러니까 네 정액, 택배로 붙여주면 안 돼?”
“…네?”
그리고 그녀의 불안감은 예전에 한 번 시도한 적 있었던 바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내 정액을 보온병에 담아 가려고 했던 그녀의 만행을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