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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75화 (175/849)

〈 175화 〉 #23. 스케줄스케줄스케줄 (9)

* * *

“…해솔이 보고 싶다.”

문득 터져 나온 진심.

아현은 히잉~ 하고 울상을 지었다.

저번 주에 서프라이즈로 찾아와 찐한 밤을 보내고 갔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그리움이 짙어졌다.

그의 체취, 그의 단단했던 근육, 꽉 끌어안아주었던 안정감.

모두 그립고 또 그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과는 반대로 그녀는 요즘 미친 듯이 작곡을 하고 있었다.

해솔이에 대한 그리움이 곡에 대한 영감이 된 것이다.

잘 써지는 곡에 기쁘다가도, 그것이 해솔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걸 알기에 마냥 좋아만 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

아현이는 그리움에 한숨짓다가 맥주 한 캔을 따서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헤헤, 맛있다.”

술 맛있는 줄 몰랐던 아현이도 어느덧 술맛을 알게 될 정도가 됐다.

내일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많이 마실 수 없었기에 딱 한 캔만 하고 자기로 결심했다.

해솔이 없는 밤은 너무 외롭다.

그녀는 그렇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외로움을 술로 달랬다.

다음날.

아현은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갔다가 친구가 아닌 낯선 남자를 만났다.

“이아현씨죠?”

“네? 네에, 맞는데 누구세요?”

“오늘 소개팅 하기로 한 정세진이라고 합니다.”

“…네? 소개팅이라뇨? 저 아닌데요.”

“친구 분한테 연락 한 번 해보세요. 저는 오늘 소개팅 한다고 듣고 나온 거라서요.”

남자는 굉장히 훤칠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태닝을 했는지 살짝 그을린 건장한 피부에 은근히 야하게 생긴 얼굴까지.

요즘 여자들이 선호하는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현에겐 이 남자의 얼굴이 썩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진해솔이라는 완벽한 남자가 있는데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진해솔은 이상형을 초월한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 잠시만요. 친구한테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이아현은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하하! 만났구나? 어때? 괜찮지 않냐? 너 요즘 엄청 외롭다며.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큰 마음 먹고 연결해주는 거니까 잘 해봐. 저쪽도 요즘 외로워서 여자 만나고 싶다고 했었거든.

“미쳤나봐.”

이아현은 황당해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진해솔과 사귀는 것을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약속을 잡은 친구도 잘 한 일은 아니었다.

“나 싫어. 당장 저 사람한테 네가 연락해서 돌아가라고 해.”

­뭐? 싫다고? 야! 너 왜 이렇게 눈이 높아? 걔 정연대 법학과 다니는 애야. 더군다나 외모 봤을 거 아냐? 그 정도면 최상급이야! 진짜 너니까 소개시켜준 거다?

아현은 친구의 말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단 친구가 호의를 담아 소개팅을 해준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대단하다는 외모는 아현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현의 마음은 이미 진해솔이라는 남자로 마음이 꽉 차 있어서 다른 남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정연대건 삼송대건 무슨 상관이야? 난 됐으니까 빨리 가라고 하라니깐?”

­기왕 만난 거 밥 한 끼라도 같이 먹으면 좋잖아. 정 별로면 사귀는 거 말고 친구로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친구는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자꾸 아현에게 한 번 만나보라고 충동질 했다.

하지만 이아현은 정색을 하며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너 나랑 절교하고 싶어?”

­!!

“나 지금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 날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거 아니야. 네 착각이야. 나한테 강요하지 마. 나 싫다고 분명히 말 했어.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네가 해결해야지. 지금 너 싫은 소리 하기 싫으니까 나한테 그냥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거잖아. 하기 싫은 일 억지로 시키고 있잖아, 너. 그게 어떻게 날 위한 일이야?”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해놓고 호의를 거절하니 희생을 강요한다.

황당하고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할래?”

­알았어. 미안해. 네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 사과할게. 세진이한테도 내가 연락해서 사과하고.

“그래. 믿을게.”

전화를 끊은 아현이 길게 푹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붕 떠버렸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데 전부 엉망이 됐다.

아현은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약속을 잡을 만한 사람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사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나봐. 그 여자를 불러서 뭐하게?”

바로 로즈 트레이너.

회사를 그만두고 본인의 학원을 차린 여자다.

본래라면 진작 인연이 끊어져도 한참 전에 끊어 졌어야 하는 여자지만,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만나서 해솔이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긴 사람이라서 편하기는 해.’

더군다나 하는 일도 비슷해서 대화를 나누면 공감 되는 얘기들이 많았다.

“만나자고 해볼까.”

아마 바빠서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

반신반의 하면서도 아현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 : 혹시 지금 시간 돼요?]

놀랍게도 답장은 매우 빨리 왔다.

[도둑년 : 그건 왜? 설마 만나자고?]

[나 : 네. 싫어요?]

[도둑년 : 아니, 마침 잘 됐네. 술 친구 필요했는데. 우리 집으로 올래?]

[나 : 내가 왜 그쪽 집을 가요? 싫어요.]

[도둑년 : 우리 집에 마뜨라뇽 있어.]

아현은 마뜨라뇽이 뭔지 몰라 분하게도 인터넷에 검색해 그것이 비싼 양주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 : 주소 불러요.]

무려 800만원짜리 양주라는데, 그 정도면 이 여자 집으로 갈 가치가 있는 것도 같았다.

약속을 새로 잡고 화장실에서 나와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까 그녀와 소개팅을 하겠다고 온 남자가 가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현의 앞에 남자가 떡하니 서서는 말을 걸어온다.

“늦으셨네요.”

“…왜 아직 안 가셨어요? 얘기 못 들으셨어요?”

“들었습니다. 저 까셨다면서요.”

아현은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가지 않고 버틴 남자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자존심 상했다 이건가? 나한테 따지려고 기다린 거고?’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만날 생각도 없는 사람이랑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의 잘못이었다.

“그래서요?”

“하, 제가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되게 신선한 경험을 하는 중이네요.”

“제가 바란 일이 아니었어요. 오늘 자리가 소개팅인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에요. 헛걸음하게 한 건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겼으니 만나자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아현은 이 남자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진해솔이 있는 한 이아현에게 남자라는 생물체는 ‘인간’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음…네.”

“우와, 이렇게 면전에 대고 거절당하는 건 처음인데…. 충격이네요.”

“…….”

“나 완전 상처 받았어요.”

남자의 애교.

꺄악~!

귀여워!

누나한테 와! 누나가 잘 해줄게!

카페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꺅꺅댄다.

사실 아까부터 아현이와 정세진의 기묘한 대치를 지켜보고 있던 시선이 많았다.

남자가 여자를 거절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여자가 남자를 거절하는 건 정말

때문에 정세진이 부린 애교에 여자들이 술렁인 것이다.

반면 애교를 받은 당사자인 아현은 떨떠름했다.

‘충격 받기 싫으면 그냥 가시지 그랬어요.’

찌릿­!

이아현이 남자를 소심하게 째려봤다.

속마음을 확 다 말해버려서 내쫓아버리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의 그녀에겐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상처 받았으면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한 그녀가 가게를 나가려는데.

스윽­!

정세진이 문 앞을 막아섰다.

“잠깐잠깐! 거짓말인 거 다 아는데 바쁜 척 하지 말구 대화 좀 나눠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저 약속 있다니까요?”

“에이~ 없으면서.”

“왜 없다고 단정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바빠요. 비켜주세요.”

“오늘 친구랑 놀려고 나온 거잖아요. 근데 사실은 저랑 소개팅 하는 자리였던 거구요. 약속이 취소 된 건데 갑자기 약속이 새로 생길 리가 없죠.”

정세진이 보란 듯이 거만하게 웃는다.

여자들이 보조개에 환장하는 면이 있는데, 정세진은 하필 웃으니 보조개가 있었다.

덕분에 카페에서 흥미진진한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들이 더욱 환장해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수군수군­

저 여자 미친 거 아니야?

시발, 개부럽네.

저런 스타일이 요즘 먹히나? 내가 더 예쁘지 않아?

지랄.

내가 들이대볼까? 외로운 것 같은데.

남의 일을 몰래 훔쳐보고 수군대는 건 기분 나쁘지만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눈앞의 남자가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더 기세등등해져서 아현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늘 소개팅인 거 알고 바로 다른 약속 잡았어요. 거짓말 아니고 진짜에요.”

“애헤이! 너무하잖아요. 전 오늘 소개팅 하는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온 거란 말이에요. 적어도 같이 밥 한 끼는 먹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 자리가 만들어진데 아현씨 친구 책임이 있는 건데.”

“그건 친구 책임이구요, 제가 그걸 책임질 이유는 없죠. 전 오늘 모르고 나온 거에요. 저도 피해자라고요. 피해자한테 책임지라는 소릴 하시면 안 돼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다시 한 번 정세진을 지나쳐 문을 나가려는데, 또 다시 그가 아현이의 앞을 막아섰다.

결국 아현이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저기요! 그만하시라니까요?!”

“친구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그 문제는 제가 친구랑 풀어야 하는 일이지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앞 막지 말아주세요.”

“에헤이!”

정세진이 또 다시 그녀의 앞을 능글맞은 미소로 막아선다.

이건 선을 넘은 거다.

울컥­!

3번을 참으면 살인을 면한다지만, 한 번만 더 참으면 4번째가 되는 아현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뾰족하게 눈빛을 세운 그녀가 남자에게 우다다닥 속의 마음을 내뱉었다.

“아, 진짜!! 구질구질하게 구네, 정말! 3번이나 참았는데 계속 하셨으니까 예의 버리고 펙트로 말씀드릴게요. 그쪽 너무 못 생겼어요. 옷 입는 스타일도 촌스럽고, 헤어스타일도 별로에요. 한 쪽 눈이 보이긴 해요? 왜 앞머리를 그렇게 하고 다녀요? 그리고 목소리도 되게 제 스타일 아니거든요? 되게 밥 맛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좀 비켜주실래요? 그쪽 때문에 약속 늦을까봐 걱정이 많거든요!!!”

“…….”

“…….”

정적­!

충격을 받은 정세진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아현은 굳어버린 정세진을 뒤로 하고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정말 몰랐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가 동영상으로 찍었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자 차가운 도시 카페녀 (영상첨부)]

훈내 나는 남자 도도하게 차버리기.

여자들아 본받아라.

남자만 보면 침 질질 흘리면서 호구 되지 말고!

­ㅋㅋㅋㅋㅋㅋ맙소사! 이게 진짜라고?

­딱 봐도 주작.

­이 영상이 주작인 이유 : 잘 생긴 남자가 여자한테 매달림.

└ ㅇㅈ

└ 주작인 거 너무 티 남.

└ 근데 여자가 좀 생겼는데? 그럴 수 있지 않나?

└ 절대 그럴 리 없음.

└ 지금은 모자이크 돼서 얼굴 못 봤는데 여자가 좀 생겼어요? 그럼 진짜인 거 아님?

­주작 아니에요. 여기 카페에 저도 있었어요.

└??? 이게 진짜라고??

└응, 아니야~ 증거 없으면 주작.

영상 자체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주작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영상은 빠르게 ‘화제의 영상’으로 올라갔다.

뒤늦게 글을 올린 게시자가 너무 화제가 됐다는 생각에 쫄렸는지 글을 폭파하고 튀었지만, 이미 영상은 널리 퍼져나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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