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24. 해후 (4)
* * *
정화씨는 일찍 주아 누나를 낳아 실제 나이가 젊기도 했지만, 엄청난 동안이기도 해서 주아 누나와 얼핏 보면 언니와 동생 사이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아직 여자로서 활짝 피어있는 꽃인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 만난 전남편과 결혼을 해서 여태까지 살아온 탓에 난데없이 자각하게 된 ‘남자’로부터의 자극에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정력이라니. 믿을 수가 없더라. 네 첫 남자가 해솔이라서 이상한 걸 모르는 것 같은데 야동에서 나오는 건 전부 꾸며진 거야. 남자는 해솔이처럼 여러 번 못해.”
“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면…!”
“너는 정말 엄청나게 복 받은 거야! 너 푹찍이 뭔지 모르지? 이 세상에 남자랑 사귀는 여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단어야. 근데 너만 몰라. 왜? 해솔이는 푹찍이 아니니까!!”
“…….”
“…….”
정화씨의 남다른 기백에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압도당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는 깊은 한이 맺혀 있었다.
“한창 때의 여자가! 옆에 남편이 있는데도! 성욕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근데 나는 남자도 없었어! 그 새끼는 바람 피우느라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가끔 집에 들어오면 주아를 옆에 끼고 논다고 나는 신경도 안 썼어.”
정화씨는 시원하게 울분을 토해냈다.
꾹꾹 참아 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래서 못 참았어. 미안해. 이게 염치없는 네 엄마가 할 수 있는 변명이야.”
이건 누나가 정말 독한 마음을 먹고 정화씨와 모녀의 인연을 끊을 정도로 분노하지 않고서는 먹히지 않을 수가 없는 변명이었다.
정화씨의 변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고, 그건 주아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어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며 씩씩대던 것도 멈추고 눈물을 그렁그렁 고인 채로 정화씨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으렇게 말해도 화 안 풀…거야. 다른 남자여도 괜찮았잖아. 해솔이만 특별한 게 아닐 수도 있었어!”
“아니, 해솔이가 특별한 거야. 이건 엄마가 단언할 수 있어.”
“나, 남자가 고팠으면 유흥업소라도 갔으면 되는 거잖아!!”
“세상에!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유흥업소나 가라니! 그게 딸이 할 소리니?”
“…씨이.”
차라리 그렇게라도 풀었다면 정화씨는 나를 유혹하지 않았을까?
‘글쎄.’
나는 오히려 그런 곳에 다녔으면 더 나를 갈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 모르면 몰라도 쾌락을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건 어려운 법이니까.
“거기 돈이 얼만지 알아? 갔으면 너 뒷바라지 못했어. 유흥업소에 빠져서 패가망신한 애들이 한 둘이 아니거든?”
남자가 극소수인 곳인지라 유흥업소에서 남자를 데리고 놀려면 기본이 천 단위의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연예계 생활을 하며 이쪽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어서 알고 있는 정보였다.
누구누구가 그쪽 출신이라더라 하는 식의 소문들 말이다.
“…하아. 결국 엄마는 해솔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지?”
“응.”
“그럼 엄마가 내 아래로 들어오게 되는 건데, 그럴 수 있어? 나 엄마 딸이야.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는 사람 아니야.”
“내가 널 가르쳤어. 넌 나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서열에 들어갈 정도로 뻔뻔하지 못하단다. 이미 충분히 나짝 두껍게 행동했어. 감히 서열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서열에 들어가지 않고 해솔이랑 만나겠다는 건 시녀가 되겠다는 말인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요?”
첫 번째 아내를 ‘조강지처’라고 부르고, 그 아래로 서열이라는 것이 있어 두 번째 아내, 세 번째 아내가 된다.
이들은 모두 남자의 호적에 오를 수 있는 ‘합법적 아내’이고, 나중에 자식이 생겨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재산 분배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때, 남자의 재산은 모두에게 공동 분배, 여자의 재산은 남편과 피가 이어진 자식에게만 재산이 분배 된다.
본래 조강지처 이외의 여인을 들였을 때 ‘첩’이라는 말로서 불렀지만, 성별의 균등이 무너지고 중혼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첩’으로 부르는 것을 지양하고 ‘아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아내로 인정을 받은 건 똑같은데 누구는 조강지처, 누구는 첩으로 불리기 싫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다처제가 싫은 조강지처한테는 나머지 여자들 모두 첩일 뿐이겠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첩’이라는 단어는 서열에 들지 못하고, 법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여자가 남편과 정을 통했을 때 부르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첩을 때때로 시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첩이나 시녀나 둘 다 썩 좋아 보이진 않네.’
왜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첩을 시녀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그건 일부다처제로 변하면서 생긴 부작용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조강지처’는 남다른 법이었고, 사람이 모이면 세력이 생기는 법인지라 ‘서열’이라는 게 생겨났다.
조강지처는 남편이 데려 온 여자를 ‘서열’에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물론 남편이 새로 데려 온 여자를 너무 사랑한다면 ‘서열’ 자체를 무시할 수 있기는 하다.
‘원래 후궁들의 권력은 황제의 총애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황제를 등에 업은 후궁이 황후의 자리까지 노리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하던 일이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데려다만 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를 데려다 놓고 나 몰라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
무책임하게 사람을 데려 온 남자는 쏙 빠져버리면 상황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의 남편 꼬신 여자가 덩그러니 조강지처 손아귀 위에 얹어지게 되는 것이다.
‘살벌음 판인 거지. 눈치 보이는 건 당연하고, 질투 때문에 괴롭힘 당할 수도 있겠지.’
때문에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은 첩이 조강지처에게 잘 보여 ‘서열’에 들어가기 위해, 시녀 노릇을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 행동들이 지금은 전통처럼 자리 잡아 버렸고 말이다.
“그런 걸 왜 하려고 해요? 그러지 마세요.”
나는 정화씨가 굳이 시녀를 자처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이혼을 한 여자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서열에 들겠니. 앞으로 네가 만날 여자들은 전부 초혼이고, 나이도 어린 여자들일 텐데 말이야.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너 같은 남자 곁에 있으려면 이 정도 희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다행히 조강지처가 내 딸이잖니? 덕분에 다른 여자들한테 업신여겨지지는 않을 테니 아마 나는 시녀 중에서도 제일 대우 잘 받고 호강하는 여자가 될 거야.”
첩으로 남겠지만, 그녀의 권위까지 첩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녀를 자처하는 정화씨의 모습에 주아 누나가 마음이 불편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는 내가 그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다른 여자들한테 업신여겨지는 걸 보고 꼬시다고 생각할 것 같냐고.”
“네가 내 딸인데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니. 내 딸이 착하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해? 나한테 동정심을 사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거야?”
“거짓말이 아니라 내 진심이야.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해솔이 여자라는 걸 다른 여자들한테 숨기는 것도 가능하단다. 그걸로 주아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뭔들 못하겠니?”
“…….”
아무리 일부다처제의 세상이라지만 모녀가 한 남자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도덕이 땅에 떨어진 세상은 아니다.
남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부끄럽고 창피하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며 주아 누나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마냥 안 된다고 할 수 없도록 정화씨는 차근차근 빠져나갈 틈을 마련해 선수를 친 것이다.
‘내가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정화씨가 말하는 게 더 효과가 있겠구나.’
어제 나보고 나가있으라고 할 때 나가 있었다면 굳이 정화씨가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자지 않았어도 됐던 거 아닐까?
이래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나보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 국 다 식었겠다! 다시 데워줄게.”
“됐어!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었다고. 좀 식은 거 먹으면 어때.”
“그럼 어서 먹어봐. 맛있을 거야.”
아무래도 맛집에서 사온 음식인 듯 정화씨가 꽤 당당하게 음식을 권유했다.
교묘하게 자기가 한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드는 화법이 귀여웠다.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정화씨의 요리 솜씨가 대단히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달그락 달그락
정화씨의 변명을 듣고 누나는 머릿속이 복잡한지 밥을 먹으면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식사 자리에선 적막이 가득했다.
나는 후루룹 밥을 먹으면서 정화씨의 눈치를 살폈다.
어젯밤 지갑만 덜렁 든 채로 집을 나서야 했었을 정화씨가 새삼 걱정 됐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무섭진 않았나 모르겠네.’
하룻밤 사이에 풀릴 수 있는 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변명에 먹혀들어갔는지 사생결단 낼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궁리해봤다.
‘이대로 계속 눈치나 보면서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하나?’
과연 그게 최선일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너무 ‘지구식’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이미 아현이와 복순 누나의 경우로 경험해본 나이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낸다.
그러니 주아 누나와 정화씨도 시간이 흐르면 함께 잘 지내는 날이 올 거다.
아니, 오히려 모녀 관계이기에 남들보다 더 돈독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제 난….’
모.녀.덮…흡!
‘이게 된다고? 정말?’
주아 누나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쫄려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잘만 해보면 주아 누나와 정화씨를 한 침대에 눕히고 이렇고 저런 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버린 거다.
남자라는 생물체는 왜 이러는 건지.
이건 복순 누나와 아현이랑 3P를 한 것이랑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아 누나의 너그럽고 착한 심성이 아니었다면 정말 심각해질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슬며시 각이 나올 것 같으니 ‘모녀덮밥’이라는 단어에 제대로 꽂혀버린 것이다.
‘될까? 이거 되는 각 맞지?’
누나 가슴이 복사가 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누나나 정화씨가 화를 낼 것 같지도 않아.’
더군다나 이 아파트는 모녀덮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완벽한 방이 마련 되어 있었다.
‘태양이는 어떡하지?’
지금 당장 두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겨우겨우 각을 만들어내서 침대에 눕혔는데 태양이가 앙앙 울어댄다?
그런 참사는 절대 일어나선 안 됐다.
‘태양아, 아빠가 동생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오늘 아빠랑 미친 듯이 놀아보자!!’
애를 재우는 방법은 피곤해서 잠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놀아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문제라면 태양이가 이제 겨우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아가라는 점이다.
‘웃는 것도 힘든 일이니까, 배꼽잡고 웃게 하자.’
오늘 밤은 무조건 태양이가 꿀잠을 자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후다닥 밥을 먹고 씻고 나와 태양이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이쁜 내 새끼! 쪽쪽쪽쪽 오구 이뽀! 쪽쪽쪽쪽!”
“흐이애앵!”
“누굴 닮아 이렇게 예뻐? 누구 닮았어? 머? 아빠 닮아서 예쁘다구? 에이! 그럴 땐 아빠가 아니라 엄마 닮았다고 해야지! 아구 이뽀~ 세상에 이젠 손이 아빠 손가락보다 크네? 왜 이렇게 빨리 크냐~ 비행기 태워줄까? 아빠 비행기 타고 태양이 보러 왔는데, 태양이 비행기 타봤어?”
태양이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시간이 언제 가는지 알 수가 없어지곤 한다.
태양이를 번쩍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워주다가 까꿍 놀이를 하기도 하고, 주아 누나와 정화씨를 설득해서 산책을 나가는 등 활발하게 하루를 보냈다.
주아 누나와 정화씨의 냉전은 여전했지만, 태양이와 내가 가운데에 끼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지는 않을 수 있었다.
열심히 데리고 놀아줬던 보람이 있는지 태양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냅다 골아 떨어졌다.
목욕까지 했으니 아마 꿀잠을 자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불편했어?”
5분도 되지 않아 후딱 씻고 나와 침대에 풀썩 앉으니 주아 누나가 씻고 나와 화장품을 바르면서 말을 걸어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