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25. 비앙카 멜리사 실비아 (2)
* * *
오피스텔에 도착해 벨을 누르려다가 비앙카가 메시지로 알려준 비밀번호를 기억해내고 그걸 눌러서 안으로 들어갔다.
문 열어주는 것도 귀찮아서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비앙카를 속으로는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표정관리에 들어가니 감쪽같았다.
“비앙카~ 나 왔어.”
흥~ 흣…으응…하악! 아읏, 자기야. 잠깐만! 그만! 동생 왔어.
“…미친.”
방 안에서 들려오는 열락의 교성.
멜리사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친구랑 있으면서 나를 왜 부른 거야?”
잠깐 기다려! 나갈 테니까!!
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자기가 올 걸 뻔히 알면서도 남자친구를 보내지 않은 것은 뻔한 수작질이었다.
불만이 가득했지만 겉으로 표를 내지 못한 그녀가 불쾌감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가운을 걸치고 한창 그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게 티나는 얼굴로 나타났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미안미안. 원래 방에 있으라고만 하려는데 너 기다리다가 불이 붙어버렸지 뭐야.”
“그만! 듣기 싫어. 본론이나 꺼내. 가문에서 얼마나 진행 된 거야?”
“너한테 어울릴 만한 남자들을 골라 둔 상태야.”
“언니는 뭐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제 말해주는 거야!”
“처음에는 너한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가문에서 정해주는 남자들 모두 최상급이야. 네가 좋다고 만나고 다니는 애들이랑 다를 거 없는 수준이라서 네가 만나보기만 하면 마음을 바꿀 거라고 봤어.”
“…….”
역시 비앙카는 자신이 결혼하길 바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 이렇게 연락을 해줬다는 건 날 돕겠다는 뜻 아니야?”
“맞아. 널 도와줄 생각이야.”
“왜?”
“너한테 좀 미안한 일이 생겼거든.”
“미안한 일? 사고 쳤어? 돈 필요한 거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나마 좀 낫다.
뭘 빼앗길까 싶어 걱정이 가득하던 멜리사의 표정이 밝아지려던 순간이었다.
“본의 아니게 일이 이렇게 돼버렸는데, 미안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 너는 어차피 사귀다가 다른 애한테 넘겨줬을 거잖아? 나한테 양보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자기야~ 나와 봐. 내 동생 소개 시켜줄게.”
달칵
방금 전까지 비앙카가 교성을 내지르던 방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저 방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자연스럽게 비앙카의 옆에 섰고, 비앙카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요? 비앙카!! 지금 뭐하는 거야?”
“소개할게. 내 애인 진해솔이야.”
“안녕하세요, 투자자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게 될 줄 몰랐는데…. 반갑습니다.”
진해솔.
멜리사가 요즘 자신의 남자로 만들기 위해 부던하게 노력하고 있는 남자다.
곧 자신의 남자가 되어야 했던 진해솔이 비앙카의 남자친구라며 소개를 하고 있었다.
비앙카가 팔짱을 끼는 것을 허락하고, 이런 식으로 소개를 받는 게 쑥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한점의 불쾌감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비앙카의 남자가 된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서로 감정이 통해서 만들어진 관계였던 것이다.
절망감이 몰려온다.
“둘이 사귄다고? 애인 사이라는 거야? 비앙카 미쳤어?”
“정말 미안! 의도한 거 정말 아니야. 운명적으로 만났고, 서로한테 끌리고 있다는 걸 외면할 수가 없었어.”
“투자자시니까 충분히 화가 나실 만도 해요. 많은 돈을 투자한 아이돌이 여자를 만난다고 하니 불안하시겠죠. 그 문제는 저도 조심하겠지만, 비앙카가 손을 써주겠다고 했어요.”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해서…! 후우, 나 지금 머리가 어질어질 하거든? 도대체 뭔 상황인지 전부 설명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멜리사의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분노가 가득한 눈빛에는 살의까지 감돌고 있었다.
“해솔씨, 자리 좀 비켜줄래?”
“음, 괜찮겠어요?”
“네. 자매끼리 대화 좀 나눌게요.”
“…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저 불러요.”
“그럴게요! 고마워용.”
비앙카가 슬그머니 팔을 내려 진해솔의 엉덩이를 꽈악 움켜쥐었다가 톡톡 두들겼다.
어찌나 노골적이고 추잡스러운지 멜리사는 그걸 보자마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친언니만 아니었으면 주먹이 나갔을 거다.
어디 감히 고결한 그에게 더러운 족발을 내미느냔 말이다!!
진해솔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멜리사가 비앙카에게 달려들었다.
“꺄앗!”
후끈 달아오른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비앙카의 머리채부터 잡고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우 애석하게도 비앙카의 몸속에 들어 있는 분홍 곰돌이는 멜리사가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비앙카의 머리채를 잡기는커녕 멜리사가 도리어 머리채를 잡혀버렸다.
“이거 놔앗!!!”
“호호호! 누가 보면 먼저 덤빈 사람이 나인 줄 알겠다. 너야 말로 너무한 거 아니니?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 사람한테 머리채를 잡으려고 해?”
“죽여버리기 전에 놔. 놓으라고!! 뻔뻔한 년아!”
“와~ 언니는 충격이 너무 크다, 얘. 남들한테 남자 뺏기고 다니던 애가 왜 나한테는 팍팍하게 구니? 내가 손대지 않았으면 어차피 남한테 뺏겼을 남자잖아.”
비앙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노로 가득한 멜리사가 다시 한 번 비앙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아악!”
“너 힘으로 나한테 안 되거든? 좀 교양 있게 대화라는 걸 나눠볼 생각은 없는 거니?”
“이이익!! 당장 헤어져!! 헤어지라고!!”
“어차피 남한테 뺏길 남자, 언니가 먼저 챙겨가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아니꼬웠니? 미안한 마음에 가문에서 네 결혼 문제로 압박하는 거 막아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올 거야?”
“뺏기긴 누가 뺏겨!! 비앙카 네가 다 망쳐놨어!! 해솔씨는 내 거란 말이야!!”
“그건 네 혼자 생각이고. 해솔씨는 너한테 마음 1%도 없어. 같은 멤버가 고백했다며? 고백을 했다는 건 이미 그룹 내에서 정리 끝난 일이라는 거야. 괜히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정신 차리는 게 어떻겠니?”
비앙카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멜리사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멜리사에게 비앙카의 말은 기만이고, 조롱일 뿐이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 사람 사랑하는 거 알면서 접근한 거잖아!! 날 엿 먹이려고!!”
“아니야! 실수였어. 사랑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 마. 남자한테 관심 없잖아!!”
“해솔씨가 특별했어.”
“필요 없어! 네 사정 알게 뭐야!! 당장 헤어져. 안 그럼 평생 나 못 볼 줄 알아!!”
남자 때문에 가족과 연을 끊겠다?
비앙카가 노골적으로 실망이라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휴, 그렇게 열렬해?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딱 하루 정도는 너한테 양보해줄게. 지금부터 다음날 12시까지 둘이 사귀는 사이 해. 너랑 하루 사귀고 그 다음날부터 나한테 뺏겨주면 되는 거잖아. 그럼 아무 문제없는 거지?”
“미친년아!!”
겉으로는 진심으로 미안한 척 하던 비앙카 아니, 실비아가 격한 반응을 토해내는 멜리사를 속으로 비웃었다.
멜리사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헤어져!! 헤어지라고! 헤어지란 말이야!!!!!!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
“알았어, 알았어! 헤어지는 것부터 해야 된다는 거지?”
“야!!!!!”
“어머! 해솔씨 들었겠다. 교양 없이 소리는 왜 질러? 내가 그렇게 가르쳤니?”
“나한테 왜 이래!! 뭘 가져가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고! 말해.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해솔씨 옆에서 꺼져!!”
아무래도 멜리사는 비앙카와 진해솔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서 이어진 연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진짜 사랑해서 사귀는 거야. 이면에 다른 이유는 없어.”
“꺄아악!!!!”
비앙카가 아무런 의도 없이 진심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진해솔과 사귄다는 말에 멜리사는 더욱 더 절망했다.
“미친 거야. 너 돌았어! 아악!!”
꽈아악!
“언니한테 미쳤다니. 말조심해야지, 동생아. 진짜 이해를 못하겠다. 너야 말로 좀 심각한 또라이 아니니?”
사귀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집착과 미련을 전부 끊어내면서, 사귀기 전까지는 엄청난 집착을 보여주는 멜리사.
역시 그녀는 말로 설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훗,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실비아가 멜리사의 머리를 뜯어버릴 듯이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멜리사는 두피가 뜯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파!! 아프다고! 진짜 아파!! 꺄악!!”
“아프라고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마음껏 아파하렴.”
뚜둑!
기어코 무언가가 뜯겨지는 소리까지 들었다.
“복수할 거야!! 가만 안 둘 거라고!!”
고통에 비명을 내지른 멜리사가 악다구니를 쓰며 실비아를 향해 마구 손을 휘저었다.
두 여자가 말싸움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앉아 바깥 상황을 궁금해 하고 있던 진해솔이 못 들 수 없을 만큼 큰 비명소리였다.
? ? ?
“실…비앙카! 비앙카! 그만! 그만해! 놔줘! 뭐하는 거야, 지금!!”
바깥으로 나왔다가 두 여자가 머리채를 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걸 보고 기함했다.
황급히 몸을 날려 실비아를 멜리사로부터 떼어냈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긴 했지만, 먹혀 들어가는 공격은 실비아의 주먹밖에 없었다.
멜리사는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일방적으로 실비아에게 밟히고 있는 중이었다.
‘얘 싸움 잘 하네.’
감탄도 잠시.
내가 몸으로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고서야 서로를 향한 공격이 겨우 멈춰졌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왜 싸운 겁니까!!”
“내가 먼저였어요!! 내가 먼저였다고!! 흐어어어엉!!!”
머리는 산발에 울었는지 눈에는 화장이 지워져 시커먼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멜리사가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서러움을 토해냈다.
“저 도둑년이 뺏어갔어!! 해솔씨! 당장 헤어져요. 도대체 저게 뭐가 좋다고 사귄다는 거에요!! 네?”
“진짜 답 없다, 답 없어. 정 그렇게 싫으면 해솔씨랑 하루 사귀라니까? 너 원래 그랬잖아! 사귀면 흥미 떨어져서 버리잖아. 그러니까 하루 빌려준다는데 왜 지랄이야!!”
실비아는 정말 비앙카가 된 것처럼 위화감 없이 멜리사를 압박했다.
팩트로 폭행하는 게 제일 아픈 법.
멜리사는 실비아의 이죽거림에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오는 건 어린애의 투정 같은 발버둥이다.
“그게 어떻게 같아!?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사실 비앙카가 아니었다면 진해솔도 여타 다른 남자들과 같은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딱 사귀기 전까지가 멜리사가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어쩌자고!”
“헤어져!”
“싫어! 왜 너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데!!”
“투자 철회할 거야. 스캔들도 터트려 버릴 거에요!! 이래도 언니랑 사귈 거에요?”
멜리사는 비앙카를 압박하기 어려웠기에 대상을 진해솔로 바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
비앙카 아니, 실비아가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너 그런 짓 하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니? 해솔씨한테 해 끼치는 순간 넌 강제 결혼이야.”
“!!!”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멜리사.
나는 슬그머니 끼어들어 또 다시 과열 된 두 사람을 말렸다.
“비앙카, 그만해요. 두 사람 다 너무 흥분했어요. 진정하고 좀 더 이성적일 때 다시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언제까지 철없는 동생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건데? 이 정도면 충분히 배려해준 거야. 남자친구를 하루 빌려주는 거면 진짜 엄청난 희생 아니야?”
“아까부터 빌려주니 뭐니 그게 다 무슨 소리에요?”
나는 모르는 상황인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만약 내가 실비아와 진짜 사귀는 사이고, 여기에 주작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정말 큰 배려를 한 것이긴 하다.
어느 언니가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랑 사귀게 됐다고 하루 빌려주며 섹스해도 된다는 말을 선뜻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주작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실비아는 희생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쟤가 당신 좋아하잖아. 스토커처럼 쫓아다녔을 걸? 당신 그룹에 투자한 것도 당신 한 번 꼬셔보려고 한 거거든.”
“네?”
“비앙카!!!!”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쟤 남자를 먹고 버리는 게 취미야. 그래서 정 그렇게 억울하면 하루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다고 한 거야. 자기 거 되면 질린다면서 버린 남자가 산더미거든. 그래서 내가 그랬지. 하루 사귀고 버리면 내가 당신 주워서 잘 데리고 살겠다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충격을 받은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다.
‘잘한다, 분홍 곰돌이!! 더 도발해! 어차피 말로 설득하는 건 실패야.’
당연하지만 실비아의 비꼼에 제대로 독이 오른 멜리사의 눈이 다시 뒤집혀졌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녀는 날 포기할 것 같지 않아보였다.
“안 버릴 거야!! 왜 버린다고 장담하는데?! 계속 사귈 거야!”
“네가 잘도 그러겠다.”
“해솔씨!!! 저랑 사귀어요. 하루 말고 계속요!!”
멜리사가 내 옷을 콱 움켜쥐었다.
“투자자님!”
“하루만 사귀어도 질린다고 싫어할 거잖아. 괜히 자존심 때문에 그럴 필요 있어? 애초에 해솔씨는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니까?”
“없으면 만들면 돼!! 사귀어요. 비앙카보다 제가 더 잘해줄 수 있어요.”
“아니, 사귀는 게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소꿉장난 하자는 거 아니에요. 진짜 진심으로 사귀자는 거에요.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오래오래 사귀자고요!!”
“…….”
실비아가 멜리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진짜 도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사실 초반에는 멜리사에게 우리 둘이 사귀게 됐으니 네가 포기하라는 식으로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게 먹힐 줄 알았다.
그런데 실비아가 그러더라고.
멜리사한테 그런 설득이 전혀 먹히지 않을 거라고.
'긴가민가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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