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86화 (186/849)

〈 186화 〉 #25. 비앙카 멜리사 실비아 (3)

* * *

실비아가 말했던 것처럼 멜리사는 설득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좋게 설득하기 위한 계획만 세워두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오래오래 사귀자는 멜리사의 말에 나는 고민하는 척 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사귀죠, 뭐.”

“네? 사귄다고요?”

“해솔씨!!”

본인이 우기고 있었지만 진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멜리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멜리사가 내 말을 오해했는지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제가 말하는 사귀자는 건 비앙카가 말했던 말 장난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사귀는 거면 인정 못해요!”

“진짜 사귀자는 말로 한 말 맞아요. 비앙카가 한 말처럼 장난치려는 거 아닙니다. 이렇게 능력 좋고, 예쁜 여자가 사귀자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마다하겠어요? 더군다나 재벌인데.”

사실 마다해야 하는 게 맞다.

여자친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 아닌가?

물론 이 상황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면 말이다.

멜리사의 시선이 자연스레 실비아에게 향했다.

내가 비앙카 앞에서 당당하게 사귀겠다고 할 줄 몰랐던 거다.

쿵짝이 잘 맞았는지 실비아가 충격 받은 표정을 했다.

“해솔씨, 지금 나 놀리려는 거지? 진심으로 한 소리 아니잖아. 쟤 내 동생이야.”

“이제 와서 왜 그래요? 아까 전에 비앙카가 사귀어도 된다고 허락했잖아요?”

“그건 쟤가 떼를 쓰니까 한 소리잖아! 설마 진심으로 우리 자매랑 사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야?”

“그럼 안 되나요? 둘 다 내가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일반인도 아니고 무려 재벌인데. 더군다나 멜리사는 제 일이랑 많이 연관 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사귀면 지금보다 더 투자를 많이 해주지 않겠어요?”

“투자는 내 돈으로도 해줄 수 있어!”

멜리사가 내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해서 사귀자는 게 아니라 본인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사귀자고 하는 중인 걸 깨달은 것이다.

멜리사는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니까 선뜻 받아들이질 않는구나.’

나는 웹드라마 촬영을 할 때의 경험을 살려 재벌 자매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욕심내는 남자를 열심히 연기했다.

실비아도 내 연기에 훌륭히 맞장구를 쳐줘서 맛깔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내가 해줄 수 있다니까? 나로는 부족해?”

“음, 솔직하게 말하면 비앙카가 저한테 뭔가 해준 건 없잖아요. 멜리사는 투자만 해준 게 아니라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멜리사랑 사귀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건 변함없을 거에요.”

내 입으로 하는 말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뻔뻔한 태도였다.

놀라운 건 이 세계에는 이런 마인드를 가진 남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이들이다.

“더군다나 비앙카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같이 지내다 보면 감정이야 당연히 생길 테고, 아무래도 한 명보다는 둘이 좋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아까 멜리사씨가 협박 하신 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제 일에 문제가 생기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어요.”

“멜리사가 협박한 건 얼마든지 내가 막아줄 수 있어. 겁먹지 마. 나 못 믿어?”

“믿죠. 근데 당장 멜리사가 저희 회사 대표님을 찾아가서 저희 둘 사이를 말한다고 하면요? 그건 어떻게 막아주실 건데요?”

“!!”

코인을 사용한다면 한 방에 끝날 수 있는 일인데, 발품을 팔아 해결하려고 하니 일이 참 복잡해진다.

코인이 여전히 많이 남긴 했지만, 무한한 것이 아니기에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니 반드시 필요할 때만 코인을 써야 한다.

때문에 나는 계획있는 코인 지출을 계획했고, 그 계획 속에는 멜리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멜리사는 실비아가 있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절대 그런 짓 못해. 내가 보복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는 걸 쟤도 아니까.”

“전 만의 하나라도 조심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절 사랑하시잖아요. 어차피 한 여자만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이에요. 생판 모르는 여자보다는 동생이랑 한 남자를 공유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멜리사!! 너 계속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할 거야? 무슨 말 좀 해봐! 네가 만든 상황이잖아!”

내가 트롤짓을 하는 동안 멜리사가 이성을 찾았는지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언니가 먼저 제안한 일이잖아. 왜 내 탓을 해? 나랑 공유하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하, 그래서 협박으로 남자 사귀면 좋니? 자존심이 좀 지켜져?”

“협박이라니!! 난 언니가 제안한 걸 받아들인 것뿐이야.”

“네 협박 때문에 해솔씨가 겁먹고 너랑 사귄다는 거잖아. 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이해력 딸려?”

“시끄러워! 나중에 둘이 있을 때 얘기하고, 일단 해솔씨부터 보내. 우리 둘 사이에 끼워져서 이게 무슨 민폐야? 미안해요, 해솔씨. 오늘 일은 제가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흥분해서 할 말 구분 못하고 했어요. 정말 부끄럽네요.”

이성이 돌아 온 멜리사의 목소리는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가 날 바라보는 시선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확 깨겠지. 나도 다른 남자랑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멜리사의 머릿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콩깍지가 쓰여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콩깍지가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일로 ‘얘도 다른 놈이랑 똑같은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내 것을 빼앗겼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이성이 돌아오게 되면 ‘남자’ 때문에 자매의 사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겠지.‘

진해솔이라는 남자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가 과연 비앙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각종 이득보다 무거울까?

갑자기 나를 보내려고 하는 멜리사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멜리사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거다.

‘이제 실비아가 맞장구만 적당히 잘 쳐주면 끝나겠네.’

실비아도 이를 눈치 챘는지 멜리사가 보지 않은 틈을 타 내게 찡긋 윙크를 해왔다.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해결하겠다는 신호였다.

나는 실비아를 믿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작별인사를 하고 유유히 오피스텔을 나섰다.

오피스텔에 남은 두 사람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 상상하면서 말이다.

? ? ?

다음날.

­깔끔하게 해결했어요, 주인님!

“나 가고 무슨 얘기 한 거야?”

실비아로부터 전화가 온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두 사람은 새벽 늦게까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가 오피스텔에서 하루 잠을 잤다고 한다.

내가 빠지니 분위기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실비아는 멜리사가 오피스텔을 떠나고 나서 곧장 연락을 했다고 한다.

­어제 주인님이 찌질한 척 굴었던 게 효과 직빵이었어요. 벌써 주인님한테 정이 거의 다 떨어진 듯이 굴더라고요. 비앙카 기억으로 조사해보니까 보통 멜리사가 남자한테 정 떨어졌을 때 보여주던 반응이랑 비슷했어요.

“그럼 잘 된 거지?”

­네. 서서히 시들시들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신경도 안 쓸 거에요.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멜리사 아깝지 않아요? 섹스 한 번만 해주면 평생 개가 되었을 텐데요.

내가 섹스를 잘한다는 걸 얘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네가 있는데 굳이 멜리사를 둘 필요가 있어? 곁에 두기엔 피곤한 사람이야.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아.”

멜리사는 비앙카의 하위호환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실비아도 할 수 있다.

그저 하지 않고 있을 뿐.

그러니 실비아가 있는 한 멜리사는 내게 매력적인 여성이 될 수 없었다.

­후후후! 주인님이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시는 줄 몰랐는데…! 저 감동 받았어요!! 꺄악! 다음에 오피스텔로 꼭 놀러 오셔야 해요? 예쁜 속옷 입고 기다릴게용♡

“응, 절대 안가. 아무튼 잘 됐다고 해도 당분간은 신경 좀 써줘. 다 된 일에 재 뿌리는 일 없게.”

­주인님이 상을 주신다면 더 열심히 할지도?

“섹스해달라고?”

­아잉~ 알면서!

“떽! 또 손들고 있고 싶어?”

­히이잉!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고기 사줘서 퉁쳐야지.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소식을 듣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홀가분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늘은 어떻게 알차게 휴가를 보낼까~? 누구한테 연락하지?”

후딱 씻고 나와 옷을 입은 뒤 체크아웃 하기 위해 호텔방을 나섰다.

그런데.

“잘 잤어요, 해솔씨?”

“?!”

호텔문을 열고 나가려니 황당하게도 멜리사가 서 있었다!

다 해결 된 거 아니었어?

아니, 그 전에.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나는 숙소에 가지 않고 즉흥적으로 가까운 호텔을 선택해서 하루를 묵은 상태였다.

그런데 멜리사가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소름이 쫙 돋았다.

“어제의 일부터 시작해서 오늘 허락 없이 찾아온 것까지. 전부 사과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멜리사는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나눌 말이 없다고 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어제 했던 연기를 이어갈 필요를 느끼고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오셔서 많이 당황스럽네요.”

뭔가 알고 찾아 온 건 아니겠지?

이래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있나보다.

“죄송해요. 자꾸 사과할 일만 생기네요.”

“…아닙니다.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어제 일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신 거죠?”

“네. 어제 흐지부지 됐는데, 그렇게 끝낼 일이 아닌 것 같아서 확실하게 하려고 찾아왔어요. 물론 사과도 하고요.”

“아마 체크아웃이 얼마 안 남아서 오래는 못 있을 겁니다.”

“잠깐으로도 충분해요.”

총총 걸음으로 멜리사가 호텔 방에 들어온다.

“…….”

“…….”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멜리사와 나.

한 번도 이렇게 둘 만 있어 본 적이 없었기에 어색한 정적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멜리사였다.

“흠흠, 이야기 시작 전에 사과부터 하는 게 맞는 절차인 것 같아요.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진 상태라고 해도 그런 소릴 함부로 해서는 안 됐어요. 그날 일은 책임지고 보상을 해드릴게요.”

“…사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식으로 사과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제가 갑자기 그런 짓을 해서 많이 놀라셨죠? 진짜 황당하셨겠다. 쟤는 뭔데 언니랑 사귀는 거에 참견을 하는 건가 싶었을 거에요.”

“…….”

“자격도 없으면서 주제도 모르고 행동했어요. 어제 해솔씨를 돌려보내고, 언니랑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어요. 자매는 원래 좀 격하게 싸울 때도 있거든요. 싸우다가도 금방 풀리곤 하는 게 가족이니까, 비앙카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저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서 마음에 쓰였는데 다행이네요. 좋게 말로 해결을 했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찜찜한 마음이 컸거든요.”

형제 싸움도 아니고 자매 싸움이 그렇게 격해질 수 있다는 건 어제 처음 알았다.

멜리사는 어제의 일이 새삼 떠올랐는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부끄러워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자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수습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멜리사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어제 일은 없는 일로 하는 게 낫겠죠?”

“잊으신다고요? 아뇨! 그러지 마세요. 안 돼요.”

“네?”

“어제 일을 잊는다는 건 어제 했던 말도 전부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인 거잖아요.”

“그러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냥 잊고 깔끔하게 끝내면 안 되겠니?

내 속마음을 모르는 멜리사는 전혀 그럴 생각 없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다.

“그럴 수 없어요. 전 오피스텔에서 했던 절대 못 잊는단 말이에요!”

“...오피스텔에서 했던 말이요?”

거기서 내가 했던 말이 뭐였지?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잊지 못한다는 건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내가 곧장 떠올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자 답답하다는 듯 멜리사가 말했다.

“사귀자고 했던 거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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