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26. 아현테라피 (1)
* * *
실비아아아!!!!
내적 비명이 절로 튀어나온다.
연기하던 것도 잊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설마 진짜 저랑 사귀시려고요?”
“네! 어제 한 말 번복하실 생각은 아니죠? 분명 어제 저랑 사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안 된다고 하시면 안 돼요. 자존심 다 버리고 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인 거에요. 알겠죠?”
사귀자고 의향을 묻는 것도 아니고, 우린 사귀는 거다 라고 통보를 해오고 있었다.
‘실비아가 분명 관심이 사라진 눈치였다고 했는데.’
정작 나를 찾아와서는 사귀자고 한다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가? 혹시 몰라서 날 시험해보려고?’
순간 의심이 들어 멜리사를 유심히 살펴봤으나 그녀의 표정에서 음흉한 꿍꿍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멜리사는 지금도 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라는 듯 기대감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되지?’
이미 저질러놓은 일이 있기에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권력을 쫓아 여자를 만나는 남자로 각인 됐을 테니 말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녀를 거절할 방법을!
“갑자기 사귀는 사이가 되자고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사실 제키가 아직 멜리사씨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한 상태거든요. 나중에 그 친구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걱정 되고….”
“동료분의 일은 유감이지만, 이미 거절한 사람이고 저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죠. 해솔시랑 저랑 사귀는 만큼 많은 혜택을 보게 될 거고, 그분도 같은 그룹이니까 그 혜택에 영향을 받겠죠. 그걸로 충분히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대가를 주고 사귀는 게 괜찮은 겁니까?”
“네, 괜찮아서 여기 온 거에요.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해줄 수 있어요.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게 도와줄게요.”
“…비앙카는요? 비앙카랑은 얘기가 다 된 일 입니까? 어제 분명 싫어했던 것 같은데요.”
실비아가 있는 이상 우리가 사귀는 일은 없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어제의 업보가 있는 탓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워보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비앙카를 방패로 내밀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약점을 지적한 것인지 비앙카 얘기가 꺼내지자 멜리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우리 사이에 비앙카를 끼워 넣지 말아요! 이제 당신이 비앙카랑 사귀든 말든 상관 안 할 거니까요. 여기 왔을 때 이미 자존심 전부 버리고 왔다니까요?”
“죄송하지만 저한테는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애초에 멜리사씨랑 사귀겠다고 한 것도 비앙카 때문이었어요.”
내 말에 멜리사가 충격을 받았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럼 해솔씨는 비앙카가 저랑 사귀지 말라고 하면 안 사귈 거에요?! 내가 줄 수 있는 혜택들 받고 싶다면서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비앙카가 충분히 제게 줄 수 있는 혜택들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젠 왜 나랑 사귀겠다고 한 거에요?”
원망이 담겨 있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친다.
“비앙카가 한 말 때문에 화가 나서요. 질투심 좀 유발해보려고 한 겁니다.”
“!!”
“멜리사한테 저를 하루 빌려줄 테니 사귀고 헤어지라고 했죠. 그 말 듣고 나서 많이 속상했습니다. 비앙카가 다시는 다른 사람한테 절 빌려주겠다는 못된 말을 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당시에는 멜리사씨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게 멜리사씨한테 상처가 될 줄 알면서도요.”
“…!!”
진해솔 몸 나이가 젊어서 그런가?
어떻게든 멜리사를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다.
질투심 때문에 홧김에 저지른 충동적인 받아들임이었다는 것.
그런 거라면 충분히 어제의 내 행동에 설득력이 생긴다.
그리고 멜리사는 내 말에 거짓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거절 당했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왜 하필 비앙카인 거죠? 걔보단 제가 훨씬 낫다구요! 어제도 봤잖아요. 해솔씨를 빌려주겠다고 말하는 거! 그런 일이 이번만 있을 줄 알아요? 또 있을 수도 있어요. 원래 그런 애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
흔들리지 않는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멜리사가 자기 가슴을 쿵쿵 주먹으로 두들겼다.
“결국 끝까지 비앙카라는 거군요. 비앙카가 허락하면 나랑 사귀어주고, 허락하지 않으면 안 사귀겠다는 거죠. 결국 저는 어떻게 되든 비앙카한테 져버리게 되는 거네요.”
“멜리사씨와 저는 이대로 공적인 사이로 남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사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멜리사는 운이 좋은 거다.
괜히 비앙카처럼 걸려서 실비아에게 몸 뺏기고, 농락당하는 것보단 깔끔하게 공적인 사이로 남는 게 맞다.
‘좋게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자. 여기서 실비아랑 더 엮이면 걔가 언제 또 트롤짓을 할지 장담 못한다.’
남자는 나보다 더 찰떡같이 잘 맞는 남자가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이 정도로 설득했으니 포기할 때가 됐다.
“저야 말로 사과드릴게요.”
그런데 그때, 멜리사가 불길한 급발진을 했다.
“예?”
“지금 한 사과는 앞으로 해솔씨한테 사과 할 일이 계속 있을 것 같아서 그거에 대한 사과에요.”
“??”
“저 포기 못하겠어요. 아니, 포기 못해요.”
왜!! 왜 포기를 못하는데!?
다른 남자들한테는 싫다고 하면 쿨하게 떠났다며!!
“비앙카랑 계속 사귀세요. 저는 저대로 해솔씨를 최선을 다해 유혹할 거에요. 비앙카가 반대해도 저랑 사귀고 싶다는 말이 나오도록 말이에요.”
멜리사는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사실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제 재력을 탐내는 해솔씨한테 좀 실망했어요. 근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다른 남자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그냥 솔직하게 말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였을 뿐이에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속이 시원했던 것 같아요. 오늘 비앙카한테 질투심을 느끼게 해주려고 저를 이용했다는 걸 들었던 게 더 마음이 아팠어요.
“멜리사씨가 이러시면 제가 많이 곤란합니다.”
너가 많이 곤란할 거야. 그냥 그만하랄 때 그만해, 제발.
“그러니까 사과드린 거에요. 앞으로 제가 더 질척거리면서 해솔씨를 귀찮게 해드릴 것 같아서요. 해솔씨가 솔직했으니까 저도 솔직하게 말하는 거에요. 비앙카한테 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유혹해서 내 남자로 만들 거에요. 비앙카한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네요.”
멜리사가 상큼한 미소로 당당하게 콧대를 세우며 말한다.
그러다가 코 베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당신이 먼저 비앙카 때문에 절 이용했으니까, 저도 비앙카한테 이기기 위해 당신을 좀 이용할 게요.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죠?”
“…….”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할까.
실비아와 나의 작전은 완벽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실패했다고 해도 실비아에게 멜리사의 처리를 맡길 생각을 해선 안 됐었는데...
멜리사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 ? ?
멜리사가 돌아가고.
나는 곧장 실비아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모른 채로 내게 달려왔다가 상황 설명을 들은 실비아는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녀도 정말 몰랐던 일인 것이다.
“나는 포기했어. 그냥 네가 알아서 해. 비앙카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멜리사랑은 좋게 끝내보려고 했는데 고집이 황소고집이야.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정말 저한테 넘겨주시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알아먹잖아. 어쩌겠냐? 본인이 계속 거부하는데.”
배려 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본인이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데 내가 호구도 아니고 계속 봐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일단 나는 멜리사의 일에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 소중한 휴가를 그녀 때문에 이틀이나 날리게 생겼지 않은가?
실비아에게 멜리사의 일을 완전히 맡겨버렸을 때 생길 수 있는 기상천외한 온갖 나쁜 일들.
상상 이상의 일들이 펼쳐질 게 분명했기에 최대한 좋게 끝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확실하게 처리해드릴게요. 호호호호!! 다시는 주인님 앞에 나타나지 못할 거에요.”
“근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잘 해결 됐다고 했었잖아.”
“저도 그런 줄 알았죠. 주인님한테 엄청 실망했다면서 저한테 약 쳤거든요. 그래서 깜빡 속았지 뭐에요? 앙큼하기는! 걔도 진짜 어지간한 여우라니까요. 만만한 애는 아니에요.”
비앙카한테 지고 싶지 않아서 날 꼬셔서 복수하겠다는 사람이니 만만하게 보면 안 될 사람이기는 하다.
“너한테 전부 맡겼으니까 나중에 보고만 해줘. 어떻게 처리했는지. 단, 죽이는 건 안 돼. 적당선 조절할 수 있지?”
“네에~!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깔끔하게 처리할게요. 호호홋!”
믿음직스럽다기보단 어쩐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마녀 웃음이었다.
내게서 허락이 떨어진 탓에 실비아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작은 새끼 악마가 봉인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멜리사에 대한 생각을 냉정하게 끊어냈다.
'역시 재벌은 엮이면 피곤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내게 재벌은 똥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은 진리였다.
멜리사 때문에 피폐해진 정신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힐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행이지만, 나에게는 '힐링'을 해줄 수 있는 존재가 꽤 많았다.
태양이와 주아 누나 그리고 정화씨는 두 말 할 것도 없는 존재이고, 지금 내가 보고 싶어진 사람은 아현이었다.
“아현아, 시간 있어?”
전화를 걸어 아현이와 약속을 잡았다.
아현이를 품에 꼭 안고 둥가둥가 하다보면 힘들었던 정신적인 피로가 깔끔하게 해결 될 것 같았다.
당연히 되지!!
“어디야? 내가 갈게.”
네가 온다고? 나 작업실인데….
“작업실이면 학원인가?”
복순 누나가 개업한 학원에 마련 된 녹음실.
언제 시간 되면 가서 구경하고 싶었던 장소다.
더군다나 아현이와 나의 공동 작업실이지 않은가?
여태까지 아현이만 외롭게 사용하고 있었을 텐데, 나도 가서 작곡가답게 곡 녹음을 한 번쯤은 해볼 필요가 있었다.
응. 학원 맞아.
“마침 잘 됐네. 한 번 가서 구경하고 싶긴 했었거든. 우리 공동 작업실이잖아.”
그러게. 공동으로 구한 건데 나 혼자만 계속 쓰고 있어.
“이제 국내에 있을 거니까 자주 들려서 작업해야지.”
빨리와~ 기다리고 있을게! 너 없는 동안 내가 작업해둔 곡이 많거든? 와서 평가 좀 해줘!
“오케이! 딱 기다려! 당장 달려간다!”
토끼 같이 귀여운 아현이와 만날 생각을 하니 없던 의욕이 쑥쑥 솟는다.
결코 실비아, 비앙카, 멜리사는 해줄 수 없는 특별함이기도 했다.
***
쪽쪽쪽! 쪽쪽쪽! 쪽쪽쪽!
오랜만의 재회에 아현이와 나는 만나자마자 입술부터 붙였다.
한참 찐덕찐덕하게 키스를 나누다가 여기서 더 하면 팬티를 벗겨버릴 것 같아 힘겹게 입술을 떼어냈다.
“방음이 잘 되긴 하는데, 가끔 먹을 거 준다고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들어와서….”
“학원 사람들이랑은 언제 또 친분을 쌓아놨어?”
“언니가 소개시켜줬어.”
“잘했네. 아현이 너 혼자 작업실 쓰면서 외롭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내 우려를 복순 누나도 알고 있었던 건지 따로 부탁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현이를 위해 준비를 다 해놨던 모양이다.
나중에 복순 누나 만나면 잘했다고 찐하게 안아줘야겠다.
“오, 귀여워. 이 인형은 너 닮았다.”
녹음실은 생각보다 좁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리고 작은 인형과 화분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서 딱 아현이 또래의 여자의 방인 게 티가 났다.
“너무 나만 좋게 꾸며놨지?”
“아니아니. 난 꾸미는데 재능이 없어서 대신 해줘서 엄청 고마운데?”
“헤헷, 여기가 네 자리야.”
팡팡~!
아현이가 나 쓰라고 의자에 방석까지 만들어뒀나보다.
내 자리라고 하니 기쁘게 앉았다.
그리고 내 무릎 위를 톡톡 쳤다.
“??”
“뭐해, 이리 와서 앉아.”
“엣!?”
“앞으로 여기가 네 지정 자리임.”
“안 돼,나 무거워.”
“에헤이~ 빨리. 네 몸무게 하나를 못 견딜까! 붙어있고 싶어서 그래. 빨리빨리빨리! 나 숨 넘어감.”
내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현이가 움직였다.
살포시 내 무릎 위에 앉은 아현이의 허리를 두 팔로 한 가득 끌어안았다.
'이게 힐링이지.'
낯선 해외 땅에서 맞지도 않는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했던 나날들.
휴가를 얻고 돌아왔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와 스트레스를 준 멜리사까지.
아현이를 꼭 끌어 안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