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195화 (195/849)

〈 195화 〉 #27. 나의 주인님 (4)

* * *

“이제 뭐 가르쳐주실 거에요?”

“꺼져! 없어. 수업 끝났어!”

“아직 못 배운 게 많은데요?”

“시발!”

“왜 자꾸 욕을 하세요~ 저 상처 받아요!”

겉으로는 저렇게 까칠해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어대면 마지못해 자신의 노하우를 슬그머니 내어놓고는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우, 증말! 징글징글한 놈. 기다려봐!”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는 듯 선생님이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보고 공부해와.”

“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주는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공부한 책이라서 빼곡하게 각종 주석들이 달려 있다.

그 주석들은 이쪽 공부를 하는 학생에겐 꿀과 같은 족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책을 받으면 이걸 혼자서 공부해온 뒤, 선생님이 직접 실전으로 가르쳐주는 형식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진도가 쭉쭉 빠지고 있어서 선생님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

“가! 이제.”

“벌써요? 좀 있다가 갈래요. 선생님 일하시는 거 보고만 있어도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내 밑천을 얼마나 빼가야 속이 시원하겠냐!!”

“전부 다요! 다 가르쳐주세요!”

“쓸데없이 당당한 건 뭔데!”

회사에서 가르쳐주라고 했고, 선생님은 받아들였으니 나는 당당하게 가르침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가라는 선생님과 싫다는 나의 실랑이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결국 승리한 사람은 나였다.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데 선생님이 어쩌겠는가?

덕분에 오늘도 그에게서 몇 가지 노하우를 빼먹을 수 있었다.

탈탈 털린 선생님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하고 나온 나는 아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족보 또 구했다!]

[색시바니걸 : 꺅! 사랑해!]

[나 : 나를? 아니면 족보를?]

[색시바니걸 : 둘 다!]

아현이는 내가 뽑아 온 노하우를 어미새에게 먹이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받아먹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학원에서 배우는 내용은 부족한 면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가뭄에 단비처럼 실전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사람의 노하우를 쏙쏙 빼오니 차마 사양을 못하더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아현이는 내가 주는 정보들을 냠냠 잘 받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오늘 내가 만들어 온 곡도 아현이의 손길이 닿은 곡이다.

선생님은 진해솔 한 명을 키우고 있는 게 아니라 이아현이라는 제자를 한 명 더 키우고 있는 중인 것이다.

‘아현이랑 저는 한 몸이니까, 선생님이 양해 좀 해주십쇼!’

[나 : 오늘 족보 갖고 갈게!]

[색시바니걸 : 고마워. 곡은 어떻다고 하셔?]

[나 : 당연히 합격했지! 촌스러운 부분 싹 사라졌대.]

[색시바니걸 : 꺅! 너무 좋아! (폴짝폴짝 뛰는 토끼)]

[나 : 너 요즘 실력이 쑥쑥 늘더라.]

[색시바니걸 : 이게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나 : 흐흐! 고마운 건 침대에서…알지, 색시야? (윙크하는 늑대)]

[색시바니걸 : 아잇, 몰라아~! 변태!]

“귀여운 것.”

“누가 그렇게 귀여워?”

불쑥­!

“으억!”

아현이와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누가 한 말인지 확인하니 다행이 아는 사람이었다.

“선배님?”

“안녕!”

레드위치의 ‘다이아’ 선배님이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나에게 인사해온다.

아이돌이라면 그녀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이 있기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녀들이 존재하기에 아이돌이 가요계를 휩쓸고 다닐 수 있는 이유라고 말해도 될 만큼 대단한 업적을 가진 여자.

더불어 우리가 해외에 가 있는 동안 화려하게 컴백하여 가요계를 씹어 먹고 오신 분이었다.

“연애해?”

“아, 아뇨.”

“에이~ 그렇게 말을 더듬어버리면 거짓말 하는 게 티나잖아. 괜찮앙~괜찮앙~ 원래 그 나이 때엔 다 몰래몰래 연애하는 거양. 나도 옛날에 연애 많이 했당? 그래서…예뻐?”

“…네.”

이미 메시지를 하면서 히죽 웃는 모습을 들켰기에 끝까지 발뺌 할 순 없었다.

“히히히! 그치그치. 요렇게 잘 생긴 남정네를 차지한 여자는 어떤 여자래에? 아이돌이야?”

“아뇨. 그냥 알던 친구인데….”

“썸 타다가 요렇게 조렇게 된 거구낭?”

“네.”

“크~ 좋겠다아~ 나는 언제쯤 나한테 딱 맞는 남자를 만나나 몰라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으시잖아요.”

“내가 눈이 좀 높거든.”

레드위치의 다이아라면 남자들 사이에서도 동경의 대상이다.

그녀가 바란다면 손만 뻗어도 펄떡이는 활어처럼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남자가 없다니 의외였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흐흐흐흐, 내 이상형이 궁금해?”

“네.”

다이아 선배가 음흉하게 웃는다.

너무 예뻐서 그런 웃음을 짓는다고 음흉해 보일 리도 없는데 말이다.

헌데 이어진 그녀의 대답이 가관이다.

“내 이상형은, 야한 남자.”

“…야한 남자요?”

종갓집 아가씨 같은 단아한 얼굴을 가져놓고 하는 말이 야한 남자라니….

“응.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못난이에 뚱보여도 돼. 대신 날 침대에서 죽여줄 수 있어야 돼.”

“과연, 쉽지 않네요.”

요즘에 그런 남자가 살아 있기는 한가.

정말 희귀한 이상형을 가진 다이아 선배였다.

“그렇지? 요즘에 그런 남자가 어딨어? 다 초식이야. 초식. 난 풀때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평생 다이어트 때문에 풀 먹고 살았는데 침대에서까지 초식동물이랑 놀아야 되겠냐구우!”

다이아 선배의 이상형이 눈앞에 있습니다.

“혹시 아는 남자 중에 야한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성격이 더럽고, 못생기고, 돈 없어도 돼.”

“…글쎄요,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구에서는 남자들끼리 모였다 하면 여자 얘기, 야한 얘기를 하게 된다.

그건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남자가 여자 얘기, 야한 얘기를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여자 얘기가 나오면 ‘또야?’ ‘지겨워’ 정도의 부정적인 감정부터가 튀어나온다.

그들이라고 여자가 싫은 건 아니다.

실제로 제키처럼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먼저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너무 많은 수의 여자들에게 플러팅을 당하다 보니 지겨워진 거다.

“꼬옥! 꼬오오옥 좀 부탁할겡? 누나도 이제 결혼 할 나이야.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낳고 하고 싶단 말이양.”

“정말 그거 하나면 끝인 거에요? 다른 건 전혀 안 보고요?

“응응, 전혀 안 봐.”

“천하의 레드 위치 다이아 선배님의 남자가 그거면 된다고요?”

“그런 거 다 필요 없더라.”

“조건으로 하기엔 너무 쉬운 거 아닐까요?”

“난 그것만 있으면 돼. 잘 살 수 있어. 그리고 절대 쉬운 거 아니야. 내 평생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거든.”

세상에….

그때, 다이아 선배가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런 점에서 너는 어떠니? 싱싱해?”

“안 싱싱합니다.”

나는 매우 단호하게, 다이아 선배에게 말했다.

? ? ?

일요일

실비아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일요일 날의 아침이 밝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라는 걸 보면 다행히(?) 데이트를 하자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걔한테 사랑 받고 싶지 않아.’

실비아한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비앙카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나다.

실비아가 데이트를 하자고 조를 때마다 매우 단호하게 철벽을 쳤었다.

“다 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차를 보내주었기에 편하게 약속 장소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 택시를 탔으면 몇 만원은 줘야 했을 거다.

“오, 멋진데?”

잘 꾸며진 별장 같은 곳이었다.

도시만 보다가 이렇게 한적한 곳에 지어진 집을 보니 절로 힐링이 되는 듯하다.

‘여행도 나쁘지 않지.’

이런 곳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면 정말 재밌을 거다.

실비아한테 나중에 별장을 빌려달라고 하기로 하고, 벨을 눌러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안에서 무언가를 눌렀는지 문이 저절로 열린다.

어색하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려한 샹들리에.

그리고 그 아래에 시립해 있는 두 메이드…?

“어서 오세요, 주인님!!”

“어서 오세요, 주인님.”

“둘이서 지금 뭐하는 거에요?”

실비아와 멜리사가 완벽하게 메이드 복장을 갖춰 입은 채로 서 있었다.

내가 아는 멜리사가 저런 짓을 할 리 없으니 범인은 실비아가 분명했다.

“오늘 하루 주인님의 휴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적응 안 되게 왜 그래요?”

멜리사는 연습이라도 했는지 각이 제대로 잡혀 있는 90도 인사를 보여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둘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서 웃었다.

“보여줄 거 있다고 하더니 이게 보여줄 거였어요?”

나는 실비아에게 눈치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멜리사의 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해놓고선 한 달이 지났음에도 버젓이 내 앞에 나타나게 하지 않았는가?

잘 처리하겠다고 해놓고 전혀 잘 처리 되지 않은 상태였다.

“장난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누죠.”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털썩!

“!?”

갑자기 멜리사가 무릎을 꿇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발을 잡았다.

“왜, 왜 이래요?”

“신발 벗겨드리겠습니다, 주인님.”

“장난은 나중에요. 그리고 무릎 안 아파요? 꿇을 때 엄청 큰 소리 났는데.”

“주인님, 부디 제 손길을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최선을 다 해 모실 자신있습니다.”

“실, 아니 비앙카! 좀 말려!”

“주인님, 장단에 맞춰주시면 안 돼요? 정말 열심히 준비한 거란 말이에요.”

“장단에 맞춰서 뭐 어쩌려고?”

“재밌으실 거에요.”

하나도 재미 없거든?

신발을 나 혼자 벗었다간 멜리사가 눈물을 흘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발을 살짝 들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능숙하게 내 신발을 벗겨냈다.

‘기분 묘하네.’

다른 쪽 발까지 야무지게 신발을 벗겨준 그녀가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는 뒤에서 말릴 생각은커녕 흡족하게 멜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기 전까지 멜리사가 고개를 들일이 없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멜리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눈으로 실비아에게 물었다.

‘뭐하자는 거야?

‘후후후!’

실비아는 웃음만 보이고서는 나를 이끌고 어딘가로 안내했다.

“밥이네요.”

“맛있게 드셔주세요.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 음식이에요.”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식당이었다.

이 컨셉질로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차마 거절을 못하겠다.

“그래요, 먹으면서 얘기 나눠보죠. 도대체 이 장난으로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그러나 이것조차도 내 예상과는 달랐다.

식탁에 앉은 사람은 나 혼자였고, 그녀들은 내 양 옆에 시립하여 젓가락을 들고 내 입가에 음식을 나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환장하겠네.”

편하기야 편하다.

그런데 마음이 무지하게 불편하다.

실비아는 아까부터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고, 멜리사는 입을 잘 열지 않으며 철저하게 메이드에 몰입해서 행동하고 있었다.

‘좀 초췌해진 것 같기도 하고…?’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나한테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그녀가 다시 나타난 이유는 뭘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움찔­!

멜리사가 내 질문에 젓가락에 들고 있던 고기를 식탁에 떨어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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