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27. 나의 주인님 (7)
* * *
실비아는 분홍색 곰돌이를 꺼냈다.
비앙카가 깨어있다는 걸 연결되어 있는 실비아는 알 수 있었다.
“꼴사나운 걸 보여줘 버렸네. 창피하게…. 주인님 너무해.”
끝내 주인님은 무릎 꿇고 두 팔을 들어 올리는 벌을 주셨다.
실비아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벌을 받았다.
“먹히긴 한 것 같은데, 아예 봐주지는 않으실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비아는 분홍 곰돌이를 손에 들고 물었다.
“자기도 사람은 인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
“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인형인 내가 사람이 됐잖아. 너는 인형이 됐고.”
[…….]
곰돌이는 당연히 인형이기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혼잣말을 계속했다.
“주인님도 좀 지내다 보면 멜리사를 인정할 거야. 내가 정말 잘 가르쳤잖아.”
[…….]
“아까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거 너도 봤지? 절대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당황스러워서 그러신 거야.”
[…….]
“곧 적응하면 그분도 편하게 다루시겠지.”
[…….]
분홍 곰돌이는 대답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실비아에게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실비아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화난 거야? 아직도 네 동생을 구하고 싶어? 포기한 줄 알았는데.”
[……!]
“나한테 농락당하는 동생을 보면서 계속 화내다가 결국 포기했잖아. 인형이 됐는데 네가 뭘 어쩌겠어. 몸이 없는데.”
처음에는 울다가, 분노하다가, 애원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는 게 없어서 체념하고.
그 일련의 행동 끝에 비앙카의 정신력은 많이 깎인 상태였다.
“멜리사는 주인님께 처녀를 바치게 될 거야. 주인님은 싫다고 하셨지만, 결국 내 뜻대로 될 걸?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을 하고 계획한 거니까.”
[…….]
분홍 곰돌이, 비앙카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행복했다.
비앙카가 절규하고 있는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나도 함께할 거야. 이 몸도 처녀잖아. 주인님께 자매의 처녀를 바칠 수 있게 돼서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
[!!!]
절망하던 비앙카가 분노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이 짓밟고 있는데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늘 그렇듯이 분노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안 돼!!! 내 몸 돌려줘!!! 내 몸이란 말이야!!!’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체념한다.
실비아의 혀 놀림에 농락당한 게 한두 번인가?
더 이상 농락당할 힘도, 정신도 없었다.
“후후후.”
실비아는 비앙카의 뿌리 깊은 체념을 읽고 흐뭇해졌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었다.
예상 외로 주인님께서 많이 화가 나셔서 걱정이 되긴 한데 비앙카를 흔드는 것은 완벽하게 됐기에 실비아는 만족할 수 있었다.
사실 주인님이 멜리사를 받아들여도 상관없고, 안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비앙카만 모르면 되니까.’
한 몸이 되어 진짜 ‘사람’이 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할 수 있고, 완벽한 인간까지 될 수 있는 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비앙카의 정신력은 바닥이었다.
아까 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본 이후로 비앙카는 당장 융합을 시도해도 될 정도로 나약해진 상태.
실비아는 때가 머지않았음을 느끼며 분홍색 곰돌이의 귀에 예쁜 리본을 달아주었다.
“너도 그 순간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
아마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될 것이다.
실비아는 기대감을 담아 분홍 곰돌이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
실비아에게 벌을 내리고 멜리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멜리사는 내가 등장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맞이했다.
“주인님!”
“멜리사, 좀 어때요?”
“주인님께서 기다리라고 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분은 좀 어때요?”
“행복해요. 주인님을 오늘 모실 수 있는 거 맞죠?”
멜리사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배시시 웃는 얼굴에 색기가 가득하다.
꿀꺽
솔직히 동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멜리사를 데리고 엄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멜리사의 진짜 의지가 아니잖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의 멜리사는 이런 식으로 저랑 이어지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주인님을 모시려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멜리사는 여전히 순종적인 모습이다.
언제든 내가 바란다면 몸을 바칠 생각인 듯 했다.
내가 외면하고 있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멜리사는 실비아에 의해 정신이 개조되기까지 어마어마한 고생을 했을 것이다.
‘미안해 죽겠네.’
내가 잘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실비아를 너무 믿어버렸다.
그녀의 과한 관심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실비아에게 미룬 것이었기에 더 미안한 마음이 깊어졌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진심으로 절 주인님으로 모시고 싶은 건 아닐 거잖아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멜리사는 끔찍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실비아가 무서워서 내 말에 긍정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우리 둘 뿐이에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리고 얘기 들었어요. 멜리사씨 약점을 잡았다고. 내가 책임지고 전부 삭제하고 자유롭게 해줄게요.”
“약점 때문에 주인님을 모시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
멜리사는 실비아가 옆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한 달이나 걸려 만든 정신 개조를 하루만에 깨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그녀를 정상적으로 되돌려야만 한다.
‘그게 아니면 코인을 쓰던지.’
정말 코인을 안 쓰고도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게 가능한가?
‘신기하네. 이것도 재주로 쳐야 하나.’
표정으로는 멜리사의 말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와 보인다.
하지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가늠하지 못하는 법.
나는 멜리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닐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솔직히 말하면 멜리사가 이러는 게 부담스러워요.”
“…….”
“멜리사가 예전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고 자신 있던 그 모습으로. 지금 이 모습은 멜리사랑 어울리지 않아요.”
“…흑…흐흑! 저는…주인님께서…이러시면…어떻게 해야 할지…흑!”
으아악!
너무 섣불리 말을 했던 걸까?
내 말이 상처가 됐는지 멜리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적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말에 울 것까진 없지 않잖아!’
“왜 울어요.”
“저는 정말로 주인님을 모시고 싶어요. 그런데 자꾸 주인님이 제 마음을 의심하시잖아요. 제대로 모셔보지도 않고 의심만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서럽고 힘들어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날 모셔야겠어요? 그 모신다는 게 저랑 섹스하자는 말인데도요?”
“네!! 저 잘 할 수 있어요.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리고 언니가 갖고 있는 동영상, 제 약점 아니에요. 열심히 훈련 한 거에요.”
그게 약점이 아니라고?
‘환장하겠네. 답이 없다, 이건.’
멜리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주인님을 모실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럼 나랑 섹스한 후에 원래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겁니까?”
“한 번이요? 계속 모시는 건 안 되나요?”
멜리사의 간절한 눈동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해요.”
“…언니는 동의하신 건가요?”
당연히 그래야지.
“네. 동의한 겁니다.”
물어보지 않았으나 무조건 동의해야 할 거다.
이런 사고를 쳐놓고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 단언에 한참을 고민하던 멜리사가 어렵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드디어 멜리사가 딜을 받아들였다!
? ? ?
깜빡 깜빡
짹! 짹짹짹!
“아.”
얼굴에 떨어지는 따사로운 햇볕.
그리고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짹짹거리는 울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멜리사가 끄응,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몸에 기운이 없었다.
‘피곤하다.’
몸이 축축 늘어지고, 머리가 어질거린다.
감기에 걸린 걸까?
멜리사는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근육통이 있어서 누가 보면 거하게 운동을 하고 난 후라고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으음.”
고급스러운 이불 위에서 나른하게 스트레칭을 끝낸 그녀는 실내화를 신고 거실로 움직였다.
거실에 차려져 있는 간단한 아침식사.
토스트와 생과일 주스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들어 스케줄을 확인한다.
다를 것 없는 일상생활.
멜리사는 장장 한 달을 넘는 공백에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으며 문제없이 일상 생활에 녹아들었다.
띵동
“누구세요?”
이른 아침부터 찾아 온 방문객.
당황스러워하며 인터폰을 확인한 멜리사는 곧 안도했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방문객에게 물었다.
“비앙카!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잘 잤어? 컨디션은 좀 어때?”
“컨디션 별로야. 몸살감기 걸릴 것 같아.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는 거 있지? 이제 늙었나봐. 몸이 축축 쳐져.”
“그래?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지 그래.”
“귀찮게, 뭐 병원까지 좀 쉬면 나을 텐데. 토스트 먹을래?”
“아니, 아침 먹고 왔어.”
멜리사는 그 이후 비앙카와 평범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비앙카가 일 때문에 항상 바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멜리사는 왜 뜬금없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너무 궁금했다.
“이제 슬슬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왜 찾아온 건데?”
“부탁 하나만 하려고.”
“부탁을? 나한테? 흥미롭네. 언니가 나한테 부탁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말해봐. 이것도 기념인데 웬만하면 들어줄게.”
부탁이라는 말에 멜리사가 흥미를 보였다.
비앙카는 그녀보다 훨씬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네가 한 투자를 나한테 넘겨줬으면 좋겠어.”
“투자? 어디?”
워낙 많은 곳을 투자했기에 ‘투자’라고만 말하면 곧장 알아들을 수가 없다.
“허니 엔터에다가 한 투자 말하는 거야.”
“허니 엔터…내가 그런 곳에도 투자를 했었나? 잠시만 기다려봐.”
멜리사는 노트북을 켜서 투자 목록 정보에서 허니 엔터에 관련 된 자료를 모아 둔 파일을 열어 확인했다.
“에어플레인! 이 그룹한테 투자를 했었구나. 근데 이건 갑자기 왜? 언니랑 연관 될 이유가 없는 곳인데.”
“연관 있어. 내 애인이 그 그룹 멤버거든.”
“!!”
멜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쳤어? 진심이야?”
“진심이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가문 어르신들이 알면 절대 가만히 둘 리가 없는 조합이었다.
“아무튼 네가 한 투자 나한테 넘겨줘.”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언니랑 만난다는데 내가 어련히 잘 챙길까.”
“내 남자는 내가 챙겨. 너한테 그걸 왜 맡기니?”
“흠, 나 이거 진지하게 투자한 건데 그냥 넘겨야 해?”
“얼마 필요한데. 말만 해. 보상해줄 테니까.”
멜리사는 비앙카가 이렇게 나오자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진지하게 마음에 들었나보네. 됐어, 이 정도는 선물로 넘겨줄게. 언니 이제 처녀 떼겠네. 축하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근데 멤버 중에 누구야?”
“진해솔.”
멜리사는 진해솔이라는 말에 비앙카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얼굴 봤구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중에 만나서 괜히 건드리거나 아는 척 하지 마.”
“결혼까지 할 생각이야?”
“못할 거 있어?”
“!!”
결혼까지 하겠다는 건 정말 진심이라는 뜻.
“그럼 차라리 내가 도움을 주는 게 낫지 않아? 언니는 이쪽으로 인맥이 별로 없잖아. 내가 아는 인맥 돌리면 훨씬 잘 되게 할 수 있어.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해도 내가 해. 넌 손 떼. 그게 도와주는 거야.”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거야?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져?”
“싫어. 그냥 내 말대로 해.”
비앙카는 끝까지 멜리사의 권유를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멜리사는 비앙카의 뜻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칫! 그래, 언니 마음대로 하셔요.”
“고마워. 그나저나 요즘 좀 어때?”
“나? 별일 없어. 흥미 가는 남자도 없고, 일이야 뭐 언제나 승승장구 중이고.”
멜리사는 시큰둥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어쩐지 의욕이 전부 떨어지는 느낌이다.
무언가 꽉 차 있던 게 사라진 듯 텅 비어서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근래에 특별한 일이 딱히 없었던 걸로 안다.
‘그래서 휴가를 계획했던 건가?’
지난 한 달은 정말 지루하고 지겨운 나날들이었다.
그 무엇도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지금 생각해봐도 별 다른 추억이 없어서 생각나는 일조차도 없는 시간들이었다.
때문에 멜리사는 새로운 자극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곳에서라면 그녀가 바라는 새로운 만남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어서 이곳에서 떠나 여행을 가라고 부축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별 다른 일 없으면 다행이고.”
“새삼 그건 왜 물어? 혹시 가문에서 또 나 결혼시키려고 해?”
“그건 뭐 항상 그렇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슬슬 나이가 차니까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 언니가 잘 좀 막아줘. 이번에 투자한 거 언니한테 넘기는 걸로 그거 해주면 되겠다. 어때?”
“그러지 뭐. 아무튼 나 일 있어서 이제 가볼게”
비앙카는 더 이상 멜리사에게 볼 일이 없다는 듯 쿨하게 자기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말도 없이 왔다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 비앙카였지만 멜리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렇게 자기 멋대로 행동했으니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