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02화 (202/849)

〈 202화 〉 #28. 싱글 (4)

* * *

“싱글 앨범 곡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제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혹시 나랑 같이 작곡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같이 하자고?”

생각해보니 아현이와 공동 작곡을 했으니 제키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 같았다.

아현이와 하듯이 내가 영감을 받아서 제키에게 넘기면 그가 알아서 뚝딱 곡을 만들어주지 않겠는가?

문제는 혼자서도 작곡을 잘 하는 제키가 나와 같이 작업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왜?”

“우리 싱글 앨범 곡 준비하는 거니까 형이랑 같이 작곡하면 의미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형이 작곡하는 거 가까이에서 보고 싶기도 하고. 요즘 프로듀싱도 배우고 있다면서. 나도 형 도움 받아서 편하게 작곡 좀 해보지 뭐.”

“에이~ 너 엄살이 좀 심하다?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한 건데. 오히려 내가 네 도움을 받아서 편하게 작곡하는 거지. 네가 같이 곡 만들자고 하면 나야 완전 감사 할 일인 거지.”

“그럼 같이 하는 거다?”

“콜!”

제키와 주먹 인사를 나눴다.

“…저거 감당 못 할 텐데.”

경태 형이 그걸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 ? ?

결국 사단이 난 건 며칠 후였다.

“형! 저번에 보내준 거 마음에 쏙 들더라.”

“그럼 이제 드디어 시작하는 거냐?”

“아니. 조금만 더 해보자.”

“또?”

“형은 할 수 있어. 파이팅!”

“너 이러려고 같이 작곡 하자고 한 거였냐?! 그만 좀 털어!”

“형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어. 그걸 바닥까지 긁은 과정인 거야.”

처음에는 괜찮았다.

아니,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시키는 게 많긴 했지만 작곡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니, 왜 끝이 없냐고!!’

문제는 제키가 내게 요구하는 게 끝이 나질 않는다는 거다.

“도대체 곡은 언제 쓸 건데?”

“메인 멜로디가 나와야지.”

“하루에 몇 개씩 만들어서 줬잖아.”

“좋은 멜로디가 있긴 했는데, 계속 달라고 하니까 형이 더 좋은 멜로디를 가지고 오더라고.”

“…….”

결국 내가 내 무덤을 판 것이다.

“일주일에 형이 보낸 멜로디가 16개인 건 알아? 심지어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었어.”

제키가 숙제처럼 내준 것이라서 그렇게 많이 보낸 줄 몰랐다.

중심이 되는 멜로디 샘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기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무작정 찍어서 보냈고, 그 16개의 멜로디 중에서는 어중간 하거나 어딘가 들어 본 적 있는 멜로디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 16개 멜로디가 전부 제대로 된 멜로디는 아니었잖아.”

“형 입장에선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런 게 모이고 쌓이면 작곡가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되는 거야.”

“끄응.”

“우리 싱글앨범 노래 만드는 멜로디잖아. 좀 고생스러워도 결과물을 보면 분명 뿌듯해질 걸?”

제키는 나를 살살 꼬드겨 계속해서 멜로디를 뽑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런 행동이 본인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해 쓰이게 될 것들이기에 하기 싫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제키의 제안을 수락한 건 나이지 않은가?

“고생스럽겠지만, 조금만 더 해보자. 진짜 좋은 거 나올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보낸 멜로디가 쓸모는 있었어?”

“당연하지.”

고생스럽다고 포기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오히려 더 많은 멜로디를 생각해내서 제키가 더 이상 내게 숙제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나았다.

“도움이 된다니까 어쩔 수 없지. 근데 계속 멜로디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 기한이 있는데.”

“음, 그럼 다음 주까지만 할까?”

“…….”

툭툭!

“계속 고생해줘. 형 진짜 천재 맞는 것 같아. 하나같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멜로디였어. 까다로운 한피디님이 괜히 형을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니깐.”

좋은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곡가는 얼마든지 포텐을 터트릴 가능성이 높았고, 기왕 터트릴 거면 본인들이 부르는 노래로 터트리기를 바란다며 계속 나를 띄워주는 제키를 보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억지로 띄워주지 마. 안 그래도 계속 할 거니까. 뭔가 일이 진전 되는 것도 없이 멜로디만 계속 만들어오라고 해서 한 마디 한 거였어. 더 좋은 멜로디를 찾고 있는 거면 협조 해야지.”

“후우…그래, 일주일만 더 해볼게.”

“굿! 내가 진짜 기가 막히게 만들어줄게.”

제키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게 더 얄밉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만….

내 동의를 받은 제키는 그날부터 나를 더 빡빡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코인으로 투자했던 게 헛빵은 아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키의 스파르타에 금방 적응했다.

멜로디를 원하니 먹고 죽을 때까지 넣어보자 생각으로 떠오르는 걸 싹 다 만들어서 제키의 메일로 보내버린 것이다.

‘참 신기하게 짜내니까 짜지더라고.’

더 놀라운 것은 자주 오지 않았던 영감이 제키의 계속 된 숙제로 탄력을 받았는지 훨씬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50%가 넘어가면서 받은 능력은 그 능력과 관련 된 일을 하면 할수록 자주 활용을 할 수 있는 듯했다.

다만 영감이 매번 대단한 창의성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또한 그 영감을 이용해서 잘 버무리느냐에 따라 곡의 수준이 달라진다.

제키가 바로 이 부분을 잘 해냈다.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제키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내가 보내 준 멜로디를 섞어서 큰 줄기, 메인 멜로디를 뚝딱 만들어내서 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이 다르네, 달라. 내가 커피면 넌 TOP다.”

“그게 뭔 소리야?”

제키가 작업하는 걸 보고 있던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곳엔 TOP 커피가 없어서 내 말을 제키가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칭찬하는 뉘앙스라는 것은 알아차린 듯했다.

“너 잘 한다고.”

“어릴 적부터 밥 먹고 이것만 했는데 당연히 잘해야지.”

“언제부터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거야?”

“9살이었나? 그때가.”

“그렇게 어릴 때부터?”

“내가 남자니까 엄마가 날 바깥으로 잘 안 내보냈어. 하루 종일 심심해서 TV밖에 할 게 없는 거야. 그때 TV에 출연한 가수들 중에 남자 가수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도 가수를 하면 저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나봐.”

“그래서 아이돌을 지망한 거구나.”

남자아이를 바깥에 안 내보내는 가정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나도 아들을 갖고 있는 아빠로서 태양이를 함부로 바깥에 내보내는 것이 조심스럽기에 그 마음을 잘 알았다.

“응. 목적은 달성 된 거지. 연습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완전 짧아졌으니까.”

“보컬 말고 왜 래퍼가 된 거야? 작곡은 왜 시작했고?”

“어릴 땐 보컬이 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내 목소리는 영 보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 베이스가 형편없는데 가꿔봤자 뭐하나 싶었어. 그땐 시작했으면 무조건 스타는 되어 봐야 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내 목소리엔 경쟁력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랩을 시작했어.”

“랩도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나?”

“어려서 몰랐지. 보컬이 안 되면 래퍼다! 하고 배우기 시작한 거니까.”

“근데 너 목소리 좋은 편 아니야?”

내가 봤을 때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보컬을 포기했다기엔 제키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보였다.

“2차 성장 오면서 목소리가 확 바뀐 거야. 어릴 적에는 되게 듣기 싫은 목소리였어.”

“그럼 다시 보컬로 전향하지 그랬어? 그래도 충분히 잘 했을 것 같은데.”

“랩도 보컬만큼 매력적인 장르여서 푹 빠졌거든. 덕분에 작곡 시작했으니까 된 거지.”

랩을 배우면서 작곡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가사를 쓰다 보니 이 가사에 어울리는 멜로디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고.

“대충 스케치 끝났거든? 한 번 들어보고 부족한 점 지적 좀 해줘.”

“알았어.”

드디어 완성 된 곡이 틀어진다.

“…….”

“…….”

아직 스케치 단계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좋은데?”

“괜찮지? 나도 이거 만들면서 왜 이렇게 좋지? 했다니까.”

“어, 근데…잠시만.”

영감이 떠오른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었는데, 지금 이 노래를 들으니 놀랍게도 영감이 생긴 것이다.

나는 서둘러 작곡 프로그램으로 영감으로 받은 멜로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영감으로 받은 노래를 모두 만들어냈을 때.

제키는 말없이 지켜보다가 한 마디를 했다.

“…형 진짜 천재네.”

“그냥 좋은 노래를 들으니까 갑자기 떠올랐어.”

“확실히 비슷한 느낌은 묻어나온다. 이게 갑자기 떠올랐다고?”

제키는 현타가 오는지 허탈하게 웃으면서 내가 만든 곡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명곡은 순식간에 만들어진다더니, 이렇게도 노래가 만들어지는구나. 괜히 공동 작곡하자고 한 것 같네. 형한테 내가 방해였겠어.”

작곡가는 저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엄청나게 고뇌하면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영감을 받아 단숨에 써내려가는 스타일도 있다.

아무래도 전자의 경우인 사람에게 후자의 방법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만든 곡을 듣고 떠올린 거니까 우리 곡이지. 만약 네가 이런 곡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이 곡도 못 나왔어.”

사실 그가 손을 대서 만든 곡도 훌륭했지만, 내가 방금 만든 곡과 직접적으로 비교를 하면 누가 봐도 내 곡이 더 좋았다.

제키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려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선택할 것이다.

“한 번만 들어도 계속 그 멜로디가 생각나.”

내가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영감이라는 능력이 워낙 사기적이라서 그렇다.

“무조건 이걸로 가자. 형이랑 공동작곡해서 꿀 좀 빨겠다고 말하긴 했어도 진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지. 그리고 앞으로 네가 할 일이 커. 여기까지는 할 줄 아는데 곡을 마무리 하는 능력은 좀 떨어지거든.”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남은 건 나한테 맡겨. 사실 아까부터 손이 근질근질했어.”

피아노 하나밖에 안 입혀져 있는 곡이다.

이걸 제대로 된 곡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제키의 센스가 더해진다면 좋은 곡으로 탄생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료가 좋으니까 분명 대박 곡이 나올 거야. 싱글 앨범은 이 곡으로 밀어보자.”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얻은 요리사의 마음이 이럴까?

제키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사실 곡을 우리한테만 받는 게 아니기에 반드시 이 곡으로 하자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기 힘들다.

“맡겨주면 최고의 곡으로 만들어놓을게.”

하지만 제키가 저렇게까지 확신하고 있는 걸 보면 내가 방금 만든 곡이 괜찮은 편이긴 한가 보다.

“내가 더 할 건 없어?”

“곡이 뽑히면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주면 돼.”

나는 재료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프로듀싱 수업을 받을 때에도 아현이와 함께 숙제를 해왔기에 중요한 곡을 맡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키가 자신만 믿으라고 말해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오케이, 너만 믿는다.”

짜악!

죽이 잘 맞은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공동 작곡을 하면서 제키와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평소 나이가 어려도 워낙 진중한 성격이라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녀석인데, 작곡 얘기를 하다 보니 그제야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애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키와 공동 작곡을 하면서 곡을 잘 뽑았다는 말을 들은 아현이가 예상치 못한 경쟁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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