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28. 싱글 (7)
* * *
진해솔의 노래는 대박이 났다.
“진짜 저 하늘에 뜬 별이 됐네요.”
“뭔가 복잡 미묘하지?”
잘 된 일이었고, 축하까지 해주었던 그녀들.
하지만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미묘한 껄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대단한 아이인 건 알고 있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아이였으니까. 언니도 그거 알죠?”
“알지. 내가 가르쳐 온 연습생 애들이 몇 명인데. 그 중에 성공하는 애는 극소수야. 근데 해솔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딱 그 생각이 들더라. 얘는 여기서 데뷔 못해도 다른데 가서 무조건 성공할 애라고.”
“딱 봐도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저도 알아 봤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 볼 리가 없죠.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인데,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올라가버린 것 같아서 서운하고 조급하고 그래요.”
“사람들 눈에도 걔가 반짝반짝거렸을 테니까. 순리대로 된 거라고 생각해야지.”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더라고요. 한민영씨도 엄청 예쁘잖아요.”
왜 그동안 묻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신인 여배우 한민영.
사실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서 신인 여배우라고 하기 뭐한 입장이긴 하다.
아무튼 오랜 무명 시절의 한을 풀려는지, 기세를 받은 한민영은 요즘 각종 CF를 찍으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대세 여배우 정도면 해솔이랑 잘 어울리는 수준이야.’
아현이의 걱정은 그거였다.
급이 높아진 해솔이의 주변에 넘쳐나게 될 대단한 사람들.
반면 자신을 보아라.
초라하디 초라한 작곡 지망생이다.
하늘의 별이 된 해솔이와는 얽히는 게 힘든 수준 차이였다.
아현이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민을 로즈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해솔이가 이제 시시하다고 안 만나주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요.”
“그럴 애 아니잖아. 그냥 네 혼자 생각이야. 걔가 우릴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침대로 홀랑 들어서 납치하잖아.”
“…그거랑 그건 상관없는 일이죠. 해솔이야 워낙 성욕이 넘처 흐르는 애니까요.”
“젊음이 좋긴 해.”
야릇한 미소를 보이는 로즈.
아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자신의 고민에 동조해주지 않는 로즈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왜 진지하게 생각 안 해주는 거에요! 저 심각하단 말이에요!”
“내가 아는 진해솔은 자기 위치가 바뀌었다고 여자 버릴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그런 놈이었으면 내가 결혼하겠다고 이렇게 순순히 기다리고 있겠어?”
“그러고 보니 언니는 해솔이랑 결혼 약속을 해놨다고 했죠? 그래서 이렇게 당당한 거였어!”
“후후훗! 부럽니? 그럼 너도 해솔이한테 약속 받아. 결혼하자고. 걔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
“으으으!!”
7년 중 2년이 벌써 흐르고 몇 달 후면 3년째에 접어들게 된다.
이제 4년만 있으면 로즈는 결혼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조급함이 들긴 하지만,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진해솔이라는 대단한 남자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게 인내심인데, 그걸 못해서 일을 그르칠 순 없지 않은가?
나이가 30대에 접어든 자신과 달리 아현은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다.
아직 결혼을 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
다른 상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결혼을 얘기한들 현실로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만요, 그럼 한민영씨를 굳이 만나려고 하는 것도 그거 때문이었어요?”
한민영이 해솔과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진지한 관계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단순히 사귀는 것이 아닌 결혼은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당연하지? 가벼운 관계면 굳이 서열정리 할 필요 없잖아. 근데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깊은 관계라면 미리 안면을 익혀둘 필요가 있어. 그 여자가 자칫 앙큼한 짓으로 새치기를 해버릴 수 있으니까.”
“새치기요?”
“임신 말이야. 임신.”
“!!”
“해솔이, 못된 버릇 있는 거 알지?”
“아, 알죠.”
그와 잠자리를 한 여자라면 그걸 모를 수가 없다.
해솔이는 콘돔을 쓰지 않고 항상 안에다가 정액을 쌌다.
그래서 여자가 앙큼한 계획을 세우면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는 딱히 여자에게 피임을 했는지 따지는 성격도 아니지 않은가?
“미리 그런 부분을 정리해둬야 돼. 안 그러면 코 베이는 수가 있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다가 그 여자한테 홀랑 빼앗기고 나서 안 울 자신 있어?”
낯선 여자가 해솔이의 아이를 낳는다?
아현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찌르르, 쿡쿡 아파오기 시작했다.
질투심이 치솟는다.
도리도리!
격하게 고개를 저은 아현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꼴은 절대 못 봐요!! 이틀 뒤에 만나는 거 맞죠?”
“응. 겨우 잡았지. 어찌나 바쁘시던지, 얘기를 다 들은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이제 겨우 만나보겠다고 시간을 잡았으니까.”
대세 여배우라서 그런가?
시간 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도도하기가 어마무시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연습이라도 할래요!”
“다른 여자가 임신해서 나타나는 건 싫은가보네? 해솔이한테 미움 받기 싫다면서.”
“…죄송해요. 다신 그런 소리 안 할게요.”
“진짜 또 마음 변해서 만나지 말자느니 그런 소리 하면 혼내줄 거야.”
“네에! 잘 협조 할 테니까 연습 도와주세요.”
“연습을 한다고? 어떻게?”
“언니가 그 여자 대용해주세요. 제가 연기하는 것처럼 대사를 뱉어볼게요!”
“으이구~!!!”
로즈는 이 철없고 순진한 꼬마 토끼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골치가 아파왔다.
연습을 한다고 해서 실전에서 잘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당사자와 만나게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 말에 맞장구나 쳐.”
로즈는 믿음직스럽게 아현이의 걱정을 쳐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의기투합하며 한민영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단단히 준비한 두 사람은 몰랐다.
그녀들이 생각한 한민영과 진짜 한민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
“한민영이에요.”
“…….”
“…….”
압도적인 미모에 로즈와 아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딱 봐도 샵에서 받은 메이크업에 전문 코디의 손길을 탄 패션이었다.
로즈는 빠르게 그녀가 입은 옷의 가격을 스캔했다.
‘아주 제대로 힘주고 왔네? 기선제압 하겠다는 거지?’
로즈는 한민영 스캔을 끝내고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었다.
옆에 앉아 있는 아현이 바짝 긴장해 있었기에 덩달아 로즈도 긴장 되고 있었다.
그나마 절대 기선제압 당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그녀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중이다.
“로즈라고 해요. 시간내줘서 고마워요.”
“두 분 모두 해솔씨 애인이라는 거죠?”
“맞아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어요. 왜 나한테 연락을 한 거지 싶기도 하고, 해솔씨한테 따로 애인이 있는 줄 모르고 있어서요. 사실 아직 믿겨지지 않는 상태에요. 공인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잖아요. 만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해솔씨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죠.”
“해솔이한테 우리랑 만난다고 연락을 했나요?”
“아뇨. 안 했어요.”
로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잘하셨어요. 괜히 바쁜 사람 신경 쓰이게 할 필요는 없죠. 여자들 일에 남자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기도 하고요. 아직 해솔이랑 우리 관계를 믿을 수 없다면 증거를 보여드릴 수 있어요.”
“그냥 넘기기엔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 보니 확인을 해도 될까요?”
생각보다 까다롭게 나오는 한민영에 로즈는 보란 듯이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켜 보여주었다.
집에서 편한 옷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서 찍은 사진.
서로 뽀뽀를 하는 사진.
함께 손깍지를 끼고 있는 사진 등등.
애인 사이가 아니라면 나오기 힘든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안을 위해서 톡으로 사진을 보낼 순 없었어요.”
“확실히 이런 사진이 퍼지면 곤란해졌겠네요. 이젠 확실히 믿어요. 당신들이 해솔씨 애인이라는 거.”
“해솔이랑 인연은 촬영을 하면서 쌓으신 거죠?”
“네. 맞아요. 촬영을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났고, 저한테는 인생을 바꾼 만남이었어요. 그리고 해솔씨가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을 줄 몰랐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저는 그 사람이 저랑 만나주기만 하면 바라는 게 없거든요.”
한민영이 먼저 딜을 쳐온다.
‘만만치 않다 이거지?’
사귀는 사람이 더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부터 해버리는 한민영.
로즈는 속으로 한민영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확신했다.
그녀는 일부러 능글맞은 태도로 말했다.
“어머! 설마 저희가 해솔이랑 헤어지라고 할 줄 아셨어요? 그럴 생각 없어요. 그러려고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고요.”
“…….”
“오해하신 것 같은데, 긴장 풀어도 돼요. 그런 얘기 하자는 거 아니에요.”
“갑자기 만나자는 얘길 들어서….”
“해솔이가 좋아서 만나는 사람인데 저희가 뭐라고 그걸 막아요? 그럴 생각 없어요.”
“…….”
“다만 궁금한 게 있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얘기를 좀 나눠보자는 의미로 만나자고 한 거에요. 세상이 변해서 한 남자를 여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잖아요. 여자끼리 힘을 합쳐서 으쌰으쌰 잘 살아볼 생각을 해야지, 반목을 하면 쓰겠어요?”
로즈는 결코 먼저 화내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해솔이가 이 일을 알게 됐을 때,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될 거다.
반드시 진해솔과 결혼할 생각인 로즈는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자, 이제 나는 먼저 도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떻게 나올래?’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오간다.
그리고 마침내.
“다, 다행이다아~!”
“!?”
한민영이 크게 안도한 듯 숨을 토해낸다.
그와 더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른다.
“진짜 긴장 많이 했거든요. 그런 줄도 모르고…흑! 이러케 착하신 분인데에…제가 오해를 했어요. 흑! 해솔이랑 헤어지라고 하면 어떡해야 되나…흐흑! 저는 절대 못 헤어지거든요…해솔이가 없으면 저는 죽어요…흐으…흑!”
“…….”
“…….”
아니, 갑자기 왜 울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울려버렸다.
아현이가 화들짝 놀라서 로즈의 옷깃을 붙잡는다.
‘뭐야? 쟤 왜 저래?’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언니!!’
‘네가 좀 달래봐! 쟤 연기하는 거 아니야?’
‘저렇게 펑펑 우는데 저게 연기라구요?’
‘연기자잖아. 뭔들 못해?’
‘딸꾹질까지 하는데요?’
로즈는 당황스러움을 억누르며 손수건을 꺼내서 한민영에게 내밀었다.
“이, 이걸로 닦아요.”
“흐응…흐으응…! 감사해요. 인정해주셔서…흑흑!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가진 고운 분들이세요.”
“그…주변에 사람들이 보는데.”
“죄, 죄송합니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어서요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한민영이 선글라스를 쓰고 후다닥 화장실로 사라졌다.
자리에 덩그러니 남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뭐 어떻게 된 거에요, 언니?”
“어떻게 되긴 뭐 어떻게 돼? 이게 말로만 듣던 선즙필승인가? 나 제대로 당했어.”
“…그럼 서열정리는요?”
“몰라. 울어버렸는데 거기다 대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하니?”
“이제 어떡해요?”
“연기한 건 아닌 것 같지?”
“아닐 거에요. 얼굴 완전 빨개져서 우는데 진심인 것 같았어요.”
“하아~ 얘는 진짜 취향이….”
이아현이랑 사귀는 놈이다.
한민영도 이아현과 비슷한 과였던 거다.
생긴 건 세상 혼자 씹어먹을 것 같이 생겼으면서 성격은 순딩이라니!
로즈는 자신만 너무 풍파에 억세진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준비를 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만나는 거에 참견할 생각 없다고 하니 울어버린 여자인데, 서열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딱 봐도 한민영이 그녀들에게 지고 들어 올 게 분명하다.
더불어 진해솔과 진지해도 너무 진지한 사이인 것도 알 수 있었다.
로즈는 긴장이 확 풀려버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터놓고 얘기를 나눠보자. 다 쓸데없는 준비였어.”
“정말 그냥 대화 나눠도 되는 거에요?”
“어, 그래도 돼.”
로즈가 보기에 이아현과 한민영 두 사람은 쿵짝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았다.
‘나만 나쁜년이지. 에휴!’
로즈의 썩어가는 속내도 모르고, 이아현은 편하게 대화를 나눠도 된다는 소리에 얼굴이 활짝 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