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29. 주아vs로즈 (3)
* * *
“그래서, 어떻게 할래? 집으로 부를래, 아님 바깥에서 혼자 만날래?”
“…집으로 불러서 밥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해. 해솔이 얘기를 바깥에서 하는 것도 부담 되는 일이고.”
정화의 끈질긴 설득에 주아의 마음이 결국 흔들렸다.
“후후후! 잘 생각 했어.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려봐야겠다. 잔뜩 주눅 들면 네가 적당히 풀어줘야 해. 고양이가 쥐를 너무 구석에 몰면 쥐도 고양이를 물어버리는 법이야.”
“조절 잘 할게. 근데 엄마가 직접 요리할 생각인 건 아니지?”
주아의 말에 정화가 눈을 흘겼다.
“나쁜 기집애. 열심히 키워놨더니.”
“이젠 좀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엄마한테는 요리에 대한 재능이 없어.”
“흥! 너는 있는 줄 알아?”
“적어도 엄마처럼 파괴적인 요리는 안 해.”
어릴 적부터 요리 못하는 엄마 때문에 스스로 요리를 해먹곤 하던 주아는 대단한 실력은 아니라도 인터넷 레시피를 보며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 줄은 알았다.
물론 그 음식이 맛있는 수준인 건 아니지만,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수준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정화보다는 훨씬 나았다.
“호텔에다 요리 시킬게. 그럼 됐지?”
“응. 그날 태양이 뭐 입히지?”
“당장 옷 사러 가자. 태양이가 부쩍 자라서 맞는 옷이 없긴 했어.”
“그날 옷은 남자 아이 걸로 입혀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태양이가 남자인 것도 그 여자한테는 부러워서 미칠 일일 테니까.”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할 땐 마음이 찝찝했는데, 생각을 자랑한다는 것으로 바꾸니 괜스레 마음이 설레어진다.
어딜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바로 태양이다.
누가 데리고 가버릴까 무서워서 여자아이인 척 키우고 있을 정도로 귀한 아이.
그 아이가 진해솔의 아이라는 걸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처음으로 알려주는 자리.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그렇지?”
“응.”
이 아이가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하여 완벽하게 기선제압을 해버리는 거다.
도저히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때까지.
“엄마, 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생각 좀 해봤어?”
태양이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자신도 임신을 하고 싶다며 해솔을 졸랐다는 말을 들었던 정화다.
상대 여자의 나이를 들은 정화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섣불리 조언을 하지 못했었다.
주아도 혼자서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엄마에게 조언을 요청한 것이었다.
“아이는 여자한테 모든 거야. 그런 말도 있잖아. 남편이라는 단어의 풀이가 남의 편이라고. 근데 자식은 아니거든. 영원히 내가 편이 되어주고 싶은 존재야. 그런 존재를 갖고 싶다는데 네가 그걸 질투심 때문에 막는다? 가정이 절대 평화로워질 수 없을 거야. 더군다나 네가 반대를 한다고 해서 그 여자가 얌전히 피임을 하겠니? 임신은 임신대로 하고, 평생 속에 원한이 남을 걸?”
“그럼 역시 엄마도 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찬성할 뿐만이 아니라 도움을 줘야지.”
“…도움까지?”
조강지처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남자의 아이를 다른 여자가 갖겠다는 말에 동의를 해줘야 할 뿐만 아니라 돕기까지 하라고 하니 뒤통수가 얼얼하다.
“조강지처라는 게 그런 거야. 속은 썩어가도 겉으로는 고아한 척 해야 하는 자리거든. 그래야 존경을 받을 수 있어.”
“아빠 여자들이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주아가 어렸을 때엔 아빠의 여자들이 엄마를 만나기 위해 뻔질나게 집을 드나들곤 했었다.
그녀들 모두 엄마에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깍듯하게 존경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각자에게 삶이 생기고, 아빠의 관심보단 자식과 사는 게 더 중요해져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직접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과거의 엄마를 떠올리면 확실히 자신이 누구를 본받아야 할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근데 나는 상황이 좀 달라. 로즈 선생님 성격상 나를 존경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더군다나 내가 나이가 한참은 어리잖아.”
“그러니까 네가 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야. 확실하게 찍어 눌러서 기선제압을 한 다음에는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줘. 엄마가 옆에서 도와줄게.”
엄마가 도와준다면,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그 여자와 만나는 것에 해솔이가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콘서트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걱정을 드러내는 연락을 해올 정도니까.
때문에 주아는 이번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해솔이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주아 엄마 남정화라고 해요.”
진주아, 남정화 그리고 로즈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해솔이로부터 연락처를 받아 서로 간단하게 연락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약속 장소는 얼떨결에 진주아의 집이 되어버렸다.
아이 때문에 함부로 바깥에 돌아다닐 수가 없다는데 거기다대고 집으로 가기 싫다고 할 순 없었던 것이다.
첫 만남에 집으로 사람을 부르는 건 무척이나 부담 되는 일이었다.
‘아이 때문이라고 해서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로즈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가족사진 때문에 현관에서 멈춰 주춤해야 했다.
방문객을 까다롭게 검사하는 보안 좋은 고급 아파트.
그곳을 거닐며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로즈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기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로즈는 기가 팍 죽어버렸다.
떡하니 보이는 가족사진이 그녀를 위축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가 해솔이 아이…?’
이곳저곳 생활감이 묻어나는 아기 용품들도 뒤를 이어서 눈에 띈다.
로즈가 바라는 삶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욱신욱신!
질투심과 부러움에 가슴에 통증이 왔다.
저 사진 속에 미소 지으며 있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기 용품들이 이곳저곳 눈에 띄는 집도 자신의 것이어야 했고.
더불어 욕심도 불쑥 치솟았다.
‘나도 이런 집을 만들 거야. 그렇게 하고야 말 거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자.
일부러 진주아라는 여자의 일을 이아현과 한민영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 녀석들에게 말해봤자 호들갑만 떨고 도움이라고는 1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혼자서 일을 해결하고 당당하게 이번 일을 밝힐 것이다.
더불어.
‘임신 준비도 해야지. 차라리 나한테는 진주아가 있는 게 다행인 걸지도 몰라. 덕분에 해솔이도 아이 낳지 말란 소릴 못하고 있잖아. 기죽지 말자. 나도 이런 가정을 만들 수 있어.’
로즈는 어릴 적부터 집이 싫었다.
그녀의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농부였다.
한 번도 도시로 가본 적이 없는 그런 농부.
그러다가 우연히 시골에 놀러 와 하숙을 한 남자와 하룻밤 정을 통해 그녀를 낳았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하숙한 남자가 엄마를 책임져주는 일은 없었다.
‘난 박복순이 아니라 로즈야.’
어릴 적엔 농사짓느라 바쁜 엄마의 등에 업혀 키워지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을 때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농사를 도우며 자라났다.
그리고 엄마가 트럭을 몰고 그녀를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보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촌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예쁘고 곱던 신식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도 부러웠다.
복순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 싫었고, 나는 저 여자애들과 뭐가 다르기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19살.
그녀가 시골을 벗어나 독립한 나이.
그 나이 대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연예인들이 동경의 대상이었고, 가수가 되고 싶어 무작정 모아두었던 돈을 들고 수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노래를 배웠다.
그렇게 팍팍하게 살다보니 몇 년 후.
가수는 포기했지만, 노래는 곧잘 부른 덕분에 학원 선생님으로 취직을 할 수 있게 됐다.
굉장히 운이 좋았다.
자신을 가르친 학원 선생님이 주선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계속 가수를 목표로 쓸데없이 시간을 축내고 있었을 테니까.
도시로 올라와도 숨길 수 없었던 촌스러운 박복순은 도시에서 곱게 자란 아름답고 재능 넘치는 아가씨를 이기고 가수를 할 재주가 없었다.
가수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가꾸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시에서 사는 성공한 여자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열심히 걸어간 덕분에 꿈에 매우 가까워져 왔다.
가족사진 안에 있는 진주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덧대어진다.
해솔이의 무릎에 앉아 있는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가진 아기가 마치 그와 자신의 아기인 것만 같았다.
“이쪽에 앉으세요.”
“…상다리가 휘어지겠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
딱 봐도 전문가의 솜씨가 닿아 있는 요리였다.
“제가 한 건 아니지만 많이 드세요.”
“잘 먹을게. 먹으려고 온 건 아니지만.”
“다 먹고 살자고 이런 저런 일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주아와 로즈가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은 명백히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엄청 오랜만이지?”
“제가 회사를 나갈 때 마지막으로 봤던 것 같아요. 그게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죠. 회사에서 나와 학원을 차리셨다고 들었어요. 학원이 잘 된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늦었지만 개업 축하드려요.”
“고마워. 솔직히 회사에 있을 때가 편하긴 했어.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 없이 애들 가르치는 일만 하면 됐으니까. 학원 차리니까 모든 게 다 내 책임 아래에 있는 거라서 힘들더라. 그래도 이젠 자리가 잡혀서 오히려 전보다 편해졌어.”
“선생님 실력이 대단한 건 이 바닥 연습생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
두 사람은 현재의 관계는 싹 무시하고 예전의 관계를 꺼내와 대화를 나눴다.
로즈는 익숙하게 주아에게 반말을 하며 선생님으로서 대화를 나눴고, 주아도 그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덕분에 식사가 진행 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어머님은 안 드시는 거니?”
“엄마는 태양이를 봐주고 계세요.”
움찔!
“…이름이 태양이구나.”
“해솔이한테 얘기 듣지 않으셨어요?”
“응, 물어보기가 좀 뭐해서. 건강은?”
“다행히 아픈 곳 없이 잘 커주고 있어요.”
아기는 때때로 이유 없이 열이 오르고 아프기도 한다던데, 태양이는 그런 일 없이 튼튼하게 자라주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태양이의 얘기가 나오자 주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엄마의 미소였다.
“고생 많았겠다. 어린 나이에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
“젊은 게 벼슬이라고, 건강하니까 문제없었어요.”
젊은 게 벼슬이다.
그 말은 로즈에게 꽤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일.
로즈가 능구렁이처럼 반격을 해왔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 너도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해솔이에게 분명 자신이 임신하고 싶다고 했다는 걸 들었을 거다.
젊은 게 벼슬이라면 얼마든지 그 벼슬 양보하겠다.
자신은 이득만 취하면 된다.
이것이 로즈의 마음가짐이었다.
“여전히 몸매가 굉장히 좋으세요. 요즘에도 운동 꼬박꼬박 하시죠? 늘 건강하신 모습 보기 좋아요.”
“어머, 그럴 리가. 운동으로 나이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니. 가는 세월에 장사 없어. 겉은 괜찮아 보여도 속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거든.”
“…….”
주아는 생각했다.
한 방 먹었다고.
다른 때 같았으면 나이가 젊다는 건 그녀의 무기가 됐겠지만, 지금은 아닌 듯했다.
적어도 ‘나이’를 무기로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대 앞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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