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29. 주아vs로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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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애앵 흐애애앵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무렵.
방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로즈는 주아와 신경전을 버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기 울음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태양이가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라서요.”
주아가 주방으로 가서 분주하게 분유를 탔다.
로즈는 능숙하게 분유를 타는 주아를 묘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아이, 한번 볼 수 있을까?”
“태양이를요?”
로즈가 먼저 태양이를 보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던 주아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왜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었으면 절대 좋은 마음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금세 지워버렸다.
“사실 가족사진 봤을 때부터 직접 보고 싶었어. 해솔이를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정말 궁금했거든.”
“실제로 보면 놀랄 거에요. 정말 많이 닮았어요.”
잠시 후, 그녀는 방 안에서 태양이를 데리고 나왔다.
분유를 식히면서 태양이를 능숙하게 안고 있는 주아의 모습은 ‘엄마’ 그 자체였다.
“아…세상에.”
눈을 떼지 못하는 로즈를 보며 주아는 조금 뻐기듯 말했다.
“해솔이를 많이 닮았죠? 벌써 엄마 아빠를 알아봐요. 해솔이가 재능이 많잖아요. 태양이도 그런 해솔이 장점을 닮은 것 같아요.”
“남자아이인 거지? 남자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예뻐서 여자아이라고 오해 받겠다.”
“차라리 그게 더 안전한 것 같아서 굳이 부정은 안 하고 다녀요.”
“하긴, 이렇게 예쁜 아기인데 걱정이 될 만도 하겠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손가락이 엄청 작아.”
로즈는 태양이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모습은 진심이 가득했고, 꾸민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태양이도 자신을 예뻐하는 로즈가 마음에 들었는지 방싯방싯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안기고 싶어졌는지 팔을 뻗기까지 한다.
주아는 슬쩍 태양이의 팔을 붙잡아 로즈에게 결코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태양아~ 맘마 먹어야지.”
적당히 식은 분유를 태양이의 입에 물렸다.
이제는 많이 자라서 예전보다 밥을 먹이기가 훨씬 편해졌다.
태양이 스스로 분유통을 들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긴 것이다.
물론 깔끔하게 먹는 건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태양이의 턱받이로 능숙하게 흘러내리는 분유를 닦아내면서 밥을 먹이는데, 그 모습을 로즈가 황홀하다는 듯 바라본다.
‘애 밥 먹이는 모습일 뿐인데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부담이 됐던 주아는 이만 태양이를 엄마에게 맡기기로 했다.
“엄마, 태양이 좀.”
“…응.”
일단 태양이를 보여주며 기선제압 하겠다는 건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아예 다 실패한 건 아니고, 그녀에게서 부러움을 사는 건 성공했다.
주아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태양이를 보는 로즈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이제 얘기를 좀 나눌까요?”
“그래, 서로 할 말이 많지?”
“대화를 나누기 전에 호칭부터 정리를 좀 할게요.”
“…호칭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웃긴 일이잖아요. 로즈씨가 제 선생님인 것도 아닌데, 시작부터 호칭 때문에 관계를 헷갈리게 만들지 말아야죠.”
“하, 로즈씨라….”
로즈는 진주아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 깍듯하게 대우를 해줘서 마음을 좀 놓았는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니 기세가 생각보다 훨씬 사나웠다.
“그래, 그러는 게 깔끔하긴 하겠다. 혹시 내가 반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니? 존댓말 할까?”
“그 정도는 괜찮아요.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그 정도 배려는 해드려야죠.”
“…참 고맙네.”
빠드득!
‘참자. 지금은 참아야 할 때야.’
로즈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에 한껏 미소를 지어냈다.
한편, 진주아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도발에 로즈가 쉽사리 넘어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그런 소릴 들었는데도 웃는다는 건 결국 자기가 바라는 걸 얻어가겠다는 뜻인 거야.’
현재 로즈가 바라는 것은 해솔이의 아이를 낳는 것일 거다.
주아에게는 아직까진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본다니.
눈앞에 로즈가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자꾸만 혈압이 오르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반대할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해솔이는 이 집에서 사는 거야?”
“스케줄이 있을 땐 숙소에서 지내는 편이에요.”
그 외의 순간에는 이 집에서 지낸다는 말을 돌려서 대답한 것이었다.
로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해솔이랑은 어쩌다가 사귀게 된 거에요? 전 해솔이 상대가 제가 아는 사람인 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상상도 못한 상대였거든요. 가르치던 학생을 건드리는 건 도덕적으로 걸리는 일 아닌가요?”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건 분명 도덕적으로 지적할 부분이 존재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가 적어도 10살 이상은 난다.
‘로즈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들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 소문이 진짜였을지도 모르겠어.’
해솔이가 허니 엔터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던 소문들이 있다.
그녀가 남자 연습생들을 건드리고 다닌다는 거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고, 워낙 별의 별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곳이었기에 듣고 돌아서서 잊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었고, 때마침 필요할 때 불쑥 튀어나왔다.
“해솔이를 내가 가르친 건 맞지만, 내가 학교 선생님인 것도 아닌데 도덕적인 문제로 욕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더군다나 해솔이가 미성년자인 것도 아니잖니?”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그렇게 연습생 애들을 건드리고 다니신 거군요.”
“…뭐?”
로즈의 정곡을 찔러오는 주아의 말에 당황했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알지? 하는 표정이 저도 모르게 지어졌고, 정곡 찔린 표정을 본 주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이쪽 업계가 좀 좁잖아요. 로즈씨가 어린 남자애들을 만난다는 게 연습생들 사이에선 비밀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더 걱정이 됐어요. 아무래도 해솔이는 회사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돼서 그런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든요.”
“여자랑 남자가 만나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연애 경험 있는 게 큰 흠이 되어야 하는 거니? 나만 그렇게 도덕적이어야 해?”
“남자를 만났다 게 문제가 아니에요. 부적절한 대상과 만났다는 게 문제인 거지. 해솔이한테 진심이긴 한가요?”
울컥!
로즈는 진주아의 수위 센 지적들에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큰 목소리를 내며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화를 꾹 눌러 참았다.
3번을 참으면 살인을 면한다는데, 오늘 그녀에게 필요한 인내심은 고작 3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진심이지. 해솔이를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다른 남자한테 한 눈 판 적 없고,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 일을 해본 적도 없어. 내 마음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런 걸 물어 볼 자격이 있어요. 태양이 엄마니까.”
“해솔이 아이를 낳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나도 할 수 있고, 다른 여자들도 언제든 덜컥 임신해서 나타날 수 있는 일이야. 너무 기고만장 하지 마. 어려서 피임 실수를 했다고 어떻게 둘러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일부러 임신한 거 맞지? 해솔이를 붙잡기 위해서.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니?”
“!!”
데뷔를 하고 그녀가 예상한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된 진해솔.
엄마와 섹스를 하고,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다니는 걸 보는 게 마음 아팠지만, 그럼에도 믿음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태양이라는 확실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는 태양이를 수단으로 쓰고 싶지 않다고 가증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주아는 이미 태양이를 진해솔을 잡는데 사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날 만나고 감정적이 된 모양이네. 오늘은 이만 가볼게. 서로 상처만 받고 제대로 된 얘기가 안 될 것 같아. 그렇지?”
주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에게 잘 해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이성을 잃었다.
그녀를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됐는데!
“후우, 아뇨. 감정은 지금도 충분히 추스를 수 있어요. 계속 얘기하시죠.”
“뭘 더 얘기해야 해? 해솔이한테는 그냥 서로 밥 잘 먹고 헤어졌다고 하면 되잖아. 해솔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거북스러운 사람이랑 보고 살 필요 없어. 그냥 서로 없는 것처럼 살자. 그것도 방법 중에 하나야. 안 맞는 성격을 굳이 꾸역꾸역 맞춰가며 보고 사는 거, 촌스러운 고집이지 않니?”
“싫어요. 감정이 쌓였으면 풀어야지, 그걸 왜 계속 쌓아두고 사나요? 그렇게 서로 외면하고 산다고 정말 외면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해솔이랑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이 거슬릴 거에요. 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확실하게 오늘 관계를 정리해요. 저는 태양이 엄마이자 해솔이 첫 번째 여자로서 확실한 제 자리를 인정 받고 싶어요.”
보통의 경우에는 결혼을 누가 먼저 했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질 것이다.
하지만 진해솔의 사정이 그게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합의를 하여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다.
“아이를 낳은 걸로 너무 과한 대접을 바라는 건 좀 아니지. 나한테 그렇게 대접 받고 싶니?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땐 어떻게 관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 건데?”
“제 말을 오해 하신 것 같은데, 아이를 낳은 걸로 대접 받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누려야 할 온당한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거였죠. 처음부터 로즈씨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절 무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겠죠. 나이가 어린 건 맞지만,해솔이의 첫 여자는 저에요. 그러니 서열은 제가 더 높아야 하는 게 정당한 거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직접 해솔이한테 누가 네 첫 여자냐고 물어 본 적 있어?”
“지금 누가 해솔이랑 먼저 잤는지 날짜 따지자는 거에요?”
“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자꾸 처음이니 뭐니 그런 소릴 하니까 내가 오해를 하는 거잖아.”
“제 말을 꼬아서 해석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절 이상한 사람 만들면 곤란해요. 나중에 억울해지지 않게 대화 녹음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녹음? 법정 증거로 제출이라도 하게?"
"그럴 일이 있으면 해야죠."
“너 되게 예의 없는 스타일인 거 아니?”
“그쪽도 만만치 않거든요?"
진정이 좀 되는 것 같다가도 대화를 시작하면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이 두 사람의 사이가 진정이 된 것은 진해솔이 집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해솔아~!”
“해솔아!”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퇴근 시간이라 차가 엄청 막히더라고요. 두 사람,얘기는 잘 나누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 온 진해솔을 향해 두 암사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것마냥 눈을 반짝였다.
? ? ?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긴 했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 분위기는 더 좋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감정싸움이 내가 예상한 것보다 거셌던 모양이다.
“제가 올 때까지 계속 그렇게 싸웠어요?”
“응.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태양이가 눈치를 다 보더라니까? 애가 뭘 안다고….”
스케줄을 하고 온 탓에 진한 화장을 하고 있어서 그걸 지우느라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정화씨가 쪼르르 달려와서 현장 분위기를 내게 속닥여주고 있었다.
나도 엄청 궁금해 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그녀의 속살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복…로즈 누나는 언제부터와서 저러고 있는 건데요.”
“5시쯤 왔어.”
“지금 7시니까 거의 두 시간을 싸운 거네요?”
“밥 먹을 때까진 화기애애했어. 그러니까 대충 뺄 거 빼면 한 시간 정도?”
“큰 소리 내거나 몸싸움을 하진 않은 거죠?”
“응. 두 사람 다 보통이 아니야. 내 딸이지만 독하더라. 서로 앉아서 팔짱 낀 채로 독한 소리를 웃는 얼굴로 하는데, 넘 무서워쪄.”
“오구~ 무서워쪄요? 근데 정화씨도 관련자잖아요. 딸이 싸우는 동안 뭐 했어요.”
그녀도 내 여자다.
두꺼운 메이크업을 지우고, 이빨까지 모두 닦은 뒤 정화씨의 허리를 휘감아 입술에 뽀뽀를 쪽 날렸다.
하루의 피곤이 사르르 사라진다.
“나는 태양이 돌봤지.”
“아하~ 태양이 때문에 주아 누나를 도와주지 못한 거군요.”
“사실 걔가 난 참견하지 말라고 했어. 주아 의견을 존중해서 끼어들지 않은 거야. 만약 몸 싸움이나 목소리가 커졌으면 나도 나가서 말렸지. 아슬아슬한데 아직 서로 선을 지키고 있어. 문제는 서로 이미 꽁해질 대로 꽁해져서 풀리는 게 불가능해져버렸다는 거지만 말이야. 이럴 땐 둘이 내버려두면 절대 못 풀어. 네가 나서줘야 해.”
눈웃음을 살살 부리며 내게 달라붙는 정화씨.
아무래도 지금 하는 게 베갯머리 송사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베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녀는 내 귓가에 슬그머니 자신의 바램을 전달했다.
“기왕이면 주아 편을 좀 들어주면 더 좋고.”
“하하,일단 보고요. 두 사람 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네 편, 내 편이 어딨겠어요?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제가 바라는 일인데요.”
스케줄만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같이 자리를 했을 텐데.
굳이 자신을 빼고 먼저 만나야겠다고 우겼던 두 사람이 생각만큼 대화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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