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30. 콘서트 준비 (5)
* * *
나는 멤버들에게 차분히 내 생각을 전파했다.
장은새 안무가의 가르침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건 확실히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동안 배운 것들도 충분히 많다.
이젠 그 배움을 응용할 차례가 아닌가 싶었다.
우리의 춤 솜씨는 이미 한층 성장하지 않았나?
‘장은새 안무가가 없어도 우리끼리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단 말이지. 배울 건 다 배웠잖아.’
그녀가 괜히 나에게 대회 출전 제의를 한 게 아니다.
그만큼 내가 가르침을 흡수하는 속도가 빨랐다.
해서 나는 장은새 안무가가 없어도 콘서트 무대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 상태였다.
“우리끼리 해보자. 안무 다 나왔잖아. 장은새 안무가가 계속 우릴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희롱 당하는 걸 억지로 참는 것도 곤욕스러웠잖아.”
“전문가 손을 탄 거랑 아닌 거랑 차이가 큰 건 너도 이번에 느꼈잖아. 실력이 좋으니까 다들 참고 있는 건데….”
“처음은 참고 배워야 할 만큼 우리 춤 솜씨 수준이 별로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더군다나 계속 장은새 안무가한테 배우면 우리 느낌이 전부 사라질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장은새 안무가한테 배우면서도 나는 그게 좀 싫었거든. 그 사람 춤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춤에서 우리 느낌이 사라지는 게 싫었어.”
“우리 느낌…? 그런 게 있었냐, 우리?”
“당연히 있지! 팬들도 아는 건데 설마 형은 몰랐어?”
그녀가 추는 춤은 대단하지만, 마냥 똑같이 춘다고 해서 좋은 춤이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팬들이 바라는 무대는 장은새 안무가를 닮은 무대가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 담겨 있는 무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 모르겠으면 한 번 예전에 추는 거랑 지금 추는 거랑 비교해봐. 춤 실력을 보라는 게 아니라 스타일을 비교해보라고.”
실력은 확실히 지금이 더 낫다.
하지만 스타일로 들어가면 나는 예전 우리의 모습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성장한 현재의 실력으로 예전 느낌을 살려서 무대를 만든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장은새 안무가 춤이 대단한 건 맞지만 팬들이 바라는 건 우리 느낌이 담겨진 춤이지 않을까? 애초에 우리가 백날 연습해서 춰도 장은새 안무가가 추는 것보다 더 잘 추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이제부턴 지금까지 배운 걸 참고해서 우리 느낌을 첨가 시키자고.”
“그게 팬들한테 더 나을 거라는 거지?”
“응.”
멤버들이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전 느낌이 뭔지 영 모르겠는 멤버들은 과거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우리들은 다시 의견을 모았다.
“난 해솔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장은새 안무가한테 굳이 배울 필요가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라고 봐. 솔직히 얼굴 맞대기 껄끄러웠거든.”
“잘 추는 춤도 좋지만, 우리 느낌이 담겨있는 춤을 더 좋아할 거라는 말은 확실히 설득력 있는 것 같아.”
“저도 찬성이요.”
경태 형, 강준과 우연이가 시원하게 찬성을 표해왔다.
“제키 너는?”
“찬성. 반대할 이유가 없어.”
“은규 넌?”
“…….”
감정을 접기로 했는데 괜히 앞에서 알짱대면 괜히 마음만 더 싱숭생숭해질 거다.
남은규는 장은새 안무가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모두 찬성을 한 가운데, 홀로 대답을 하지 못한 남은규가 머뭇거렸다.
? ? ?
“이대로 끝? 정말?”
“네. 애들이 그러길 바라서요.”
장은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그녀가 직원을 노려보며 큰 불만을 담아 말했다.
“하아~ 왜 이렇게 쿨하질 못하는지. 이래서 순진한 애는 건드리면 골치가 아프다니까.”
“…아무튼 수업은 여기까지만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애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무가님.”
“그게끝?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하는 거에요? 이러면 나 서운해지는데. 내가 전염병 환자도 아닌데 말이야. 인사 정도는 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애들이 지금 스케줄을 나가서요. 비행기는 원하시는 시간에 예약해드리겠습니다.”
“빨리 꺼지라 이 말이네요?지금 제 취급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나 이런 대접 받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닌데.내가 큰 잘못한 거야?”
“아닙니다. 오해하신 겁니다. 그저돌아가실 때까지 불편함 없이 모시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저희 쪽에서 서운하지 않게 케어 해드리겠습니다. ”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고. 난애들이랑 만나서 인사는 나누고 가고 싶은데요?”
“…바로 가시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표정 관리하던 직원이 마지막 말에 표정을 구기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바로 비행기 타고 가겠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싫어요.만나고 갈래요.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는데 이대로 그냥 갈 순 없지.”
직원은 장은새의 말에서 악의를 느끼고 있었다.
‘저 썅년이…. 이대로 순순히 안 물러나겠다 이거지? 똥 뿌리고 가겠다는 거잖아, 지금!’
애들과 만나면 분명 남은규를 흔들려고 할 거다.
겨우 남은규의 마음을 잡았는데 말이다.
남은규의 스캔들은 당연히 조연주 이사에게 다이렉트로 전달이 됐다.
애들 관리 잘 하라고 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여러모로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다.
장은새 안무가에게 상황 통보를 마친 직원이 서둘러 팀장에게 상황을 알렸다.
“순순히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말을 어떻게 했기에 그래? 무례하게 행동한 거야?”
“아니에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어요.”
“하아~ 너를 아는데 무례하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비행기는?”
“물어봐도 날짜를 말 안 해줘요. 애들이랑 인사를 안 하면 안 갈 셈인 것 같아요. 은규는 어떻게 하죠?”
다른 애들이야 알아서 잘 행동할 거다.
하지만 남은규는 아니었다.
직원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마음을 접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남은규의 감정이 정리 된 게 아님을 알았다.
“이건 이사님한테 알리는 게 좋겠어. 우리가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 여자를 얌전히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은 조연주 이사밖에 없었다.
직원들이 섣불리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다가 정말 장은새 안무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곤란하다.
안무가 업계가 좁기도 하거니와 이쪽 업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실력 있는 안무가의 풀은 좁고, 허니 엔터는 항상 최고의 안무가와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팀장은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조연주 이사에게 직원에게 들은 상황을 전달했다.
조연주 이사는 한참 침묵하며 상황을 듣다가 의외의 말을 해왔다.
“장은새 안무가한테 손 떼요. 그 사람은 제가 알아서 마무리 지을 테니까.”
“…면목 없습니다, 이사님.”
“장은새를 고용한 건 제가 제안한 거였죠. 실력 하나는 깔 곳이 없으니까. 그래도 역시 그 여자는 쓰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실수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일에 신경 써요. 장은새씨랑 애들은 만나는 일 없을 겁니다. 비행기는 내일 날짜로 끊어놔요. 비즈니스석으로.”
“예, 이사님.”
좀 꼰대 같기는 해도 능력 하나는 뭐라 할 수 없는 조연주이다.
그녀가 해결하겠다고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 될 거다.
팀장은 그렇게 장은새 안무가의 일을 조연주 이사에게 맡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실을 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많이 혼나셨어요?”
“아니, 그리고 앞으로 장은새 안무가 일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사님이 해결하신다고 하셨어.”
“헉! 정말요? 어떻게요?”
“글쎄. 방법은 모르겠지만 워낙 능력 있는 분이시니까 잘 해결하겠지. 우리는 애들 서포팅 해주는데만 신경 쓰자. 그리고 은규는 특별 관리 시작하고.”
“네!”
“정말 다행이네요. 이사님이 해결해주시겠다고 하니까 마음이 확 놓여요.”
“맞아요. 감정싸움 되는 거 아닌가 걱정 많았는데.”
“근데 좀 궁금하긴 하네요. 조연주 이사님이 어떻게 그 여자를 설득할지.”
“그러게. 만만치 않은 여자인데…. 어떻게 설득하시려나?”
직원들의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한 번은 깽판을 치고 갈 것 같았던 장은새 안무가가 다음날 회사에서 끊은 비행기를 타고 얌전히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다.
? ? ?
“어? 이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들 연습하느라 바쁘죠? 이것 좀 먹고 해요.”
“우와아아! 감사합니다!”
“떡볶이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분식이야?”
조연주 이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긴장을 했던 것도 잠시.
진수성찬을 갖고 온 조연주 이사를 멤버들이 환호하며 반겼다.
“요즘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고 들어서 응원할 겸 찾아왔어요. 이제 다음 주엔 직접 콘서트장에 가서 리허설 할 텐데, 그때도 직접 현장에 가서 도울 생각이에요. 현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저한테 말해요.”
“감사합니다!”
현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직원이 있으면 무대를 관리하는 스태프들에게 피드백을 하기가 쉬워진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려고 하거나 귀찮아서 대충 넘기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사님이 계시면 정말 든든하겠어요!”
“그래서 일부러 가는 거에요. 우리 애들 무시당하는 거 보기 싫으니까.”
분식만 주고 갈 것 같았던 조연주 이사가 의외로 함께 분식을 먹는 걸 선택했다.
멤버들과 조연주 이사가 옹기종기 모여 분식을 먹기 시작하니 별의 별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연주 이사가 굳이 우리와 함께 분식을 먹는 이유는 심리적인 거리를 줄이기 위함일 것이다.
앞으로 조연주 이사와 얼굴을 맞댈 일이 많아질 예정이니 말이다.
“다치셨네요.”
나는 분식을 먹다가 조연주 이사의 손등이 까져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 좀 까졌어요.”
“히익! 멍도 드셨는데요? 어쩌다가 다치신 거에요? 약 바르셨어요?”
다행이 멤버들이 내 말을 받아 나 대신 호들갑을 떨어줬다.
“괜찮아요. 크게 다친 거 아니니까요. 오랜만에 운동을 좀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오! 어떤 운동 하세요?”
“평소에는 수영을 즐겨하고 어제는 복싱 좀 했어요.”
“복싱! 우와, 멋있어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스파링 같은 거 하신 거에요?”
“음, 그렇죠?”
넉살 좋은 기우연을 필두로 대화가 꽃을 피웠다.
조연주 이사의 사무실 안에서는 바짝 긴장해서 말도 잘 못하던 녀석들이 연습실이라고 기를 좀 피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조연주 이사가 일상적인 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덕분에 대화는 굉장히 화기애애하게 진행 될 수 있었다.
유일하게 긴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남은규’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렇다.
남은규가 유난히 말수가 없고 몸이 움츠러들어 있으니 조연주 이사의 시선이 남은규에게 향했다.
“은규씨한테 큰일이 있었죠?”
“…네.”
“장은새 안무가는 돌아간 거 얘기 전해 들었나요?”
“전해 들었습니다.”
“고생이 많았겠네요. 아직 감정도 다 추스르지 못했을 텐데, 회사가 좀 너무하죠? 연예인이라는 직업이라는 게 참 그래요. 한참 감정에 휩쓸려도 보고, 사랑도 해봐야 하는 나이에 감정을 억누르고 조심해야 하니까. 응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부주의하게 행동했습니다. 멤버들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됐는데 자재를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미안한 일 한 거 맞아요. 나중에 은규씨가 결혼식 하게 되면 꼭 초대장 줘요. 내가 제일 크게 축하해줄게요.”
조연주 이사는 능숙하게 남은규를 달랬다.
내내 굳어 있던 남은규의 표정이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도 조연주 이사가 질책하지 않고 은규를 위로해줄 거라고 생각 못했기에 살짝 감동 받은 상태였다.
“아, 근데.”
“?”
“장은새 안무가가 개인적으로 은규씨한테 연락을 넣는 일 같은 건 없겠죠?”
위로는 위로인 거고.
그렇다고 해서 남은규가 장은새 안무가의 만남을 허락해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조연주 이사가 꼬집었다.
남은규는 바란 적도 없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없을 겁니다.애초에 제 전화번호도 모르니까요.그리고 연락이 와도 제 쪽에서 거절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믿고 있을게요."
조연주 이사는 그제야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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