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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42화 (242/849)

〈 242화 〉 #34. 잠자리 (3)

* * *

내 눈이 잘못 된 게 아니라면 등에 달린 건 분명 투명한 잠자리 날개였다.

“뭡니까?”

낯선 침입자는 소년처럼 보이는 외형을 갖고 있었다.

키도 130cm는 될까 말까했다.

하지만 포니를 보아 온 경험 때문에 섣불리 반말을 하거나 경계심을 내려놓는 일은 하지는 않았다.

“흠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칠리라고 합니다.”

“칠리….”

“저를 어떻게 설명하는 게 편할까요. 아! 포니씨의 상사라고 소개하면 알아듣기 쉽겠군요. 경계심을 풀어주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나비 날개를 달고 있는 포니와 잠자리 날개를 달고 있는 상사라.

나름 그럴 듯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어 보인다.

문제는 저 사람이 왜 왔냐는 거다.

“갑자기 포니가 기절한 건 뭐고, 왜 저를 직접 만나러 오신 거죠?”

미운 정도 정이라도 저 녀석이 기절하니까 걱정이 되긴 하더라.

“포니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계약자 분과 대화를 위해 배제시켰을 뿐입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깨어날 겁니다. 아마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 걱정할 텐데 괜찮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포니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건 아니라는 거지?

내가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칠리씨가 시원시원하게 본론을 꺼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제안이라면 포니에게 들었던 말에 관련 된 걸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항상 포니로부터 상부의 말을 전달 받는 입장이었기에 지금 상황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포니를 저렇게 만들고 자신을 찾아 온 걸까?

더군다나 포니의 상사는 말풍선을 사용하지도 않고 말했다.

“일단 저는 계약자 분이 포니씨가 말한 첫 번째 제안을 받아들여줬으면 합니다.”

“이미 거절한 얘기입니다. 마침 포니에게 다른 선택지를 전달 받고 있는 중이었고요.”

칠리씨가 내 단호한 말에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는 게 좋겠군요. 포니씨한테 계약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시간이 있기를 고대했죠.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한 주체로서, 당사자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

이 잠자리가 나를 여기로 보낸 프로젝트를 만든 존재였다고?

눈이 휘둥그레질 얘기였다.

“그러네요. 우리는 진즉 대화를 나눠봐야 할 사이였네요. 일단 앉으시죠.”

잽싸게 의자를 꺼내다가 칠리씨를 앉혔다.

“감사합니다.”

자기 키 만한 의자에 폴짝 뛰어서 앉은 칠리씨.

“마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웬만한 건 주문 가능한데.”

호텔 서비스가 참 좋다.

스태프가 우리를 위해 적당한 음료수를 냉장고에 두둑하게 채워놓았기에 서비스를 받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내가 직접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저는 따듯한 우유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설탕 넣어서요.”

귀여운 외형에 알맞은 메뉴 선택.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가져올게요.”

“네.”

얌전하기까지 하다.

“나 잘 거니까 방에 들어오지 말아줘.”

“알았어요, 형~”

“누가 잠돌이 아니랄까 봐, 또 자?”

밖으로 나오니 연습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멤버들이 보였다.

잘 것이니 들어오지 말라 당부를 해놓고 방문을 잠가 꼼꼼하게 단속했다.

도중에 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간 큰일 난다.

얼마 후, 설탕 넣은 데운 우유가 완성 되고.

단속을 재차 끝내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호록­

“음, 맛있군요. 알맞은 당도에요.”

“오랜만에 마시는 건데, 괜찮네.”

“맛있는 음료가 있으니 절로 혀가 풀어집니다. 그럼 이제 얘기를 해볼까요? 제가 주로 하는 일은 행성 관리 대행 서비스입니다.”

칠리가 일하는 곳은 ‘행성 관리 대행 서비스과’.

주로 의뢰를 받은 행성의 관리를 한다고 한다.

‘얘네들은 행성을 사고파는 건가?’

행성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 입장에서 칠리의 말은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뜬금없이 SF 뭐냐고.

나 우주로 진출해야 되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칠리는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어서 말했다.

“이런 관리 서비스는 워낙 대행사가 많아서 돈이 되진 않습니다. 새 사업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밖에 없었죠.”

회사는 성장해야 한다.

직원은 회사를 성장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그러한 배경으로 시작 된 프로젝트.

“그게 바로 멸망 직전 행성을 싸게 낙찰 받아 회생시킨 후 되파는 거였습니다. 물론 되팔아도 관리는 저희 쪽에서 관리를 해주는 놀라운 패키지죠. 잘 된다면 행성 관리로 벌 수 있는 코인의 수십 배는 벌어들일 거란 전도유망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포니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지식이라며 말을 아끼곤 했는데, 녀석의 상사는 거침없이 내게 자기네 사정을 털어놨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감히 엿보지도 못했던 알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잔뜩 얻을 수 있었다.

“그 프로젝트 중 하나가 저였군요.”

“네, 맞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 되지 않았다는 게 참 아쉬운 일이죠. 계획까지는 완벽했거든요. 전부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반대를 안 했습니다. 다들 무슨 광기에 휩쓸려 있었는지….”

“실패한 건가요?”

“네, 깔끔하게 실패 했습니다. 행성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큰 이득이 될 거라 생각했던 사업이 망하는 건 순식간이었어요.”

“제가 보기엔 제법 사업성 있어 보이는 일인데 왜 망했죠?”

“행성이 괜히 멸망 직전까지 간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행성 주인이라고 망하는 게 좋았겠습니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안 되니까 저희한테 판 거죠. 이미 쓰레기인 걸 사봤자 답은 분리수거밖에 없는 건데 말이죠.”

신랄하게 욕을 한 칠리씨가 한숨을 포옥 쉬고 꼴깍꼴깍 우유를 마셨다.

우유 수염을 손등으로 슥­ 닦아낸 칠리씨는 퀭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개병신무능아가 행성을 맡아서 멸망 직전까지 만든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성 관리를 오랫동안 맡아오니 쉬워보였던 거죠.”

“!!”

그들은 몰랐던 거다.

멸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무슨 수를 써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유능한 담당자를 배정해서 행성을 다시 회생시켜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쓰레기를 사서 아등바등하며 코인을 쏟아 부었죠. 이쪽을 막고 숨 좀 돌릴까 싶으면 저쪽에서 문제가 터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저쪽에서 터지는 일이 반복 됐습니다. 결국 행성이 더 엉망이 돼서 포기하고 그 쓰레기를 파기 시켜야 했죠. 그거 아십니까? 망한 행성을 처리하는데도 엄청난 코인이 듭니다.”

“저런.”

한 마디로 이중 삼중으로 돈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프로젝트를 건의하고 담당했던 부서들이 줄줄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서에 짬처리가 들어왔죠. 벌려놓은 사업을 적당히 수습해서 건질 수 있는 건 건지고 끝내라는 거였습니다.”

“근데 좀 이상하네요. 벌려놓은 사업을 수습하라고 했는데 왜 제가 여기 있는 거죠?”

“아까웠습니다. 시작은 정말 나쁘지 않은 사업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나마 희망이 있어 보이는 행성을 마지막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진행시켰습니다.”

고개를 주억이며 칠리씨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어째 포니에게 들었던 말과 다른 점이 툭툭 튀어나왔다.

포니는 분명 나에게 이 프로젝트가 나를 시작으로 더 커질 거라고 말했었다.

내가 그 부분을 물으니 칠리씨가 배시시 웃었다.

“포니씨가 순진한 구석이 좀 있습니다. 영악하질 못해요. 적당히 속여 부려먹기가 참 편하죠. 문제는 사람이 부지런하질 못해서 끝날 프로젝트라는 걸 알면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속였습니다. 당시 포니씨는 신입으로 들어와서 회사에서 거하게 말아 먹은 프로젝트가 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걔는 꾸준히 멍청하구나.

“더군다나 오늘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절 참 무서워합니다. 제가 꽉 잡고 있거든요.”

득의양양하게 콧대를 높이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다.

저런 귀여운 꼬맹이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경악에 졸도까지 하는지….

“아무튼, 본론에 들어가자면 시작할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어요. 이 행성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코인은 한정적인데 고작 다른 행성 출신 인간을 데려와서 DNA을 바꾼다는 게 썩 효과적인 방법도 아니었고요.”

“그렇죠. 저 혼자 아이를 낳아봐야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많이 쳐준다고 해도 10~20명 사이일 것이다.

그 인원으로 수십, 수억의 인구를 커버친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DNA가 바뀌기 전에 멸망이 더 빨리 찾아왔을 거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약자분이 아이를 낳은 순간 행성의 운명선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

아이?

태양이를 말하는 건가?

“태양이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그러니까요!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고작 한 명이 태어났는데 막을 수 없던 스노우볼이 멈칫한 겁니다. 이건 기적이었어요! 드디어 처음으로 프로젝트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흥분한 칠리씨가 옴팡지게 주먹을 쥐더니 탁자를 콩 때린다.

“그리고 계약자분이 두 번째 임신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거 된다!!

떡상 쌉가능!”

귀여운 외형에 그렇지 못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칠리씨는 내 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으로 연신 탁자를 콩콩 때리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계약자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프로젝트가 정리 단계에 있어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는 거죠. 중간에 회사에 큰일이 터지는 바람에 신경을 써드리기가 어렵기도 했습니다.”

‘큰일?’

어쩐지 그거 내가 알고 있는 큰일인 것 같은데.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가능성을 봤으니까요! 최고의 효율로 최고의 결과를 만들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 안 잡히고 있었으니까요. 답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마침내 노력에 결실을 맺었습니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겁니다!”

“그게 포니가 말했던 그 방법이었나요?”

“예.”

어떤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

그게 세상의 멸망을 막을 열쇠라고 한다.

“흐음, 곤란하네요.”

설명을 들으니 마냥 싫다고 할 수도 없어진다.

내가 태양이 아빠가 아니었다면 시큰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죽어도 태양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은가?

세상이 멸망해버리는 건 곤란하다.

“다소 거북스러운 방법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방법이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큰 확률을 가진 방법입니다.”

한 명의 희생으로 수억의 인구가 살아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물어봐도 그 한 명이 희생하는 게 맞다고 할 것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특별한 거죠?”

“그 여성의 특별함을 이해하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로 설명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솔직히 포니에게서 멸망을 앞둔 세계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라는 생각이 컸다.

누가 ‘곧 세상이 멸망한대!’ 라는 말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겠는가.

여기 사람들도 남자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멸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반항을 해봤다.

“…제가 끝까지 싫다고 한다면요?”

“계약자 분께서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교류하고 계신 여성분들에게 아이템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분들에 한해서 가능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을 임신시킨다면 이후에는 계약자 분께 계약을 빌미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겠습니다.”

“!!”

칠리씨의 솔깃한 제안.

머릿속이 요란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거절하기가 쉽지 않네.’

보상이 너무 좋다.

내가 바라는 걸 정확히 짚어서 보상으로 내걸었다.

고민하는 내 모습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는지 칠리씨가 배시시 웃으며 우유를 마신다.

“충분히 고민하셔도 괜찮습니다.”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까지 준다.

“…….”

사실 생각해보면 칠리씨가 계약을 빌미로 내게 무언가를 과하게 요구했던 적은 없다.

조심스럽게 미션 같은 걸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부추기는 식이었다.

‘이거 해보는 건 어때?’ ‘보상이 이렇게나 좋은데 안 할 거야?’ 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리고 임신을 하면 축하한다는 뜻으로 선물도 두둑하게 채워줬다.

중간에 삥땅을 치려는 포니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뿐.

‘지금까진 안 그랬어도 나중에도 요구 안 한다는 장담은 못하니까 저 조건은 받아두는 게 좋아.’

다만 여기에 더해서 얻고 싶은 조건이 있었다.

“뭔가 더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칠리씨가 예리하게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그쪽에서 제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나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내 여자가 임신을 하면 나보다 얘네가 더 먼저 안다.

나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계약자분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는데, 불만을 갖고 계셨나보군요.”

“도움을 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요.”

“알겠습니다. 그 부분도 처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칠리씨는 확실히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보상들이네요.”

“그럼 시원하게 받아들여주시죠.”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하하!”

칠리씨의 날개가 기쁨에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찹살떡 같은 두 볼에 기쁨의 홍조가 띄워진다.

나는 계약으로부터 자유를 보상으로, 얘네들은 행성을 회생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성과를.

둘 다 win­win 할 수 있는 완벽한 거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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