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36. 라운드 (3)
* * *
오늘 올리비아 트리 무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저쪽에선 엿을 먹였는데 돌아오는 건 비단결 같은 마음씨군요. 축하합니다! 이제 완벽한 나쁜 여자가 되셨습니다.
MC짐이 익살스럽게 올리비아 트리를 놀린다.
그녀들은 맙소사! 라고 탄식을 하며 말했다.
우리가 졌어. 쿨하게 인정하자. 우리도 그냥 훈훈하게 칭찬이나 해줬어야 했다고.
하하하!
넉살스럽게 웃는 사람들.
하지만 이어진 제키의 말에 웃음이 뚝 그쳤다.
그래서 참 아쉽습니다. 저희랑 대결을 하게 됐으니 3라운드엔 무대를 못 보게 될 거잖아요?
오오오오~!
올리비아 트리와의 대결에서 자신들이 이길 것이니 탈락한 가수의 무대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도발이었다.
MC짐은 지금 상황이 무척 재밌었는지 박수를 짝짝 치면서 좋아했다.
와~ 저렇게 말간 얼굴로 여자 가슴에 비수를 꽂아버리네?
당한 거야. 우리가 너무 순진했다고.
말은 저렇게 해도 올리비아 트리의 태도에서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저 여유로움은 대결해야 하는 입장으로 보면 좋게 보긴 힘들었다.
지금 우리 무시하나? 우리 상대하는 건 가뿐하다 뭐 이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여유로운 태도에 울컥해서 반응을 하는 건 좋지 않다.
때마침 분량을 적당히 뽑았다고 생각했는지 MC짐이 다른 팀에게 포커싱을 돌렸다.
“좀 애매하게 끝났네.”
“세게 받아치지 않길 잘한 거야. 거기서 더 세게 받아봤자 저쪽 태도는 똑같았을 걸.”
“하긴, 괜히 말이나 많아졌겠다.”
말이 많을 필요 없다.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일.
우리는 올리비아 트리를 이길 것이다.
안녕!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잘 생겼네.
촬영이 끝나고 매니저 누나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올리비아 트리가 다가왔다.
올해 26살인 올리비아, 마찬가지로 26살인 트리아.
두 여성 모두 170cm가 넘는 시원시원한 모델 핏을 갖고 있다.
실제로 모델 활동을 하기 때문에 몸매는 빠지는 곳이 없었고, 피부는 인종에 걸맞게 흰 백인 피부를 갖고 있었다.
트리아는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를, 올리비아는 붉은색에 턱을 간신히 덮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데 만약 내게 여자가 없었다면 무조건 호감을 표했을 것이다.
두 말 할 것도 없는 미녀들이었으니 말이다.
너희 무대 굉장하더라. 멋있었어.
노래를 어쩜 그렇게 잘 불러? 춤도 잘 추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무대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칭찬에 나는 멤버들에게 간단히 통역을 해줬다.
올리비아 트리가 무슨 꿍꿍이로 온 건지 경계를 하던 멤버들이 통역을 듣고 조금은 수그러든 모습으로 그녀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결승전에서 만났어야 하는 상대를 너무 일찍 만나버려서 아쉬워.
제작진이 센스가 없는 거야. 이런 뜨거운 대결을 이런 식으로 빨리 소비해버리다니!
저희도 아쉽네요. 좀 더 높은 라운드에서 만났으면 더 재밌었을 테니까요.
올리비아와 트리아는 우리가 말을 좀 받아주자 싱글싱글 웃으면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프로그램 끝나고 바빠? 우리랑 노래 한 곡 내지 않을래?
사실 얘가 작곡을 하거든? 너희들 무대를 보고 죽여주는 영감이 떠올랐대. 아마 조사를 해보면 제법 괜찮은 작곡가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너희한테도 나쁘지 않은 기회일 걸?
음악을 같이 하자고?
어스타에 집중해야 할 때인데 노래를요?
어메이징 스타는 프로그램일 뿐이잖아! 진정한 음악은 가수끼리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거라고.
절대 후회 안 할 거야. 너희들 목소리랑 잘 어울리는 곡이거든.
…….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게 있다.
‘이 사람들, 어스타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이는데?’
올리비라 트리가 어메이징 스타 출연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메이징 스타에 출연한 가수 모두가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줄 알았기에 그녀들의 여유로운 태도는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상상해봐! 우리랑 같이 무대에 오를 때를. 반응이 끝내줄 거야. 핸드폰 번호 알려주면 연락할게.
트리아! 흑심이 너무 일찍 튀어나왔잖아. 좀 더 MSG를 쳤어야지.
이런! 나 너무 성급했어?
오해하지 말아줘! 순수하게 음악적으로 교류하고 싶은 거야. 쟤는 흑심이 메인이지만.
와~ 이렇게 혼자 살겠다고?
멤버들은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트리아와 은근히 아닌 척 하면서 추파를 던지는 올리비아까지.
멤버들은 내가 더 이상 통역을 하지 않았음에도 대충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맙소사, 네가 싫어서 뒷걸음질 하고 있어!
오, 베이비들! 우리 무서운 사람 아니야.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아무 문제없다고.
왜 나까지 엮는 거야.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두 여자가 투닥대는 것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 뒤에 쪼르르 숨어버린 멤버들 대신 입을 열었다.
음악적인 교류는 괜찮은 생각이지만 대결을 앞두고 다른 일에 집중하진 않을 겁니다. 대결이 끝난 2주 후에도 저희와 함께 할 생각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좋아, 깔끔하게 차였어. 축하해, 트리아.
2주 뒤에 보자고 했잖아. 아직 희망은 남았다고!
2주 뒤에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음에 봤을 땐 다가가지도 못할 걸. 분위기 파악 못하고 접근하면? 뺨이 화끈해지는 거지.
미래 일을 왜 다 알고 있는 거야아!
…….
다음에 만났을 때 우리에게 다가가지 못할 거라는 말은, 대결에서 승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패배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을 테니 호감을 갖고 접근해봤자 뺨만 맞을 거라는 거다.
어메이징 스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승리를 장담하는 모습에 마음이 절로 뾰족해진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그때가 되면 다시 제안해주세요. 뺨 맞을 일 없을 겁니다.
정말? 세상에, 역시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다니까!
성격이 좋아서라기 보단….
보단?
저희가 이길 거라서요. 오히려 제안을 안 주실까 걱정이 되네요.
와우.
아하핫! 뭐야, 우리한테 이길 거라고 선전포고한 거야?
그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떠니 더 좋아한다.
‘도발 당하는 게 좋은 건가?’
사실 올리비아와 트리아는 태어났을 때부터 잘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났다.
저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부내 나는 여자들이라고 할 것 같다.
우리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던 여유도 그녀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특유 분위기였을 것이다.
‘저 여자들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부자집 딸이라는 건 알겠다.’
아마 그녀들 근처엔 찐따들이 접근 하지 못할 거다.
그녀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수룩한 사람을 위축시킨다.
내 도발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던 그녀들이 수다를 떨었다.
날 앞에 두고 뻔뻔하게 내가 찜했느니 쟤는 내가 찜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얘 친구는 내가 찍을래. 넘보지 마.
너 연애하게? 지긋지긋해서 당분간 쉬겠다고 했잖아.
연애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눈앞에서 놓칠 순 없지.
헤이, 저 아직 있습니다만.
날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대화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결국 한 마디 하니, 그제야 생각났는지 깔깔 웃으면서 사과를 해왔다.
하항! 미안. 우리가 원래 관심이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꼬셔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감정을 숨기고 재보고 그러는 거 질색해. 그래서 말한 거야.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고.
‘여기서 뜬금없이 고백을 한다고?’
당황스럽다.
내가 놀란 걸 숨기지 못하고 있으니 올리비아씨가 황급히 수습을 했다.
아이고, 오해했나보네. 내가 한 말이 고백인 건 아니야. 그냥 마음이 가니까 만나보자는 거지.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뭐든 결론이 나지 않겠어?
그녀들이 바라는 건 결국 승패는 상관없고, 같이 음악하면서 감정을 쌓아보자는 거였다.
솔직히 흑심이 많아 보이기는 하다. 우리 지금 좀 추할지도.
시끄러! 이미 저질렀잖아. 그냥 밀고 나가! 흑심이 많은 건 사실인데, 곡은 진짜 기가 막힌 걸로 떠올랐어. 아마 완성 되면 환상적일 걸? 팬들이 좋아서 자지러질 거라고.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아?
대결은 그녀들의 머릿속에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우리와 음악 작업을 하는 게 최종 목표로 보였다.
‘힘 빠지네. 남은 진지한데 저쪽은 장난이니.’
저런 태도를 보이는 상대와 대결하는 것만큼 힘이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결은 생각 안 하나요?
사실 져도 상관없어. 오늘 본 게 있으니까 억울할 것 같지 않더라고. 너희들 정말 대단했어.
실력 있는 사람한테 지는 건 안 분하지.
더군다나 예상치 못하게 좋은 인연 만들게 됐잖아. 그거면 우린 괜찮아!
내가 괜찮지가 않다.
상대방이 먼저 전의를 잃는 건 바라지 않는 일이다.
잔뜩 힘줘서 대결에 임할 예정인 우리 입장에선 저쪽도 대결을 진지하게 준비해줬으면 했다.
물론 대결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대를 준비하는데 소홀이 하는 건 아닐 거다.
팬들에 대한 애정은 진심인 것 같으니 말이다.
‘혼자 불 타오르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이 없는데….’
어떻게 설득을 한다?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약속은 못해줄 것 같네요. 스케줄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사실 이기면 같이 곡을 낼 필요가 없잖아요?
오, 이건 생각 못했는데.
내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우리가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올리비아 트리와 음악 작업을 하는 게 득이 되지만, 승리를 한다면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게 된다.
그땐 인지도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지게 되고, 자연히 우리를 찾는 곳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햐~ 어렵네. 어려워.
저런 남자가 쉬울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기세요. 우리를 이겨서 같이 음악 작업 하자고 제안 넣어줘요. 그땐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익이 있을 때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냉정하게 쳐내겠다는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져도 좋다는 힘빠지는 말을 하진 못할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갈 생각 하지 말라는 거구나.
이겨서 쟁취하라는 거지.
2라운드 대결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던 올리비아 트리의 눈빛에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그래, 이 정도로 달아올라줘야지. 그래야 우리도 신나서 준비하잖아.’
이젠 이해가 된다.
어메이징 스타 PD가 참가자와 참가자들의 싸움을 방치하는 이유를 말이다.
올리비아 트리와 대화를 끝낸 나는 멤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뭐래요?”
“제키가 말 안 해줬어?”
“귀찮대요.”
“야, 너는 좀….”
“뭐 좋은 말이라고 그걸 통역해서 알려줘. 그냥 모르는 게 낫지.”
“하긴, 그렇긴 하네.”
저 여자들이 대결에 관한 건 아무 생각도 없고, 잿밥에나 관심이 있어서 온 거라는 걸 알면 기분이 나쁠 거다.
그게 못 마땅해서 직접 불씨를 키우고 오지 않았는가.
멤버들은 제키와 내 배려에도 궁금함이 더 컸는지 알려달라고 졸라댔다.
“별 거 아니었어. 그냥 평소랑 똑같은 일이 있었던 거야.”
“평소랑 똑같은 일?”
“아! 뭔지 알겠다.”
“나도 알겠네.”
“에효, 지겹네요. 지겨워.”
“뭔데? 왜 나만 몰라. 알려줘!”
강준은 금세 눈치를 챘고, 나머지도 슬슬 눈치 채고 있을 무렵.
남은규 혼자만 눈치를 못 채고 알아차린 멤버들을 붙잡아 알려달라고 졸랐다.
남은규 놀리기에 진심인 멤버들은 일부러 안 알려주면서 애간장을 녹였고, 진심으로 삐지기 직전까지 오고서야 정답을 말해주었다.
“야이씨이! 별 것도 아닌 건데 그걸 이제야 알려주냐? 개 치사해!!!”
“울어? 우는 거 아니지?”
“안 울어!!! 나쁜 놈아!”
“어허, 형들한테 나쁜 놈이라니?”
“너한테 한 말이거든?”
“다 같이 놀렸는데 나만 나쁜 놈이야? 내가 동네 북이냐?”
“동네 북이 아니라 남은규 북이다! 왜!”
"그만 좀 싸워라, 동갑내기 친구 아니랄까봐 정말 어지간히 싸워대네."
결국 소란은 매니저 누나가 말리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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