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53화 (253/849)

〈 253화 〉 #37. 연주 누님과 (2)

* * *

애들끼리 모여서 하는 추가 연습.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지 뭐.”

“오예! 논다!”

“한 번은 쉬어줄 때가 되긴 했어.”

“솔직히 하루 다 쉬는 것도 아니잖아.”

멤버들도 사실은 놀고 싶은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배불리 먹고 호텔에서 늘어졌는데 누군들 또 연습을 하고 싶겠는가?

내 당당한 땡땡이 선언을 격하게 반겼다.

“외출하는 거야?”

“응.”

“형이니까 걱정은 안 하겠는데, 그래도 조심해.”

“오키오키.”

“아~ 부럽다. 나도 형 같은 체질이면 막 돌아다닐 텐데.”

“한 번 물어볼까? 밖에 나갈 수 있는지?”

멤버들은 오랜만의 일탈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분주하게 떠들었다.

애들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연주 누님이 오랜만에 시간이 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안경을 끼고 호텔 밖에 나간 뒤 연주 누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호텔 로비에요.”

­그래? 클락션 울릴 테니까 그쪽으로 와.

빵!

‘와.’

클락션이 울린 차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내뱉어졌다.

시선을 사로잡는 노란색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참 놀라운 사실은 호텔 앞이라 그런지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와도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여기가 비싼 호텔이긴 한가보네.’

차에 올라타자 좋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운전석에 가벼운 차림으로 앉아 있는 연주 누님.

분위기 자체가 고아했기에 절로 긴장감에 침이 꼴깍 삼켜진다.

과거의 나였다면 일반 사원에겐 까마득하게 높은 상사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나도 달라졌다.

‘이게 멋짐이라는 건가.’

숨 막히는 경직 대신 부러움과 본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저 멋진 여자가 나랑 섹스하는 여자라는 거지.’

역시 잘 생긴 게 최고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너무 깍듯하게 인사하는 거 아니야? 나 머쓱해지려고 하는데.”

“아하하! 그렇게 느끼셨어요?”

“편하게 대해. 편하게.”

만났을 때 살짝 쫄은 건 맞다.

하지만 그걸 티낼 순 없었다.

상처 받을 테니까.

아무리 남녀역전 세계라지만 세심한 배려와 상호존중은 어디서든 필요한 법이었다.

“만나자마자 일 얘기해서 미안한데, 어스타 잘 봤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 보여줘서 좋더라. 사람들 반응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스캔들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더라고요.”

“이겨야지. 짓밟아버려.”

“당연히 그래야죠. 그렇게까지 지원을 해주셨는데.”

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 무대에 들어간 돈이 어디 한 두 푼이겠나.

어스타에서 지원해주는 금액에 몇 배를 소속사에서 더 지원해줬다.

“근데 저희 오늘 어디가요?”

“밤이라 멀리 가진 못하고, 이 근처에 예쁜 게 있어서 그거 보러 갈 거야.”

“예쁜 거라…. 기대되네요.”

사실 연주 누님을 떠올리면 항상 ‘섹스’가 떠오른다.

그녀와의 첫 만남 때도 그랬고, 누님으로 부르게 될 만큼 친해졌던 두 번째도 대화를 나눴던 시간보다 섹스 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던 걸로 안다.

오늘도 그녀와 화끈한 섹스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차가 출발하기 전.

연주 누님이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인사로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기꺼이 고개를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맞이했다.

춥, 추웁, 쭙!

“!!”

혀가 질척하게 얽히는 가운데 나는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살결을 매만졌다.

얇은 허벅지가 내 손에 쫀득쫀득하게 달라붙어 온다.

립스틱 맛을 느끼면서 좀 더 깊게 키스를 하기 위해 혀를 움직이려던 찰나.

귀에 콱! 하고 어떤 소리가 박혀왔다.

­달칵!

굉장히 익숙한 소음이었다.

차를 탄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소리.

다름 아닌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였다.

“아….”

나는 그제야 왜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는지 깨달았다.

깜짝 놀란 탓에 고개를 뒤로 물렸고, 입술이 떼어진 연주 누님이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

“흠흠.”

“…안전벨트를 해주시려고 했던 거였네요.”

존나 쪽팔린다.

여긴 여자가 남자한테 안전벨트를 매줄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얼굴을 들이미는데 그걸 사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냅다 입술부터 박아버린 건 확실히 내 실수다.

“추, 출발할까?”

잠시 후끈했던 열기를 가라앉히는 시간이 지나가고.

연주 누님이 차를 출발시켰다.

밤길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못했던 대화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일’에 관련 된 내용이었기에 다른 내용으로 시작해도 일에 관련 된 화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꾸 일 얘기를 하게 되네.”

“다른 얘기 할까요?”

“아니, 일 얘기 하는 게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이렇게 둘이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드물다 보니까 좀 더 소중하게 썼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음~ 그럼 우리 얘기를 좀 할까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

“우리 얘기…?”

연주 누님이 내 손을 마주잡아 온다.

“우리 무슨 사이에요? 누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연주 누님은 나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을까?

진지한 만남인지, 아니면 찰나의 불꽃같은 관계인지.

정확히 해야 나도 연주 누님을 대하는 태도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빨간불에 차를 멈춘 연주 누님이 나를 바라봤다.

“그건 이런 식으로 나눌 말은 아닌 것 같아. 오늘 만나서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아.”

역시 어른인가?

복순 누나에게서 느끼곤 했던 연상의 배려가 느껴진다.

멀지 않은 곳이 도착지였는지 차가 금방 멈췄다.

밖을 확인하니 강이 보였는데, 저 강이 오늘 우리의 데이트 장소인 모양이었다.

“내리자.”

“네.”

안전벨트를 스스로 풀고 밖으로 나왔다.

물이 있는 곳 근처라서 물내음이 물씬 난다.

늦은 밤 강가 주변에는 반짝이는 불빛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오, 예쁘네요.”

연주 누님이 예쁜 곳에 간다더니 확실히 운치 좋은 곳이었다.

근처에 돗자리 펴놓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주차를 하고 나온 연주 누님이 내 팔에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적지가 있다는 듯 익숙하게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아무데나 얼굴 보일 수 없잖아. 적당한 곳 섭외해놨어.”

섭외를 했다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게를 통째로 빌리기라도 했다는 걸까?

놀랍게도 그녀가 안내한 곳에는 유람선이 정차해 있었다.

“설마 여기에요…?”

“밤에 보는 호숫가는 특별한 경험이 될 거야. 들어가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유람선이 우리가 올라가자 움직일 준비를 시작한다.

“정말 여길 빌리신 거에요? 설마 우리만 있는 거에요?”

“입 무거운 전문가들로 준비했으니 편하게 있어도 돼.”

이게 바로 재벌 여친의 클레스라는 걸까?

문제는 연주 누님의 재력이 이 정도라는 걸 몰랐다는 거다.

“누님, 이런 말하면 촌스럽다는 건 아는데 도저히 안 물어볼 수가 없네요. 요트도 아니고 유람선을 전부 빌리는 건 좀 과하지 않았을까요?”

“너랑 첫 데이트잖아. 그리고 나한테 이 정도는 별 거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첫 데이트는 편하게 함께 있고 싶어.”

잠깐 동안 연주 누님도 재벌가 딸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젊었을 때 엔터테이먼트 회사의 평범한 매니저였다는 걸 들은 적 있었다.

그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연주 누님의 능력이 더 대단해서 얻을 수 있었던 재력일 거다.

“이번에는 첫 데이트니까 저도 행복하게 즐길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유람선을 빌린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 될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한 선택이 분명했기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았다.

내게 특별한 안경이 없었다면 그녀의 선택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경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한테 이런 행동은 과한 지출일 뿐이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기분은 좋은데, 한편으로는 부담도 돼서요.”

“부담스러워 하지 마. 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시면서 데이트 하는 걸 좋아해서 그냥 네가 적응하는 게 편할 거야. 좋은 거, 예쁜 거, 맛있는 거 잔뜩 보여주고 먹여줄 거니까.”

연주 누님의 연애가 그런 스타일이었구나.

사람마다 연애하는 스타일이 다른 법이고, 연주 누님이 그런 스타일이라면 얌전히 따르는 게 나았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면서 생긴 노하우가 있다면, 내가 나서서 이끄는 것보다 여자들에게 따라가는 게 편하다는 거다.

더군다나 여기가 남녀역전 세계인지라 데이트의 주도권을 여자가 갖는 게 상식인 곳이었다.

“예쁜 곳, 맛있는 곳, 좋은 곳 데려가실 때 그 장소를 전부 빌려버리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찬성이에요.”

내 대답이 예뻤는지 연주 누님이 손을 들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귀여운 강아지 우쭈쭈 귀엽다하면서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라, 쓰다듬 받는 게 무척 어색했다.

“저녁은 먹었나? 난 먹고 왔는데.”

“어스타 보면서 애들이랑 먹어요.”

“간단한 디저트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요.”

“그럼 바깥에서 구경 좀 하다가 들어가자고.”

천천히 물길을 뚫으며 움직이는 거대한 유람선에 강가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유람선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마 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이 유람선이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기분 진짜 묘하네.’

사실 날 위해서 이 큰 유람선을 빌렸다는데 기분이 안 좋을 순 없었다.

바깥에서 실컷 주변 구경을 하다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간단한 디저트라며?!’

쉐프들이 정성을 들여 만들었을 맛있는 것으로도 부족해 아름답기까지 한 디저트들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너무 맛있는데요? 씁쓸하면서도 은근히 달콤한 게.”

디저트를 매일 찾아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있는 디저트를 안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몸은 뭘 먹어도 건강이나 살을 문제없이 관리할 수 있어서 식도락에 알맞은 상황이었다.

뭘 먹든 아랫배가 나올 걱정이 없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몸이 얼마나 축복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이런 건 누릴 수 있을 때 최선을 다 해 누려야 하는 법이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저녁을 먹었다고 말해놓고도 디저트를 흡입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주 누님도 나를 따라 디저트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게 맛있다느니 저게 더 맛있다느니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근데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거 맞아?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몸 관리해야 하잖아.”

“제가 살찌는 체질이 아니라서 멤버들보단 먹는 게 좀 널널해요.”

“해솔이 몸이 최고인 건 나도 잘 알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제법 야릇하게 다가온다.

연주 누님의 붉어진 두 뺨이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사이도 조금씩 질척하고 야릇해져가고 있었다.

“사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내가 낯간지러운 짓을 잘 못해. 분위기 있게 건네지 못해서 미안해. 자, 받아.”

그녀가 꺼낸 것은 작은 케이스.

도저히 모르는 물건이라고 시치미를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반지에요?”

“끼고 다니지는 마. 그냥 기념을 하는 물건인 거고, 내가 널 진지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니까.”

어색하게 반지 케이스를 받아 열어봤다.

반지에 끼워져 있는 영롱한 보석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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