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57화 (257/849)

〈 257화 〉 #38. 여파 (2)

* * *

“그냥 우리가 무대를 너무 잘했던 건데.”

“누가 봐도 이건 좀 억까 아닌가?”

“쟤네들한테 당한 건 벌써 잊었어? 너희 착한 건 알겠는데호구는 되지 말자. 응? 누나가 걱정 돼서 하는 소리야.”

매니저 누나는 멤버들이 너무 착하다며 갑자기 잔소리를 한다.

내가 봐도 여기서 올리비아 트리를 불쌍하게 여기는 건 너무 호구 마인드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멤버들에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쟤네들 지금 욕을 먹어도 금방 가라앉을 거야. 집안이 잘 살잖아. 우리 걱정은 쓸데없는 짓이야.”

“!!”

“진짜 그렇네?”

“저분들 집안이 장난 아니었지?”

“어. 엄청난 부자랬어.”

‘엄청난’이라는 수식어까지 붙는 집안의 딸들인데 부모가 지금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부모들 입김 때문에 인터뷰에서 스캔들을 낸 것에 항의를 해도 소속사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었다.

결국 지금 저 여론도 금세 가라앉을 소란인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멤버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런 말도 있잖아. 연예인 걱정만큼 쓸데없는 게 없다고. 그뿐이냐? 저쪽에서 스캔들 냈을 때 보여줬던 뻔뻔한 태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우린 그냥 팝 먹으면서 지켜나 보면 되는 거야.”

“음, 확실히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아.”

“다시 즐기자! 즐겨!”

“와아!!”

고생해서 만든 무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그걸 본 사람들이 우릴 보며 환호해준다.

이보다 뿌듯하고 이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

멤버들 모두 며칠 내내 이어지는 축하 인사에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와중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다음 무대는 뭐해?”

“아.”

“아!”

“윽!”

“왜 또 그 얘기를 꺼내!”

기분 제대로 잡쳤다.

모두들 마음으로는 그걸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 제키가 미뤄두고 싶었던 얘기를 기어코 꺼내버렸다.

신나게 휴식을 즐기던 우리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2라운드 때 너무 화려하게 천장을 찍어버린 우리.

어스타를 본 시청자들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기준이 한없이 높아진 상태였다.

“계속 미뤄둔다고 누가 일을 대신 해주는 게 아니잖아. 피하지 말고 ”

“평범하게 노래하는 건 안 되겠지?”

“2라운드를 그렇게 해버렸는데, 3라운드를 그런 식으로 넘겨버리면 올리비아 트리가 먹고 있는 욕이 다 우리한테 오지 않을까?”

미래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기쁘면서도 마냥 기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휴식이 끝나면 3라운드를 준비해야 하는데 뮤지컬에 신경을 쓰느라 몸과 머리를 너무 많이 쓴 게 문제였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어.”

“뭘 해도 2라운드 무대보다 잘 할 자신이 없는데.”

“와~ 진짜 우리 어떡하냐.”

3라운드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게 어째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상황.

우리는 급격히 퀭해진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으어어~”

“레전드를 너무 일찍 찍어버렸어.”

“우리 다음 상대가 누구였더라?”

“헉! 그러고 보니까 그걸 신경 안 쓰고 있었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쏟아지는 인기에 벌써 며칠을 훅 버렸냐? 이제 회의 해야 돼.”

“으아아아아!”

“조금만 더 쉬고 싶었는데….”

“잠깐! 잠깐만, 얘들아.”

매니저 누나가 본격적으로 3라운드 회의에 들어가려는 우리를 황급히 불렀다.

“왜요?”

“지금 3라운드 회의하라고 너희들 부른 거 아니야. 이번에 너희들 협찬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어. 협찬 목록 중에서 혹시 너희들이 평소에 관심 있었던 곳이 있으면 말해줘야 돼.”

“아~ 그거 하라고 불렀던 거에요? 근데 그건 원래 회사가 알아서 정해줬잖아요.”

“협찬 급이 높아져서 그래. 알만한 브랜드들이 제안을 넣었는데 금액은 비슷비슷해. 그래서 브랜드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너희들 의견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코디 누나가 아무 곳이나 골라도 된데요?”

“이름값이 있어서 이런 브랜드는 코디 입장에서 협찬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수준이거든.”

“오오오! 그럼 볼래요! 아는 브랜드가 있으려나?”

“너 아는 브랜드 많아? 난 아는 브랜드가 별로 없는데.”

“저보단 은규 형이 엄청 잘 알아요.”

기우연이 잽싸게 종이를 들고 눈을 부릅뜨며 살폈다.

다른 멤버들도 기우연 옆에 달라붙어 옹기종기 모인 채로 협찬 목록을 살펴봤다.

“나 여기 알아! 여기 할까?”

“여기 옷 구려.”

“여기가 뭐 어때서!”

“옷에 구멍 뚫려 있잖아. 여기 싫어. 절대 싫어.”

명품이라고 해봤자 몇 개의 유명 브랜드만 아는 탓에 적극적으로 협찬 목록을 보는 멤버들과 달리 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애들이 말하는 걸 듣기만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몰랐는데 남은규가 의외로 명품 쪽으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어! 이 브랜드도 있네? 이거 좋아. 요즘 핫하게 뜨는 브랜드거든.”

“난 여기 처음 듣는데.”

“여기 디자이너가 남자 의류로 유명해졌어. 여성 의류가 중심이기는 한데, 남성 의류를 낼 때 너무 예쁘게 잘 뽑아주거든. 그래서 나도 몇 개 구매한 적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남은규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언급 될 거라는 걸.

“브랜드 이름이 안나야? 특이하네.”

“여기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됐어. 그래서 관심 있는 사람 아니면 모를 거야. 이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냐면 요즘 젊은 남녀 사이에서 막 대세? 그런 느낌이랄까? 막 뜨고 있는 브랜드 말이야. 그런 곳이야.”

“우리처럼?”

“어! 우리처럼. 여기 분명 잘 될 곳이야. 여기가 아직 뜨기 전에 미리 선점을 해서 좋은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 있지 않겠냐구.”

남은규의 때 아닌 연설에 다들 눈이 댕그래졌다.

“너 패션에 많이 진심이구나?”

“흠흠.”

남은규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멤버들도 남은규가 이렇게 나오니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이름이 좀 별론 것 같은데.”

“거기 대표 이름이 조안나야. 대표가 자기 이름 따서 브랜드 만든 거거든.”

“조안나? 뭔가 낯이 익는데…?”

“기억 안나? 우리 옛날에 만난 적 있잖아. 프리작 화보 촬영 하면서.”

“어? 그때 만났던 그 디자이너님? 설마 그분이 하는 곳이야?”

남은규의 입에서 나온 조안나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조안나?’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심장이 찌르르하게 울린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던 그녀에 대한 소식인데, 이런 식으로 근황을 알게 될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헤어지지 않아도 될 인연이었는데….’

그녀와 헤어졌을 당시에는 아이템을 사용한다는 걸 숨겨야 했을 때였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절대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거다.

조안나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남은규에게 질문했다.

“그 사람이 브랜드를 만든 거야? 회사 대표?”

“응. 나 베이지색 코드 알지? 우연이가 예쁘다면서 빌려달라고 졸랐던 거. 그 코트가 이 브랜드 거야.”

“아~ 그거 엄청 예뻤는데!”

“그래, 인마! 그거야.”

“그럼 저 찬성할래요!”

기억을 떠올려보는데 생각나는 게 없다.

남자 착장 따위 알게 뭔가.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게 아니었는지 기억이 난다며 인터넷을 뒤지더니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오~ 이거 그 배우짤 아니야?”

“넵.”

‘남은규 배우짤’로 팬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던 사진이 있는데 그때 입었던 옷이 ‘안나’에서 구매한 옷이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여길 그렇게 칭찬했던 거구나?”

“…개인적인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닌데, 진짜 진심으로 여기 남성 의류 잘 뽑아.”

멤버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협찬 요청에 그녀의 입김이 들어갔을까?

홀로서기에 도전해서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했으니 아마 굉장히 바쁘게 생활하고 있을 거다.

이번 협찬 제안이 조안나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지 아닌지.

그 진의를 알고 싶었다.

‘협찬을 아무 이유 없이 한 건 아닐 텐데. 그렇다고 당장 찾아가기도 뭐하고….’

내가 조안나를 포기했던 건 그녀와 도저히 관계를 이어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활해야 하는 곳과 내가 생활해야 하는 곳이 너무 멀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기에 그녀와 재회한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게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는 건 좋은 일이야.’

나는 생각 정리를 끝내고 내 의견을 멤버들에게 말했다.

“나도 여기 괜찮은 것 같아.”

“어…그럼 투표할까? 누구누구 찬성인 거야?”

멤버들끼리 찬성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투표를 했다.

찬성 5표, 반대 0표, 기권 1표로 깔끔하게 브랜드 ‘안나’의 협찬을 받기로 했다.

결과를 확인한 매니저 누나가 물었다.

“더 유명한 브랜드도 있는데 여기로 괜찮겠어?”

“여기가 요즘 대세래요. 인연도 있고, 은규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거 보면 그만큼 괜찮은 곳인 거겠죠.”

“협찬 받는 곳도 옷 스타일이 잘 맞는 곳이랑 하면 좋잖아요. 여긴 우리 그룹이랑 잘 맞을 거에요. 남성의류 진짜 잘 뽑는다니까요? 누나, 제 눈 믿어주세요.”

유명 브랜드의 협찬을 받으면 그 브랜드의 이름값에 우리 그룹이 얹혀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협찬 받은 모델이 브랜드의 이름값에 묻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모델에게 거는 조건도 굉장히 까다롭고 말이다.

반면 ‘안나’라는 브랜드처럼 슬슬 이름을 알려가는 브랜드는 모델이 브랜드의 얼굴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마치 커피 카O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연예인으로 다들 공O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 그럼 이걸로 하나 결정! 사실 여기가 신생인데 조건을 엄청 잘 넣어서 괜찮게 본 곳이긴 해.”

남은규는 브랜드 ‘안나’가 선택 됐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아까 전부터 멤버들에게 말했던 칭찬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서도 한동안 다른 협찬들을 고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협찬 얘기가 끝난 이후에는 3라운드에 관련 된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감에도 불구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없었다.

다들 2라운드에서 보여주었던 뮤지컬 이상의 임팩트 있는 무대를 제안한 사람이 없었다.

“시청자들 눈도 높아졌지만, 우리 눈도 많이 높아진 것 같아. 의견 나오는 것마다 다 별로인 걸 보면.”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내일 다시 회의하자. 대신, 다음 회의 때까지 3라운드 때 뭐할지 1개 이상은 생각해와.”

“아아아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오~! 해솔이 형! 뭐 생각 나는 거 없어요?”

“야. 언제까지 해솔이한테 업혀갈 거야? 쟤가 1라운드, 2라운드 전부 아이디어 냈잖아. 이젠 우리도 기발한 생각 좀 낼 때 안 됐어?”

“…그렇긴 한데.”

멤버들도 경태 형의 말에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이거나 머리를 긁적인다.

“아무나 의견 내면 되지, 뭐 그런 소릴 해.”

“우리가 너한테 면목이 없어서 그래. 네가 좋은 아이디어를 계속 냈잖아.”

“내가 뮤지컬을 생각해내긴 했어도 그걸 구체화한 건 멤버들이잖아. 누가 더 열심히 했니 뭐니 따지기 시작하면 괜히 상황 복잡해져. 그러지 마. 지금 중요한 건 3라운드를 어떻게 치를 거냐는 거야.”

나도 열심히 고민하고 있기는 한데….

‘생각이 안 나.’

영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는다.

주변 반응이 너무 좋아서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머리가 돌아가는 게 느려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바람 쐬면서 정신을 좀 환기 시키는 게 직빵인데.’

고뇌하고 있는 멤버들의 눈치를 슬쩍 봤다.

“나 먼저 쉬러 올라간다. 너희들도 계속 앉아만 있지 말고 머리 좀 환기시켜.”

“아, 그럴까?”

“회의 끝! 파장! 내일 일찍 다시 모이자. 아이디어 1개씩! 잊지 마.”

“으아아아~!”

멤버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기 위해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잽싸게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아니, 정확히는 도플갱어 인형을 침대 위에 눕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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