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58화 (258/849)

〈 258화 〉 #38. 여파 (3)

* * *

보통 도플갱어 인형을 놓고 호텔을 혼자 나설 때는 내 여자들 중 한 명을 만나러 가기 위함인 경우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나왔다.

내 최애템 안경을 끼고 바깥으로 나온 나는 포니의 상사인 칠리에게 받았던 좌표로 이동을 했다.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어스타가 끝나면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는데, 새로운 자극이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한 번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받은 건 써먹어야지.’

칠리씨에게 받은 아이템이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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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굴과 목소리를 바꿔주는 ‘인면피구’

2. 임신 가능성을 50% 올려주는 ‘한방에 쏴’

3. 이성의 호감도를 올려주는 ‘페로몬 향수’

4. 지정 대상의 위치를 알려주는 아이템인 ‘GPS U907’

5. 반나절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어주는 ‘앗차! 그건 흑역사야!’

6. 상대방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내 눈을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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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템을 다 사용해서 여자를 임신시키고 기억을 지우라는 뜻일 것이다.

아이템을 받고 보니 연주 누님이 왜 ‘당시 기억이 흐릿하다.’ 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때에도 이 아이템에 당해 기억이 흐릿해졌을 것이다.

“저 여자인가?”

이동하자마자 여자와 바로 만날 순 없었다.

근처로 이동했기 때문에 누가 지정 대상인 여자인지 찾아야 했다.

위치가 계속 이동하고 있었기에 천천히 GPS를 따라가면서 여자를 찾아나갔다.

그리고 비로소 한 여자의 움직임이 GPS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확인 됐다.

칠리씨에게 받아 본 적 있는 사진과 외모를 대조해보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여전히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퇴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인에, 주근깨 있는, 붉은색 머리의 21살의 적당히 예쁜 여자.

자취를 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한 지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성격이 특별하게 나쁘거나 특별하게 착한 편인 것도 아닌 여자.

저 여자는 뭐가 특별하기에 칠리씨로부터 선택을 받은 걸까?

그녀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인생에 남자와 가까워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사귄 경험 0

성관계 경험 0

남자에 면역력이 없으니 접근하는 건 무척 쉬울 것이다.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오랜만에 여자를 꼬셔야 한다고 하니 긴장이 된다.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 선다.

길거리에 서 있으니 낯선 언어가 귀에 들어온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버스에 올랐다.

그녀를 볼 수 있는 뒷자리에 앉았다.

살짝 늦은 퇴근 시간.

버스에 탄 사람들의 얼굴엔 지독한 피로가 가득하다.

‘저 얼굴 잘 알지.’

나도 왕년에는 자주 해봤던 얼굴이다.

어쩐지 숨이 턱 막힌다.

저들이 어떤 심정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칠리씨가 지정해준 대상의 여성이라고 해서 달랐던 건 아니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 세상의 재미라곤 없어 보이는 모습.

대학교에 다니는 젊은 여대생의 모습이라기엔 이질적이다.

‘아르바이트가 많이 피곤했나?’

내릴 곳에 도착했는지 여자가 버스에서 내린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버스에 함께 내렸다.

또각­ 또각­ 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다.

낡은 빌딩 안으로 그녀가 들어간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덧 검은 봉다리가 들려있었다.

아마 저 봉다리에 담긴 물건이 그녀의 저녁이 될 것이다.

낡은 빌딩 안으로 들어가 버린 그녀.

“흠.”

나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우뚝 멈춰섰다.

당장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은 것은 언어 때문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데 뭐 어쩌겠어.’

나에페로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그녀와 연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나에페로어’를 익혀놔야 했다.

상점에서 구매를 할까 싶다가도 이걸 왜 내 돈으로 하나 싶어서 나중에 포니에게 뜯어내기로 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네. 역시 얼굴만이라도 보러 오길 잘 했어.’

말 한 마디 못 걸어봤지만,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방법이 떠올랐다.

일단 저 침울한 여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게 있었다.

‘남자랑 연이 한 번도 없는 여자는 꿈꾸는 게 있는 법이지.’

나는 그 꿈을 그대로 현실로 끄집어내서 그녀 앞에 나타날 생각이었다.

‘완벽한 왕자님이 되어줄게요.’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를 가진 채 접근해서, 신분을 숨기고 만나 임신을 시켜야 한다.

칠리씨는 기억을 흐리게 해서 관계를 끊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꾸준히 그녀 앞에 나타날 생각이었다.

‘진짜 신분은 아니어도 여기에 기반을 갖고 있긴 해야 돼.’

나는 인적이 없는 어둑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잠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 ? ?

란나는 오랜만에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대학교에 가면 남자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초과에 온 바람에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대학교에 와서 그녀가 느낀 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진짜 힘들다.’

선생님에게 듣던 대학교의 훈훈한 생활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내 님이 있을 줄 알았던 곳은 고등학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학 생활이 더 팍팍했다.

어릴 땐 공부만 하면 됐는데 대학교에 들어가니 공부에 치이고, 조별과제에 치이며, 아르바이트에 치여야 했던 것이다.

‘저 사람이 내 남친?’

팍팍한 현실을 살던 그녀에게도 빛이 내려왔다.

바로 꿈속에서.

‘란나야!’

남자 친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남자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꿈이었으니까.

소개팅 때문에 조별과제 모임을 펑크냈던 대학교 동기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등장하자 넋을 놓는다.

‘뭐, 뭐야? 설마 네 애인이야?’

훗!

‘자기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깜짝 이벤트랄까? 보고 싶어서 왔어.’

‘저, 저, 정말 이분이 정말 네 남자친구라고? 아니, 왜? 어떻게??’

소개팅으로 만났던 남자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줬다가 차인 동기가 울부짖는다.

란나는 동기의 절규를 모르는 척 하며 남자 친구의 품에 쏙 들어가 안겼다.

‘아잉~! 나도 보고시퍼쪄여!’

‘꺄악! 이건 꿈이야! 나도 없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호호호! 이게 왜 꿈이야? 이렇게 내 앞에 떡하니 있는데!!’

이상하게 동기의 말에 심장이 뛰었다.

마치…정곡이 찔린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 오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불안감이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내 남자친구가 맞았다.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 만큼 잘 생기고, 귀여운데다 날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남자친구!

‘수업 다 끝난 거지? 데이트 하러 가자.’

‘헉! 데, 데이트? 나랑 데이트 하는 거야?’

남자랑 데이트를 한다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당연하지. 우리가 데이트를 안 하면 누구랑 하겠어.’

란나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데이트라면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불안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 챈 남자 친구가 따스하게 위로를 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오늘 데이트 코스 다 짜왔어.’

‘어쩌어엄!!! 네 남자친구, 마음도 엄청 넓잖아?’

동기가 부러움에 질투 나 죽으려고 한다.

그녀는 행복감에 저도 모르게 헤실헤실 미소가 나왔다.

“헤…ㅎ…헤….”

란나의 남자친구가 그녀를 이끈다.

놀랍게도 그곳은 평소 애인이 생기면 꼭 함께 가고 싶었던 놀이공원이었다!

‘여,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 애인 생기면 꼭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애인이잖아. 애인인데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지.’

‘꺄아앗!’

놀이공원에 도착한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오른다.

너무 행복했다.

굳이 기구를 타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이후로 장소가 휙휙 바뀌며 란나는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겼다.

그리고 데이트의 끝에서….

“헤…헿…흐…가만…히…헤…누나가아….”

다 알아서 해줄게.

남자친구의 옷이 벗겨진다.

뽀얀 살결이 드러나고, 탄탄한 가슴에 톡 하고 튀어나온 유두가 보인다.

꿀꺽­

‘아…근데 돈은 어떡하지? 이번 달 생활비 빡빡한데….’

모텔비가 얼마더라?

꿈에 그리던 처녀딱지 떼는 날.

섹스를 앞둔 그녀의 머릿속에 ‘돈 걱정’이 밀려든다.

시계를 본 그녀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그녀는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이야.’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 친구와 사귀는 건 좋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런 걸 여기서까지 걱정해야 해요?’

‘정말 미안해. 네 생일선물이라도 챙겨주려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해….’

‘하아~ 아르바이트 그만두면 안 돼?’

남자친구가 헤어지기 싫은지 떼를 썼다.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이 예쁜 걸 두고 돈을 벌러 가야한다니!!

그때, 남자친구가 초롱초롱한 고양이 눈빛을 하더니 그녀에게 매달렸다.

‘돈은 나한테 많아. 데이트 비용 같은 거 다 내가 낼게! 그럼 되는 거잖아!’

‘안 돼.’

그럴 순 없다.

아무리 그가 돈이 많다 해도 여자가 되어서 남자에게 빌붙을 순 없는 거다.

‘엄마가 날 그렇게 한심하게 키우지 않았어!’

‘…그래? 의외네. 이걸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어?’

남자 친구가 이상한 소릴 한다.

이질적인 말을 분명 들었지만, 그녀는 재차 되물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어. 왕자님 같은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지?’

‘어?’

‘그럼 이건 어때?’

휘익!

장면이 바뀐다.

그녀가 아르바이트 하는 고깃집이었다.

지긋지긋한 고기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자기야~?’

‘핫! 까, 깜짝이야.’

뒤를 돌아보니 그녀의 남자친구가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똑같은 직원 복장에 앞치마를 입고 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나도 여기서 일하니까.’

‘아…그랬었나?’

‘우리 여기서 만나서 사귀게 된 거잖아. 왜 그래?’

‘맞아. 우리 그렇게 만났지.’

란나는 남자친구의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힘든 대학 생활 중 유일한 빛이 되어 준 게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자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흔치 않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먹으며 탱자탱자 노는 다른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부지런하고 착한 친구였다.

‘아…근데 피곤해 죽겠는데 내가 얘랑 왜 연애를 시작했지?’

어쩐지 두근거렸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에 남자친구와 함께 있어서 그런 걸까?

‘이건 또 아닌가보네. 흠.’

또 다시 휙 하고 배경이 바뀐다.

그렇게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완벽한 남자친구를 만났다.

‘오케이, 기다려요. 만나러 갈 테니까.’

란나는 남자 친구와 손을 맞잡은 채로 행복하게 웃었다.

‘네, 기다릴게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나만의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

란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뚝, 뚜욱, 뚝….

“어? 뭐지?”

깨어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란나는 당황하며 본인의 눈물을 닦아냈다.

“뭔가좋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눈물이

날까?

아무도 없는 휑한 자취집은 항상 그녀가 보아오던 광경이었다.

'다른 날과 다를 바가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난히 춥고 외롭게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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