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40. 결승 (4)
* * *
란나는 손님들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은 어메이징 스타 시즌11의 마지막 결승 무대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커피나 타고 있고. 나한테 저런 건 다른 세계 얘기니까.’
란나는 그런 프로그램을 볼 바에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요즘엔 굳이 프로그램을 다 보지 않아도 유티비에 하이라이트만 편집해서 보여주기에 친구들과 대화하는데 큰 문제도 없었다.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필요한 무대 정도만 봐주면 되는 일인 것이다.
다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누가 승리할지 결과 자체는 궁금했다.
‘에어플레인이 이기겠지?’
여자들이 환장할 얼굴을 가진 아이돌이니 분명 투표수에서 줌베이가 밀릴 것이다.
비주얼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실력까지 가졌으니 애초에 줌베이가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걔네들보다 사장님이 더 잘 생겼는데...앗!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주책맞게 엉뚱한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세상에, 젝슨 빌이라니!”
“춤 너무 잘 추는데? 환상적이야!”
“분명 얘네들이 1등할 거야. 장담해.”
“무조건이지! 일단 너무 잘 생겼잖아! 얘네한테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일 거야.”
원하지 않았던 스포를 당해버린 란나는 젝슨 빌이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솔깃해졌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아! 감사해요~”
“맛있겠다.”
꺄르륵 웃으면서 가게를 나가는 사람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커피를 가져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평소 그런 모습을 보면 항상 부럽고 배가 아팠는데, 이젠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지가 않았다.
란나는 현재 자신의 삶이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얼굴을 너무 오랫동안 못 봤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복에 겨운 투정이지.’
사장님이 바쁘긴 한지 그녀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기본 3~4시간은 걸려서야 겨우 답장을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나가 서운하지 않은 것은 바쁜 와중에도 절대 그녀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고, 시간이 지나니 그날의 일이 더 알쏭달쏭해졌지만, 꾸준히 자신과의 연락을 신경 쓰는 걸 보면 마냥 헛된 꿈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60초 후에 공개라니! 너무하잖아!!”
버럭!!
사장님에 대한 생각으로 한 눈을 팔고 있던 그녀는 화들짝 손에 쥐고 있던 에스프레소를 놓치고 말았다.
‘에이씨.’
그놈의 어스타가 뭐라고.
다른 나라 프로그램을 비싼 돈 들여서 수입해 방영하는 방송국도 마음에 안 들고, 그거에 푹 빠져서 저렇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서 누가 우승하든 그녀의 삶이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어스타에 신경 쓸 시간에 카페 운영에 더 심열을 기울여야 했다.
‘카페 손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
사장님은 운이 좋게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번화가에 건물을 소유하고 계셨다.
적당히 커피 맛만 잡아줘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사장님이 가게에 왔을 때 몰려드는 손님의 수는 못 된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일정 금액 이상의 수익을 매일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지비 이상으로 벌리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란나는 우리 카페에 부족한 부분이 뭐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테이크 아웃만 가능한 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2층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쓰지를 않았다.
그녀는 사장님에게 허락을 받아 카페에 당연히 있어야 할 테이블과 의자를 놓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를 구하면 카페 인테리어도 조금씩 손을 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공금을 써야 해서 혼자 결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 진지하게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란나는 자신에게 믿고 맡겨준 사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래 다니고 싶어.’
그 아름다운 얼굴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카페에서 일하는 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사장님 얼굴이 큰 복지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흔히 올 리가 없으니 있을 때 잘 하자는 게 그녀의 마음가짐이었다.
? ? ?
어메이징 스타 시즌 11이 끝났다.
1등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와우! 오늘 정말 멋졌어요.
젝슨 빌!! 그 친구가 환생해서 나타난 줄 알았다고!
어메이징 스타 시즌11의 승리자가 된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속사에선 우리의 1등을 축하하며 파티를 준비해줬고, 어스타 제작진 모두를 초대했다.
이야~ 대단한데?
오오! 맛있어!
그뿐만 아니라 탈락한 참가자들에게도 초대장을 날렸는데 참가한 사람도 있고 참가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들 축하 인사를 날려주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뵙네요. 잘 오셨어요.
이런 좋은 파티를 안 올 순 없죠.
그나저나 그 사람들은 안 왔네요?
유일하게 파티에 참가하지 않고, 축하 인사도 하지 않은 참가자는 스톤 밴드였다.
스톤 밴드 말하는 거죠?
그 사람들 요새 엄청 바쁘던데 여길 올 정신이 있을 리가 없죠.
안 오는 게 도와주는 거에요. 왔으면 파티장 분위기나 흐렸겠죠.
스톤 밴드는 스스로가 만들어냈던 각종 인성 짓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진실의 입이 멈추질 않아서 자극적인 기사를 내기 위해 찾아 온 기자들에게 거침없는 인성질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뿐이랴?
복잡한 여자관계도 문제가 됐다.
그들이 아무리 잘 생기고, 실력이 좋은 밴드라 해도 각종 이슈를 이겨내고 재기하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안녕? 잠깐 얘기 좀 나눌까요?
스톤 밴드가 난리 난 건 난리 난 거고, 어스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신나 있었다.
우리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각자 친해진 참가자들끼리 뭉쳐서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가졌다.
1등을 해서인지 우리 멤버들 주변에는 유난히 많이 사람이 몰렸다.
내 주변에도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과할 정도로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거절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한참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아 넘기다가 겨우 한숨을 돌리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잠깐 사이를 참지 못하고 또 다시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스캔들로 나를 골치 아프게 했던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
어스타 끝났으니까 잠깐 대화는 괜찮은 거 맞죠?
그런 걸 생각해서 그동안 말을 안 걸었던 거였어요?
어설픈 내기였어도 내기는 내기잖아요. 졌으니 깔끔하게 떨어진 거에요. 덕분에 이제야 말하네요. 마지막 무대 정말 잘 봤어요. 에어플레인이 1등하니까 우리 면이 좀 살더라고요. 덕분에 욕을 덜 먹겠어요.
올리비아 트리는 안일하게 무대를 준비했다는 억울한 누명으로 욕을 엄청 먹었었다.
물론 올리비아 트리를 질책하는 기사는 금방 들어가긴 했어도 무대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이미지는 여전히 그녀들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1등을 하게 되면서 올리비아 트리의 패배가 어느 정도 보정이 되는 효과를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말을 걸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괜히 싫은데 말 걸어서 더 민폐 끼치는 건 아닌가 싶고요.
항상 당당하던 사람이 갑자기 약하게 나오니까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더군다나 올리비아는 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지난 만남 때 우리에게 사용했던 가벼운 말투를 떠올려보면 엄청난 변화였다.
말투에서 나를 존중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 반성 많이 했어요. 좋은 관계가 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는데, 그게 그런 식으로 번질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알고 있어요. 그게 경솔하고, 잘못 된 행동이었다는 걸요.
그동안 자신의 관심을 싫어하는 경우를 못 봐서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고 변명한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더군다나 소속사에서 잘못 대처해서 많이 곤란했다고 들었어요. 꼭 사과하고 싶었는데 어스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한테 찾아가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올리비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에게 따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관심을 끊은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이대로 관계를 끝내도 괜찮은 상황이긴 했죠. 평소 저였으면 이렇게 따로 사과를 할 생각은 안 했을 거에요.
…….
올리비아는 남자관계에 있어서 을이 된 경우가 적었다.
가진 게 많은 그녀는 싫다는 남자를 붙잡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을 이대로 놓치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남자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건 정말 처음이에요. 이런 내가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워서 한참이나 고민했어요.
올리비아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자신이 경험했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에 대한 관심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결국 사과를 하고 관계를 다시 이어볼 결심을 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조금만 배려 해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관계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어요.
기대감을 담아 조심스럽게 묻는 올리비아.
그녀는 육감적인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파격적인 파티 복을 입고 있었다.
허벅지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타투는 섹시한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고, 시원하게 올려 묶은 머리 덕분에 드러난 목선은 당장이라도 깨물어서 내 흔적을 남기고 싶게 했다.
아마 내가 바란다고 하면 저 아름다운 여자는 기꺼이 침대 위로 나를 이끌 것이다.
글쎄요, 이미 지난 일이 다시 꺼내지는 게 좀 당황스럽네요. 그런다고 우리 관계가 바뀔 수 있을까요?
나는 관계하는 여자를 더 늘릴 생각이 없었다.
특히 올리비아 같은 스타일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다져가는지가 중요하죠! 사실 성격상 말만으로 사과하고 끝내는 건 별로라서 보상을 준비했어요.
‘보상을 준비했다고?’
이건 좀 솔깃하다.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올리비아가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보니 보상으로 준비한 게 정말 대단한 거긴 한 모양이다.
‘재벌집 딸인데 보상을 대충 준비하진 않았겠지.’
나 혼자만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멤버들도 다 피해를 봤는데 내 기분 따져서 안 받을 순 없었다.
받아줄 거죠?
재차 묻는 올리비아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피해를 저 혼자 받은 것도 아니고, 멤버들도 피해를 받았으니 보상을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그럼 이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좋게 푼 거 맞죠?
올리비아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보상을 받는다는 건 화를 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풀겠습니다.
그러면…전화번호를 물어봐도 될까요?
내 화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서야 드디어 그녀의 목적이 튀어나왔다.
전화번호 정도야 못 줄 것이 없었기에 순순히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핸드폰 주세요.
꺅! 고마워요!
올리비아가 잽싸게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그녀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고 돌려주자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핸드폰을 두 손으로 받아간다.
연락하면 받아줄 거죠?
물론이죠.
고마워요! 하~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네요.
올리비아가 행복해 하고 있는 중, 강준이 불쑥 찾아왔다.
“형?”
“어, 왔어?”
“무슨 일이야? 괜찮아?”
아무래도 강준은 올리비아가 나랑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준! 잘 지냈어요?
올리비아는 강준이 왜 다급하게 다가왔는지 눈치 챘으면서도 능청을 부리며 인사를 했다.
나는 강준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사과하러 왔어.”
“스캔들?”
“응.”
“받아줬어?”
“보상 준다고 해서.”
“보상? 웬 보상?”
“그러게. 뭘 줄지 몰라도 기대하는 중이야.”
“사람들이 여길 막 쳐다보더라고. 그래서 깜짝 놀라서 왔어.”
“아, 정말 그러네.”
몰랐는데 주변을 살피니 우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은근히 많았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낫겠지?”
“그러면 나야 좋지.”
우리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올리비아는 더 대화를 나누기 힘들어보였는지 말했다.
멤버분이랑 대화 나눠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아, 그럴까요?
네. 주변 시선도 있으니까요.
그녀도 뒤늦게 주변 시선을 알아챘던 모양이다.
올리비아가 자리를 피해주자 우리를 지켜보던 시선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저 여자가 또 형한테 추근댔어?”
“응.”
“받아줄 거야?”
“아니.”
“???”
강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보상 받는다며.”
“응.”
“???”
강준과 올리비아는 보상을 받는 것을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착각이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보상은 우리가 받은 피해에 대한 대가잖아.”
“아.”
“올리비아랑은 ‘친구’로 잘 지낼 거야.”
그녀가 바라던 일은 아니겠지만, 보상의 대가로는 친구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 대답을 들은 강준이 나를 사기꾼 보듯이 바라봤지만,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찔러서 응징하는 것으로 갚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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