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42. 연말 (1)
* * *
“조연주 이사님 말씀으로는 너희들한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거절하지 않고 받겠다고 하셨어.”
“저희도 불만 없어요.”
“컨셉이 어떻게 돼요?”
“정확한 컨셉은 들어봐야 아는데, 대충 너희가 향수 그 자체가 되는 거라던데?”
“우리가 향수가 된다고요?”
“뭔가 멋진데?”
“향은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에요?”
“글쎄다. 그 부분은 물어볼게. 근데 보통 색깔로 결정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각자 어울리는 퍼스널컬러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향수가 나오기 전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이번 촬영은 비주얼이 진짜 중요하거든? 앞으로 너희들 집중 관리 들어갈 거야. 표정 연습도 자주 하고, 향수 모델들이 어떻게 찍었는지 연습도 하고 그래야 된다?”
“네엡.”
“그래서 이거 언제 찍는 거에요?”
“크리스마스 한정 기획 향수니까 얼마 안 남았지.”
그날 이후로 우리들의 얼굴에는 각종 식물들로 떡칠이 됐다.
향수 화보 촬영이 있는 날까지 계속해서 말이다.
? ? ?
정신없이 스케줄을 치고 다니니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순식간에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20일이 됐다.
연말이라고 길거리엔 반짝이는 장식물들이 흔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들어 온 국내는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날씨도 그렇고, 건물 풍경도 그렇고.
“크리스마스라는 게 확 와 닿네.”
“내년에는 이맘 때 캐롤 내고 싶다.”
“캐롤 좋지.”
오늘 스케줄은 딱 한 가지였다.
팬들과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준비한 라이브 방송이다.
“사실 홍보 목적이지만 말이지.”
“정말 흉악한 일이네. 팬들을 위한 라이브 방송이래놓고 사실은 홍보가 목적이라니.”
“이런 핑계라도 있어야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좋게 생각하자. 미안한 만큼 알차게 방송하면 되는 거고.”
한 달 전 찍었던 향수 광고가 10일부터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고 있었고 20일인 오늘, 드디어 한정판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다.
라이브 방송이 시작 되자 빠른 속도로 팬들이 들어온다.
한국말도 있고, 영어도 있고, 다양한 나라의 말들이 섞여서 채팅창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행복해하는 팬과 인사를 나누고 근황 토크와 더불어 라이브 방송을 위해 준비했던 캐롤송을 불러주며 시간을 보냈다.
소속사에서 주문한 향수 홍보 목적도 빠트리지 않고 수행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라이브 방송을 즐겼다.
‘처음에는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채팅 때문에 정신없었는데. 악플다는 놈들도 거슬렸고.’
뛰어난 신체 능력은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놓치지 않았고, 덕분에 악플도 선플도 모두 머릿속에 기억하게 만들어 사람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간간히 올라오는 악플보다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선플에 집중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인정하고부터는 라이브 방송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불러주는 노래와 얼굴 한 번 비춰주고 말 한 마디 더 해주는 것으로 행복 하는 순수한 팬들의 채팅을 고작 악플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지 않은가?
‘아이돌은 멘탈이 좋아야 한다니까.’
그렇게 열정적으로 라이브 방송 진행하던 중.
갑자기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우리가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사이, 한정판 판매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아, 뭐야! 못 샀어!
아악! 왜 이렇게 빨리 팔리는 거야?
거의 1분 컷인 것 같은데?
안 돼! 한정판 브로마이드!! 내 돈 가져가 달라구!
돈이 있는데 왜 못 사냐고.
해외 판매 너무 힘들어ㅠㅠㅠㅠㅠㅠ
Take my money!!!!!!!!!!
“어…한정판 향수 판매가 시작 됐나 본대요?”
우르르 쏟아지는 채팅창에 압도 된 우리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어색한 미소로 말하는데, 때마침 매니저 누나가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얘들아! 향수 다 팔렸댄다.”
“헉! 정말요?”
“우와!”
그쪽 회사에서 정확한 캐파를 알려주진 않았지만, 물량이 꽤 많았을 거다.
워낙 향수로 유명한 회사의 상품이라서 가격대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ㅠㅠㅠ 못샀어!
더줘어어!!!
주인장!! 문 열어어어!!
아싸!!!!!!!!! 샀다!
아…서버 시발.
그런데 우리 팬들에겐 그 수량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들 못 샀다면서 울고 있었다.
“향수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야! 누가 승리자냐고!
여긴 전부 패배자들 뿐인가? (·?·)
나!! 나 구매 성공했어요! 꺄아아악! 너무 기대 된다!!
브로마이드 사진 공유좀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오! 저기 구매하신 분 있네요.”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특별 한정판이라서 향수를 구입하면 우리가 촬영했던 브로마이드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는데, 팬들은 그걸 꼭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향수를 사면 브로마이드가 딸려 오는 느낌이 아니라 브로마이드를 사면 향수가 따라오는 느낌으로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해주는 팬들이 너무 고마웠다.
일단 해외에서 판매를 하는 상품이라서 구매 절차가 까다로운 상품이었다.
복잡한 절차를 다 걸치고서라도 향수를 구매하려 해준 팬들이 너무 고마워 멤버들과 나는 진작 종료했어야 할 라이브를 더 끌고 가서 캐롤을 좀 더 불러주었다.
“구매하지 못한 분들도 너무 서운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좀 더 열심히 활동해서 자주 찾아 뵐게요!”
국내 활동이 너무 없어서 슬펐어.
연말 끝나고도 해외에서 활동하는 거야?
언제 컴백해요?ㅠㅠㅠ
해외에서 돈 엄청 빨고 있을 텐데, 국내 활동을 할 리가 없지 ㅋㅋ
노래 해주세요!!!
향수가 다 팔렸다는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가벼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해외에서 너무 잘 되고 있어서 소속사는 우릴 국내로 돌릴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국내 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국내보단 해외시장을 노릴 필요가 있어보였다.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안녕~!”
“다음에 또 만나요.”
“바이바이.”
“해피 크리스마스~!”
언제까지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을 순 없었기에 꽉 채운 2시간 30분의 방송을 종료했다.
방송이 끝났음을 확인하자마자 우리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휴가다아~!”
“오예!”
소속사가 연말이라고 우리에게 거하게 휴가를 주었다.
사실 연말은 우리에게 정말 바쁜 시간이어서 이렇게 거한 휴가를 받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특히 연말에 준비해야 하는 스폐셜 무대.
‘진짜 빡세지.’
스폐셜이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돌 멤버와 무대를 꾸며야 해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도 쌓이고, 특별한 무대를 해야 한다며 무리한 연출을 시도하는 바람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이번 년도는 우리 노래가 제대로 대박이 터져서 꽤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소속사에서 힘 써준 덕분에 귀찮은 스폐셜 무대를 안서도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런 걸 요즘 말로 ‘개꿀 빤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메이징 스타의 여파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미치고 있어서 사방에서 섭외가 들어왔었다.
소속사는 이번 연말에 우리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국내 방송사와 거래를 했다.
미리 국내로 들어가 방송 스케줄을 치르는 대신 스폐셜 무대에서 빠지는 것으로 말이다.
한참 해외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방송국에 우리 얼굴을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 방송국은 흔쾌히 거래를 수락했다.
‘방송 스케줄이 좀 힘들긴 했지만, 휴가를 얻었으니까.’
이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까 방송 채팅에서 우리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그립다고 했던 팬들은 곧 소원 성취 할 수 있게 될 거다.
“우리 소속사가 확실히 복지가 좋아.”
“맞아, 쉴 때 쉬게 해준다는 게 진짜 좋은 거거든.”
“나 먼저 간다! 다들 휴가 몸조심하면서 보내!”
제일 먼저 숙소를 나간 건 경태 형이었다.
뭐가 저렇게 바쁜지 미리 챙겨 둔 짐만 홀딱 들고 숙소를 나간 것이다.
다른 멤버들도 경태 형이 먼저 사라지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휴가 끝나고 만나여!!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보내.”
“형도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나도 오랜만에 얻은 거한 휴가 기간이 무척 기꺼웠다.
26일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알차게 보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일단 나도 멤버들처럼 숙소를 나와 주아 누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온 집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도 크리스마스 연말이 성큼 찾아왔던 것이다.
“어서 와, 해솔아~! 보고 싶었어!”
정화씨가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정화씨, 오랜만이에요.”
그녀가 내 품에 안겨 고개를 휙 올리더니 입술을 쭉 내민다.
키스해달라는 뜻이었고, 나는 기꺼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쪽쪽쪽쪽!
뽀뽀를 시작으로 좀 더 진하게 서로의 숨결을 나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으려던 순간, 태양이가 아장거리며 나타났다.
“세상에, 태양이 정말 많이 컸네.”
사실 일주일 전 새벽에 짧게 와서 잠든 태양이를 보고 가긴 했는데, 이렇게 밝은 시간에 태양이가 아장거리면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손을 씻고 나와서 태양이를 안아들고 재회를 만끽했다.
누굴 닮았는지 태양이의 미모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태양이는 어째 나날이 잘 생겨지네요. 나중에 엄청 피곤하겠어요.”
“후후후, 사실 태양이 좋다고 쫓아 다니는 여자애들이 한 둘이 아니야.”
“벌써부터요?”
정화씨에게 들어보니 태양이를 벌써부터 찜꽁해놓은 누나들이 많단다.
“응. 나중에 태양이 신랑 만들 거라면서 침 발라놓은 여자 만해도 일곱 명이 넘어.”
“와우.”
이 녀석,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이런 싹(?)을 보이다니.
역시 내 아들이구나 싶다.
범상치 않은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태양이를 어화둥둥 엉덩이를 토닥여주면서 놀다가 정화씨에게 붙잡혀 주방으로 왔다.
이미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는데, 나는 그걸 보고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에는 음식이 참 잘 돼서 나오는 것 같아요.”
“…조용히 하고 먹어. 안 그럼 다음에는 내가 직접 만들어줄 거야.”
“죄송합니다!”
그닥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먹기 시작하니 잘만 들어갔다.
“근데 누나는요?”
“요즘 주아 되게 바빠. 연말이라서 더 그런가봐. 이곳저곳 부르는 곳이 많대.”
“누나 인기 많다는 건 들었어요.”
주아 누나는 역시 오래지 않아 감독들의 눈에 띄였다.
사실 묻히기 어려운 얼굴이긴 하다.
준수한 연기력에 압도적인 비주얼을 가진 주아 누나는 누가 봐도 조연이 아닌 주연감이었다.
결국 몇 번의 조연 출연을 발판으로 삼아 주연으로 캐스팅 된 주아 누나는 그 드라마에서 악독한 조강지처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악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말에 상을 기대해볼 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
악독한 집착 조강지처라서 너무 무섭지만, 한 번쯤은 누나한테 그런 집착을 받아 보고 싶다는 왜곡 된 성욕을 가진 남자들이 그녀의 팬이 된 것이다.
“누나 캐릭터가 시원시원해서 저도 마음에 들긴 하더라고요.”
“어머, 우리 해솔군도 그런 집착 받고 싶었던 거야?”
정화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마치 원한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주아 누나가 연기한 캐릭터니까 좋은 거에요. 드라마에서 보여준 것처럼 집착 받으면 큰일나죠. 애초에 정화씨, 그런 스타일 아니잖아요.”
내 주변 여자들이 하나 둘씩 죽어 나가는 꼴을 볼 순 없다.
픽션은 픽션으로 나둬야 가장 좋은 거다.
“후후후, 자기가 원한다면 못해줄 게 뭐가 있겠어요?”
“…….”
정화씨가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이 위험하게 눈을 빛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