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42. 연말 (4)
* * *
“아.”
머엉
휴가 첫날이 밝아왔는데 침대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몸이 피곤한 건 아니고, 정신적인 데미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직도 힘들어?”
주아 누나가 앞치마를 들고 나를 깨우러 왔다가 내가 눈을 깜빡이는 걸 보고 물었다.
어제 나를 잡아먹은 주아 누나는 얼굴이 멘들거렸다.
“누나는 왜 이렇게 멀쩡해?”
“어제 몸보신을 해서 그런가봐.”
“…….”
“아하하!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파티 준비해야 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파티를 하기로 했다.
복순 누나, 아현이, 민영 누나까지 모두 불러서 말이다.
주아와 정화씨는 요리를 만드느라 정신없었고, 파티 분위기를 내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엉기적거리며 몇 분을 더 침대에서 버티다가 정화씨가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깨워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오니 태양이가 TV에 정신이 팔려 있다.
내 자식은 오늘도 귀엽구나.
“태양이 잘 잤어? 태양아? 아빠 왔는데. 태양아?”
아빠가 인사를 하는데 TV에서 시선을 안 뗀다.
저놈의 펭귄보스가 뭐라고….
“태양이한테 펭귄보스는 못 당해. 그냥 포기하렴.”
정화씨가 펭귄보스를 보는 태양이 옆에서 알짱대는 날 보며 웃었다.
“쟤가 그렇게 대단해요? 아빠가 말을 거는데도 시선 한 번을 안 떼요.”
“그렇게 좋아해줘서 얼마나 다행이니. 펭귄보스는 엄마들의 워너비야.”
“크흠.”
정화씨의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아빠를 봐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육아에 도움이 되지 않은 아빠보다 펭귄보스가 더 대단한 게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씻고 나와 간단하게 밥을 먹은 나는 본격적으로 집을 꾸미는데 손을 보탰다.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순식간에 예뻐지네.”
허리까지 오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반짝이는 전구가 달리고, 황금별이 꼭대기에 걸린다.
사탕과 양말, 별 모양의 장식들이 트리에 콕콕 달리니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풍긴다.
그 외에도 풍선과 빨간 코 사슴 3마리가 마차를 끌고 있는 장식이 벽에 걸린다.
“꺄~!”
펭귄보스가 끝났는지 드디어 아빠를 봐주기 시작한 태양이를 품에 안고 장식들을 보여주니 좋다고 꺅꺅 댄다.
통통한 두 볼에 홍조가 도는데, 누구 자식인지 너무 귀여워서 뽀뽀를 안 해줄 수가 없더라.
“그러다가 애 볼 닳겠다.”
주아 누나가 시키는 건 안 하고 애를 끌어안고 뽀뽀만 주구장창 하고 있으니 잔소리를 했다.
“그냥 둬. 보고 싶었다가 이제 겨우 만나서 좀 붙어 있겠다는데.”
“나도 그래서 내버려뒀는데 계속 저러다간 태양이가 짜증낼 것 같아서 그런 거야.”
태양이도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반가워 열심히 받아주고 있기는 했는데, 슬슬 한계가 온 거다.
귀여워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태양이 표정을 확인하니 확실히 애가 처음보단 반응이 대충이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태양이가 귀찮아 할 정도면 어쩔 수 없지.”
태양이를 놓아주고 본격적으로 집을 꾸미는 것에 진심으로 움직였다.
“뭐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이것저것 사다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어. 재밌는 파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과했나봐.”
“전부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집이 엄청 넓음에도 불구하고 정화씨와 주아 누나가 사다 놓은 것들을 전부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걸 전부 쓸 크기는 됐지만, 그러면 오히려 지저분해보일 거다.
파티 준비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슬슬 한 명씩 집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민영 누나였고, 다음을 이어 아현이와 복순 누나가 왔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꾸며놨네.”
“괜찮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서 신나는 것 같아.”
“캐롤 틀어줘!”
아현이의 요청에 캐롤까지 트니 완벽한 파티 분위기가 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예상대로 진태양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부럽다.’
주아 누나와 내 얼굴을 반반 잘 섞어서 태어난 태양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기적이었다.
“너무 태양이만 예뻐하는 거 아니야? 나도 좀 예뻐해줘. 외롭다고.”
“태양이한테 질투해?”
“오랜만에 뭉쳤는데 나는 거들떠도 안 보고 다들 태양이 예뻐하느라 정신이 없잖아.”
“너는 좀 기다려. 바보야.”
지금은 태양이를 예뻐해도 파티가 끝날 무렵에는 다들 나를 예뻐해주고 있을 거라는 야릇한 신호였다.
불만이 사그라든 나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예뻐해준다고 하니까 얌전해진 것 좀 봐.”
주아 누나는 급격히 얌전해진 내가 귀여웠는지 깔깔 웃어댔다.
캐롤이 흐르고, 맛있는 음식과 술이 곁들어지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참가한 인원이 꽤 되다 보니 이야기 주제는 정말 다양했다.
임신 얘기, 건강 얘기, 태양이 얘기가 수시로 튀어나왔고 민영 누나와 주아 누나는 같은 배우인지라 연기나 업계 얘기로 수다를 떨었다.
아현이와 정화씨는 의외로 요리에 쿵짝이 맞아서 대화를 이어갔다.
‘아현이는 정화씨가 사짜 요리사라는 걸 모르나보네.’
정화씨는 요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짱짱하게 아는 편이었다.
아현이는 요리에 대해 아는 게 적은 지라 이론적인 부분에서 정화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선물 증정 시간이 왔다.
마니또처럼 뽑기를 해서 그 사람에게 선물을 사주는 미니 이벤트를 한 것이다.
나는 미니 이벤트에서 빠졌는데, 여자들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지?’
초반에는 서로 신경전을 해서 이렇게 하하호호 웃고 떠들 수 있게 될 줄 몰랐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파티였지만, 이런 자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졌다.
서로 선물을 교환하면서 깔깔대는 여자들에게 내 선물도 추가로 증정 됐다.
“다들 내년에도 아픈 곳 없고, 좀 더 젊게 지냈으면 좋겠어서 준비한 선물이야.”
“건강식품이네?”
“특별한 거니까 다들 하나씩 먹어.”
코인으로 구매한 아이템이다.
모양은 환으로 되어 있는데, 미용에 관련 되지 않은 순수한 건강 아이템이다.
“우리 이미 충분히 건강한데? 네가 평소에 가져다주는 것 덕분에 아픈 곳이 하나도 없어.”
“더 건강해지라는 의미야. 건강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
아이템에 대해 정확히 설명을 하자면 영구적인 체력+10 같은 아이템이다.
여태까지 내가 가져다 준 아이템은 총 체력이 500일 때, 소모 된 체력을 회복시키라는 의미로 준 것들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선물한 아이템은 HP 500을 HP 510으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인 거다.
즉, 기존에 얼마나 건강하든 상관없이 이 아이템은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동그란 환을 받아서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이거 나도 먹어도 되는 거야?”
“먹어도 돼요.”
임신 중인 복순 누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챙겨 먹어야 하는 거였다.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얘가 가져다주는 건 하나같이 다 대단한 것들이잖아. 나중에 느껴지겠지.”
이 아이템은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정력이 높아지고 섹스에서 능력을 쓰기 시작하면서 여자들이 리타이어하게 된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졌는데, 체력이 늘어나면 침대에서 조금은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과 섹스를 많이 해야 코인을 벌 수 있고, 그 코인으로 그녀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물을 할 수 있게 될 테니 좋은 선순환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휴가를 오늘 파티하는 거 하나로 끝낼 거야? 나머지 시간은 뭐할 거야?”
파티는 좋지만 휴가를 좀 더 알차게 보내고 싶었는지 민영 누나가 슬그머니 내 의향을 물어왔다.
“저랑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응.”
“어떤 건데요? 아! 그럼 차라리 한 명씩 말해 봐요. 저한테 해줬으면 하는 거요.”
“정말 다 해줄 수 있는 거야?”
“그럼요!”
이미 정화씨와 주아 누나에겐 해줬던 거다.
한 번 시작한 일은 깔끔하게 끝을 맺어야 했다.
“좀 곤란한 건데….”
“누나를 위한 일인데 곤란한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죠.”
“읏! 너, 너무 가까운데.”
민영 누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하니, 그녀가 두 볼을 발긋하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다.
이보다 더 가까이에서 서로의 숨결을 나눴던 적이 많은데도 고작 이 정도 접촉에 부끄러워하는 민영 누나가 무척 귀여웠다.
“어머어머, 쟤 끼 부리는 것 좀 봐. 저러니까 홀딱 넘어가지.”
복순 누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놀려댔지만, 나는 꿋꿋하게 민영 누나를 재촉했다.
“말해 봐요. 뭐해줄까요?”
“…내 친구로 잠깐 방송에 출연해줄 수 있을까? 마, 많이 귀찮게 안 할 게. 정말 잠깐이면 돼.”
“방송이요?”
뜬금없는 부탁이어서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민영 누나는 나를 불러서 방송을 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응,이번에 예능 방송에 나가게 됐는데,나 혼자서 출연하니까 재미가 없었나봐.친구라도 불러서 분량을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면야 못할 건 없는데, 왜 굳이 저랑 하고 싶어한 거에요? 이쪽 업계 아는 사람 많잖아요.”
이쪽에서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하고, 연극 쪽으로도 인맥이 굵은 민영 누나다.
친구로 부를 사람은 널리고 널린 사람인지라 나와 함께 나가고 싶다고 한 게 특이했다.
“…나 요즘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 별로 없어.연락 거의 다 끊었거든.”
“정말요? 왜 그랬어요? 무슨 일 있었던 거에요?”
민영 누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을 푹 숙였다.
뭔지는 몰라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언니, 후회하는 거 아니죠?”
말을 하지 않는 민영 누나를 재촉하려던 순간, 아현이가 불쑥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야. 후회 안 해.”
“진짜잘한 거에요. 후회하지 말아요. 그쪽에서 먼저 백 번 사과해도 받아줄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
아무래도 민영 누나에게 뭔가 일이 있었고, 그걸 아현이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도움까지 줬던 것 같다.
"도대체 뭔 일이야? 큰일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말 안 했어."
“말도 마. 복창 터지는 줄 알았어. 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못 말해줬지. 이제 다 끝난 일이니까 해솔이한테 말해도 되죠?”
“으으…부끄러운데.”
“부끄러운 일 아니에요. 그년들이 나빴던 거지!”
“나도 그 사람들 마음을 아니까….”
결국 부끄러워서 말 못하겠다는 민영 누나 대신 아현이가 설명을 해주었다.
민영 누나가 갑자기 스타가 되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처음엔 축하를 해줬단다.
그런데 그 인기가 그칠 줄 모르고 점점 더 높아지자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거다.
“나, 나도 어느 정도는 변했겠지. 기뻤으니까, 행복했으니까. 예뻐지고 나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거든.”
연기력을 인정받고, 사람들이 그녀를 아름답다 칭찬해줬으며, 자연스레 모든 일의 중심이 자신으로부터 시작 됐다.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많이 들떴지만, 내가 잘 나서 이룬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네가 내 얼굴을 변하게 해주지 않았으면 난 여전히 무명 배우로 근근히 먹고 살았을 거야. 무명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알아서 지인들이 날 질투하고, 시기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언니가 나서서 도움을 줬었대. 근데 그 사람이 도움을 받아 놓고 뒤에서는 뒷담화를 한 거야. 진짜 어이없지 않아?"
그리고 한 번 도움을 줬더니 그걸 권리인 줄 알고 당연하게 받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점점 더 큰 도움을 원하기 시작했고, 누나가 할 수 없는 도움까지도 바랐다.
“나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믿질 않더라. 오히려 다들 내가 변했대. 예전에는 착했는데, 뜨니까 사람이 변했다는 거야.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자기들이면서.”
우리 사이에 그 정도도 못해줘?
넌 이제 떴다고 우리 무시하는 거야?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은 민영 누나에게 지인의 변화는 큰 아픔이 됐을 것이다.
“내가 우연히 민영 언니가 전화하는 걸 듣지 않았으면 여태까지 계속 그런 것들한테 당해주고 있었을 거야.”
아현이가 우연히 상황을 알게 됐고, 복순 누나와 함께 쿵짝이 맞아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언니가 예전이랑 급이 달라진 건 맞잖아. 예전 인맥 부여잡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줬지. 오히려 그쪽이 언니랑 친분을 이어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런 자식들은 도와줘도 나중 되면 더 큰 걸 내놓으라고 할 걸?”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전형적인 놈들이지.”
복순 누나도 아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다.
민영 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내 주변에 방송에 나올 마땅한 인맥이 없더라고.”
일반인 친구를 방송에 부른다고 분량이 나오진 않을 거다.
결국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유명인을 불러다가 촬영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런 인맥이 자신밖에 없었던 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출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저보다는 주아 누나랑 같이 나오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주, 주아씨랑? 너무 민폐일 것 같아서….”
민영 누나가 내 말에 화들짝 놀란다.
주아 누나를 부를 생각은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는데, 어딘가 어색한 걸 보니 아무래도 두 사람이 썩 친하진 않은 것 같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어색한 사이가 있기 마련이긴 하다.
애석하게도 그게 주아 누나와 민영 누나였고 말이다.
헌데 주아 누나가 의외로 쿨하게 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해솔이를 부르는 건 화제성을 따져보면 좋은 일이지만, 게스트가 너무 화려해서 언니가 묻힐 거에요. 스캔들 날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제가 출연하는 게 우리 둘 모두한테 좋을 것 같네요. 저한테도 도움이 되는 스케줄이니까요.”
두 사람 모두 이미지가 좋고, 요즘 떠오르는 실력파 여배우들이니 방송에서 친분이 있다는 걸 알리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소속사에서도 스캔들 날 위험이 있는 나보단 주아 누나를 출연시키는 걸 더 좋아할 것이다.
여배우와 남자 아이돌의 친분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자들의 흥미를 끌 조합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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