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 #42. 연말 (5)
* * *
민영 누나는 그렇게 주아 누나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정을 내리면서 자기 차례를 넘겼다.
이제 남은 건 아현이와 복순 누나였는데, 두 사람도 의외의 선택을 했다.
내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다들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내 능력에 대해 묻는 걸 조심스러워했는데, 다들 알게 모르게 호기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건 왜?”
“워낙 신비하니까. 우리가 짐작이 안 돼.”
“맞아, 특히 이런 신기한 것들을 불쑥불쑥 가져오는 것도 좀 걱정 돼. 혹시 너한테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닐까 싶어서.”
“엄청 걱정되긴 하지. 아는 게 있어야 뭐라도 할 텐데,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내가 그녀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들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배려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시작부터 너무 대단한 것들을 보여줘서 우린 네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아. 근데 아니잖아.”
원래 사람이라는 게 하나를 해주면 둘을 갖고 싶어 하는 법이 아니겠나?
“우리 너무 믿지 마. 네가 우리를 사랑해서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그렇게 오냐오냐 하기만 해서는 좋은 관계로 남을 수가 없어.”
주아 누나의 말을 정화씨가 받아서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일방적인 애정만큼 위험한 게 없는 법이란다. 얼핏 얘기를 해봤는데, 알게 모르게 너한테 받은 게 다들 많은 것 같더라. 도대체 뭘 주고 그런 것들을 사서 오는지 모르겠어. 우리야 받아서 편하게 쓰면 끝나는 일이지만, 네게 부담이 되는 거라면 받고 싶지 않거든.”
정화씨는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내가 챙겨줬던 게 많은 편이었다.
“부담 받지 않고 써달라고 했잖아요.”
“받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매번 선물이라면서 가져왔잖니.”
“…….”
그녀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부담 갖지 말고 쓰라는 말에 잘 받아 쓰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는 저렇게 부담을 쌓아두고 있었나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걸 그랬나?’
문제는 그녀들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하자면 ‘섹스해서 번 코인’으로 산다고 해야 한다는 건데….
‘완전 깨잖아.’
내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지금 이 관계가 코인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관계라는 오해를 만들지도 모른다.
‘미안하게도 저 오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고민을 하다가 적당히 숨길 건 숨기고 알려줄 수 있는 건 알려주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무 숨겼다가 오해가 쌓이면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말이다.
“물건을 구하는데 ‘돈’ 같은 재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야. 그걸 얻으려면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것도 맞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많이 비싼 물건들이야?”
“어떤 물건이냐에 따라 가격이 다 다르지.”
“그 돈은 우리가 쓰는 돈이랑 다른 거야?”
“응. 여기 돈으로는 못 구해. 나는 따로 재화를 구하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이 어떤 건데? 설명 못 해줘?”
곤란한 일이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였으나 이게 그녀들이 날 걱정하는 핵심 부분이라는 걸 알기에 조금 돌려서 말해주기로 했다.
“돈은 그쪽에서 원하는 걸 나한테 의뢰하면 내가 대가를 받고 들어주는 식이야. 편하게 의뢰를 받아서 해결하고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돼.”
그쪽에선 내가 더 많은 씨앗을 뿌리길 원했고, 나는 그걸 들어주면서 코인을 얻는 것이니 핵심을 얘기 안 했어도 대충 돌려서 말한 것은 된다.
“의뢰? 혹시 그 의뢰가 엄청 위험하다거나 그런 거야?”
“에이, 그런 거는 절대 안 하지.”
엄청 위험해 보이는 미션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미션은 내가 쳐다도 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트롤 눈알을 가져다 달라는 식의 의뢰인데, 그걸 내가 왜 하냐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거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판타지 모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0.1%도 없었다.
“그런 거는 안 한다고? 그럼 결국 위험한 게 있다는 거네?”
“내가 안 하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지.”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큰일이 생겼는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물건이 있어. 넌 그걸 살 돈이 부족하고. 그럴 때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어?”
“…….”
그동안 자잘한 아이템들을 자주 구매하긴 했지만, AI 상태창을 판매하고 남은 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번에 란나씨에게 임신을 시키라는 미션을 받으면서 대량의 코인을 활동비로 지원 받았고 큰일이랄 게 없이 활동에 집중하느라 한동안 코인을 쓸 곳이 없었다.
미션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꾸준히 해결을 하고 있었고 여자들과의 섹스로 꾸준하게 코인이 쌓인 결과.
‘무슨 일이 생겨도 코인이 부족해서 물건을 못 살 것 같진 않아.’
즉, 그녀들의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거다.
더군다나 그녀들에게 주기 위해 구매했던 아이템은 섹스를 하면서 생긴 코인으로 충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예를 들어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잖아.”
“앞으로 절대 그 물건들 사오지 마!”
여기서 절대 안 위험하다고 우긴들 그렇구나 하며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잠시 심호흡을 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물건들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게 보고 싶지 않다는 거지?”
“…응. 결론만 보자면 그게 맞는 소리야.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만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그냥 너도 위험한 일 안 하고, 우리도 그런 물건 없이 사는 게 편해.”
내가 주는 물건 없다고 못 사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내가 준 물건들이 주는 편의는 그녀들의 삶의 질을 크게 높여준 게 맞으나, 그것보단 내 안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알았어. 앞으로 내 안전에 좀 더 신경 쓸게. 그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 구매할게. 이렇게 약속하면 되는 거지?”
“잘 생각했어. 약속 꼭 지켜야 된다?”
“응.”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으로 불필요한 물건까지 굳이 사와서 선물이라고 주지도 말고. 그런 거는 꼭 필요한 곳에 쓰고 나머지는 좀 아껴둬야 해. 우리를 위해서 하나 둘 선물해주는 네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
미리 코인을 아껴둬서 손해 볼 건 없다.
다들 같은 의견이라고 하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받는 당사자가 싫다는데 억지로 안겨주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었다.
“근데 그럼 이제 화장품도 사지 마?”
“!!”
“!!”
“앗.”
“그, 그건….”
화장품의 성능을 잘 아는 그녀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화장품은….”
“그…건 없으면 안 되는데.”
자신들은 괜찮으니 아껴 쓰라고 말한 게 방금인데 화장품 얘기가 나오지 말이 궁해진 모양이다.
고뇌에 빠진 여자들이 결국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것만 예외로 하자….”
“우린 배우잖아. 관리가 중요하단 말이야.”
“하하하! 그래, 화장품만 예외로 하자.”
사실 여자들 전부에게 화장품만 돌려도 그 값이 제법 나간다.
화장품은 그나마 싼 편이라서 다행이긴 한데, 여긴 여러 개 산다고 해서 할인해주고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그럼 이걸로 끝인 걸로 해요. 다음 문제로 넘어갈게요.”
“또 있어?”
코인과 아이템에 관련 된 내용이 정리가 되었을 무렵.
주아 누나가 다음 안건을 꺼낸다.
“당연히 더 있지. 고작 이걸로 끝날 줄 알았어?”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이번엔 긴장 좀 해야 될 걸? 너 말야, 따로 순서 갖고 있지?”
“순서? 무슨 순서?”
“여자들한테 가는 순서 말이야.”
“…….”
정말 예민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 알아. 근데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네가 알아서 순서를 정해서 다녀가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든? 근데 이게 모두에게 언급한 건 아니잖아. 눈치 못 챈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네가 그 순서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에? 순서가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민영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다.
“이것 봐. 모르는 사람이 있잖아.”
사실 민영 누나가 보고 싶다는 문자를 꾸준히 보내는 편이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고, 그녀가 내 정액에 중독 되어 있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는 걸 알기에 마냥 외면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순서가 있긴 해도 나 혼자만 정해놓은 순서인지라 반드시 그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여자들도 주의해줘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차례에는 얘가 너무 보고 싶어도 참아주는 예의가 필요하거든. 나라고 얘 안 보고 싶은 줄 알아? 그래도 난 꾹 참았어. 내 차례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끔 누가 반칙을 쓰는 것 같더라. 얘한테 투정부렸겠지. 그래서 찾아오게 했을 거고.”
뜨끔한 사람이 있는지 눈알이 부지런하게 돌아간다.
누가 그랬는지, 얼마나 자주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기에 시선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민영 누나는 어쩔 수 없었던 건데….’
많이 찔리나보다.
민영 누나의 안색이 창백했다.
“다들 자기 시간을 보장 받고 싶지 않아?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해솔이도 이런 거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머리 아플 거야. 여자들 투정 부리는 거 다 받아주면 스트레스도 쌓일 거고. 차라리 자기 시간을 확실하게 보장 받아서 서로 스트레스 없는 관계가 되는 게 좋다고 봐.”
주아 누나의 말에 반박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누나가 말한 대로 된다면 훨씬 편해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서로 조금씩 배려하면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동의할게.”
복순 누나가 가장 먼저 의견에 동의했고.
“저도 동의요!”
다음은 아현이가 흔쾌히 동의해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주아 누나가 예외를 말했다.
“웬만하면 순서를 지키는데, 임신을 한 사람은 순서에 상관없이 만나러 가도 되는 예외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다들 어때요?”
“나? 난 괜찮은데.”
“언니뿐만 아니라 앞으로 누가 임신을 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이런 건 미리 예외로 두는 게 맞아요.”
“흐음~ 그런 뜻이라면 내가 반대 할 게 아니긴 하네.”
척척 의견이 조율 되는 가운데, 민영 누나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소심하게 손을 들고 물었다.
“그, 그건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보고 싶다는 말을 아예 하면 안 되는 건가요? 많이 실례되는 말이었을까요?”
민영 누나는 누가 봐도 주눅 든 표정이었다.
‘아니, 그걸 여기서 말하면….’
누가 봐도 범인이 재 발 저린 모양새이지 않은가?
다들 눈치 챘는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민영 누나의 어리숙한 모습을 넘겨줬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어요. 이제 각자 시간도 생길 테니까 마음껏 보고 싶다고 투정 부려도 돼요. 다만 투정과 징징대는 건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죠?”
애석한 일이지만 저렇게 말해도 민영 누나의 징징댐은 바뀌지 않을 거다.
시작부터가 잘못 돼서 그렇다.
내 정액을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금단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정신을 못 차린다.
저 약쟁이 누나의 불안증세를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다.
“네에….”
민영 누나가 울상이 된 채로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인다.
의외로 주아 누나의 말을 얌전히 따를 생각인가 보다.
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 내 말도 잘 안 듣는 누나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주아 누나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어색한 사이인데 친구로 출연하는 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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