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 #42. 연말 (6)
* * *
파티로 시작해서 얼떨결에 가족회의가 되어버린 자리.
예상에 없던 일이지만 진작 이런 자리가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찼다.
자칫 잘못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쌓이기 직전에 시원하게 긁어주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주아 누나가 적절하게 화제를 잘 꺼냈다.
파티가 정리 될 무렵, 슬슬 내가 오늘 밤을 보낼 곳에 대한 눈치 싸움이 시작 됐다.
이럴 땐 내 몸이 여러 개로 늘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다들 은근하게 눈치를 보는 가운데, 주아 누나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오늘은 로즈 언니랑 같이 있어줘. 내일은 아현이 다음날은 민영씨야. 혹시 순서에 불만인 사람 있어?”
“없어요!”
“나? 갑자기?”
복순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사실 나한테도 꽤 의외의 말이었다.
어제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긴 했지만 이틀은 이곳에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배려해줘야지.”
“또 임신 얘기야? 자꾸 배려 받는 거 별론데. 어차피 배가 너무 많이 나와서 쟤 데려가도 섹스 못해. 쟤 하루 놀릴 바에야 그냥 내가 여기서 하루 자는 걸로 하는 건 어때? 쓰고 돌려주기만 해도 돼.”
그리고 복순 누나는 주아 누나의 배려를 쿨하게 넘겼다.
“저기,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내가 도구화 되어버린 느낌인데….”
“정말 그걸로 되시겠어요?”
“응. 임신했다고 이런 배려 받는 게 더 싫어. 내 스타일 아니야. 그냥 끝나고 쟤 몸만 나한테 줘. 안고 잘 거야.”
“누나??”
결국 내 의견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결론이 났다.
시간이 꽤 늦게 되어서야 아현이와 민영 누나가 집으로 돌아갔고, 복순 누나는 손님방 침대에 누웠다.
복순 누나가 먼저 잠들고 나는 정화씨와 주아 누나랑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약속한 대로 복순 누나의 옆에서 잠들었다.
이후로 복순 누나랑 여우로운 산책 데이트를, 아현이랑은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는 데이트를 즐겼고, 민영 누나와는 만나자마자 하루 종일 찐하게 섹스를 해댔다.
작정을 하고 나를 뽑아 먹어서 기어코 보온병에 내 정액을 보관하고서야 만족한 후 기절을 했다.
? ? ?
란나는 생각했다.
‘남들이 보면 부부 같을지도…?’
엄청났던 첫날 밤 이후, 그녀와 사장님의 관계는 매우 순조로웠다.
그와 밤을 보낸 이후로 자연스럽게 사귀는 관계가 되고, 바쁜 와중에도 그녀를 자주 찾아오는 성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계를 쌓아간 것이다.
란나가 했던 말 덕분인지, 사장님은 좀 더 카페에 관심을 가져줬다.
덕분에 그녀는 안도감을 느꼈고, 한층 더 안정감 있게 카페를 관리할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순간은 사장님이 갑자기 나타나 카페 일을 도와주었을 때다.
함께 카페 일을 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발칙한 상상을 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남자와 연이 멀어서 그런지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사장님과 만나서 생활이 안정적이게 되면서 그녀는 점점 안 해봤던 생각들을 이것저것 해보게 됐다.
‘구체적으로 사장님과의 미래랄까….’
힐끔!
사장님은 저런 남자가 실제로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섹스를 그렇게 잘 하는데, 다정하기까지 하잖아.’
애인으로도 완벽하고, 배우자로도 손색이 없다.
란나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사장님에게 여자들이 잔뜩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관계에 얽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난 나만 행복하면 되니까.’
그날 밤에 있었던 노련한 손놀림과 정확한 곳을 찔러주는 능숙한 허리놀림은 그녀를 감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이 남자를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다른 남자한테서 그런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남자와 사귀어 본 적 없다고 해서 그런 쪽 지식이 없는 건 아니다.
사장님은 상위 1% 남자가 분명하다.
그런 남자가 왜 자신을 사랑해주는지 모르겠지만, 기회를 허투루 버리진 않을 생각이었다.
‘최대한 잡을 수 있을 때까진 해봐야지. 허무하게 잃고 후회하는 건 너무 구질구질하잖아.’
어떤 부분이 그에게 어필 됐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그녀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었다.
카페도 하루가 다르게 손님이 늘어나고 있어서 그녀는 생활이 요즘만 같기를 소원할 정도였다.
“해가 떴을 때 오시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큰일 하나 끝나서 시간이 좀 났어요.”
“피곤해서 쉬고 싶으셨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힘들어진 거 아니에요?”
“푹 자고 와서 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란나씨가 괜찮다고 하면 카페에 계속 있을 생각인데 괜찮나요?”
“저야 당연히 괜찮죠. 전 오히려 사장님이 서운하실까봐 걱정인 걸요.”
“제가 왜 서운해요?”
사장님이 오면 오늘 하루 종일 커피 타느라 정신이 없어질 거다.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는 건데, 그런 시간에 커피를 타고 싶을 남자가 어디 있겠나?
“저랑 데이트하고 싶으실 거 아니에요. 일하다 왔는데, 여기에서까지 일을 시키는 거니까….”
“또 오해를 했네요. 우리 쉬는 날에 제가 카페 열었다가 만난 거 잊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사장님은 본업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카페를 열었던 사람이다.
더군다나 사장님은 이미 한차례 자신에게 해명을 해준 바가 있었다.
이 카페는 그에게 짐이 아니라고, 자신에게도 이 카페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말이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사실 란나씨랑 데이트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거든요.”
“!!”
란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태까진 쓸데없이 돈을 써야 하는 데이트보단 카페에서 함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더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자신과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생산적이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중요한가 싶어진다.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는 건 결국 하자는 거잖아.’
이게 바로 연애하는 맛인 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데이트.
연애를 시작했는데 남들 다 해보는 데이트니까 경험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데이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다는 거다.
‘어떡하지? 데이트 하자고 해야 하나? 이대로 계속 장사하자고 하는 건 너무 양심없는 짓인 것 같은데.’
데이트를 하는 것 자체는 크게 싫지 않았다.
다만 데이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어서 문제일 뿐.
‘일단 가게는 좀 일찍 닫기로 하자.’
사장님이 와서 손님이 점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가게를 일찍 닫는다고 해서 매출이 떨어질 일은 없다는 뜻이다.
지금도 봐라.
사장님이 나타났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손님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한 란나가 사장님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 가게를 좀 일찍 닫을까요?”
“정말요?”
아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지 그녀의 말에 사장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래, 지금은 돈 버는 게 문제가 아니야. 사장님을 서운하게 만들진 말아야지.’
그가 자신에게 해준 게 얼마인가.
고작 데이트 하나를 못해줘서 서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데이트는 어디로 갈까요?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제가 알아볼게요!”
귀엽게도 사장님은 가게를 일찍 닫고 데이트 하러 가자는 말에 설레었는지 데이트 코스를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좀 덜 부담 될 것 같아요.”
“저만 믿어요, 란나씨!”
손님이 너무 많이 몰리면 카페를 일찍 닫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사장님은 손님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일을 도왔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사장님을 찾으며 한 마디라도 걸려도 껄떡댔지만, 란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로 손님들의 수작질을 쳐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손님들을 쳐냈는데….’
란나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진 건, 오후쯤이었다.
하필 오늘 카페에 그녀의 대학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뭐야? 너희들 말도 없이 왜 왔어!”
“너 보려고 왔지.”
“손님이 엄청 많네. 여기 맛집으로 소문났나보네?”
“그러게, 앉을 자리가 없네?”
다행이도 손님이 너무 과하게 와서 사장님이 안쪽으로 잠깐 빠진 상태였을 때 친구들이 도착했다.
‘빨리 보내야겠다.’
얘네들은 애인이 사장님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무척 곤란했다.
친구들이 사장님에게 주접을 부릴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 아찔하다.
절대 만나게 해선 안 된다!
“다들 한 잔씩 들려줄 테니까 오늘 말고 다른 날에 와. 보다시피 지금은 손님이 너무 많아.”
란나는 손님이 많다는 핑계로 보내자 결심하고 입을 털었다.
헌데 당연히 그러겠다고 하고 갈 줄 알았던 친구들이 이상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좀 도와줄까? 나 카페 알바 경험 있잖아.”
“됐어. 그 정도로 바쁜 거 아니야. 나 혼자서 쳐낼 수 있어.”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카페 걱정만 하더니, 너한테 이 일이 찰떡같이 맞았나보네.”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힘들면 친구한테 도움 받을 수 있는 거잖아.”
“맞아, 돈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쓸데없는 배려였다.
“아니,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동선이 불편해서 안 좋아. 나 혼자 하는 게 편해.”
란나가 커피를 뚝딱 만들어서 친구들의 손에 하나씩 음료를 쥐어줬다.
“자, 다 됐지? 빨리 가.”
“어? 저쪽에 자리 하나 났는데.”
“우리 저기서 얌전하게 앉아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돈도 안 냈으면서 테이블을 차지하겠다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다 줘. 그럼 되지? 여기 카드.”
“아….”
자신의 친구였지만, 오늘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케익과 빵을 구매해버리면서 자리에 앉을 정당성을 얻어버려 내쫓을 명분이 사라져버렸다.
“자, 이제 더 할 말 없지? 그러게 순순히 내놨으면 서로한테 좋았잖아.”
“…뭔 소리야?”
“뭔 소리긴, 네 애인 내놓으라는 소리지.”
“!!”
란나가 친구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여기서 갑자기 사장님을 왜 찾아?”
“우리가 여길 연락도 없이 왜 왔겠니? 당연히 네 사랑스러운 애인이 카페에 왔다는 소문 듣고 온 거지.”
란나는 그제야 친구들이 가지 않고 자꾸 질척대는 이유를 깨달았다.
‘얘네들 알고 온 거였어?’
사장님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손님들에게 퍼진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일이다.
그게 친구들한테까지 해당 되는 일이라는 걸 몰랐을 뿐.
“사장님을 왜 보려고 하는 건데.”
“네 남자친구니까! 궁금하잖아.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기도 하고.”
“그냥 가주면 안 돼? 괜히 만났다가 민폐 끼치지 말고, 응?”
“얼굴 보는 것도 안 돼?”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 얼굴에 금칠이라도 해놨니? 우리가 잡아 먹는다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이 무례하게 굴까봐 그렇지!”
“우릴 그렇게 못 믿어?”
란나가 짓궂은 친구들을 보내려고 쩔쩔 매는 사이.
애석하게도 사장님이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란나씨.”
“사, 사장님!”
“안에서 소리가 들려서요.”
“그냥 안에 계셔도 됐는데….”
“란나씨 친구 분들인데 인사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요?”
사장님은 친구들이 얼마나 짓궂은 녀석들인지 전혀 몰랐다.
친구들에게 잡히면 우리 데이트도 모두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꺅! 사장님! 저희 예전에 여기서 커피 사먹은 적 있는데 혹시 저 기억하세요?”
“야, 친구 애인한테 수작 부리지 마.”
“수작이 아니라 그냥 한 번 친한 척 해본 거거든?”
“흠흠, 안녕하세요. 저희가 부담 드리려고 온 건 아니고, 가볍게 인사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잘 오셨어요. 저쪽에 자리 났으니까 앉으시죠.”
란나는 손님을 받아야 했기에 친구들과 사장님이 간 곳으로 함께 움직일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란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커피를 만들면서도 힐끔힐끔 친구들이 앉은 곳을 계속해서 훔쳐봤다.
‘도대체 뭔 소릴 하기에 깔깔대는 거야?’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이렇게까지 거슬렸던 건 처음인 것 같다.
2층으로 가지 않은 게 어딘가 싶다가도 저 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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