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43. 상담사 (2)
* * *
멜리사가 처음 상담사를 봤을 때, 비앙카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남자를 넣어준 줄 알았다.
곱상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취향에 제법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랑 조금은 비슷할지도…핫?! 또 이런 생각을!’
그녀가 떠올린 얼굴도 모르고,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은 모두 망상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의 기억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정신 상태는 결코 정상이라 볼 수 없었다.
‘저자가 나를 고칠 수 있을까?’
의사이니 뭔가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앙카가 유능한 사람을 데려왔다고 했으니 기대를 담아봐도 나쁘지 않을 터.
상담을 받아보라며 의사만 덩그러니 놔두고 사라진 비앙카 덕분에 별장 안에는 멜리사와 상담사 두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멜리사는 선뜻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수치스러워.’
머뭇거리고 있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챘던 걸까?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상담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인사부터 할게요. 전 진이라고 합니다.”
“멜리사 케이야.”
마음에 드는 남자였지만, 멜리사는 일부러 그를 까칠하게 대했다.
본능적으로 진이라는 남자에게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 남자, 왜 이렇게 수상해 보이지?’
친언니인 비앙카가 데려 온 남자이다.
수상한 사람을 자신에게 데려왔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리사는 진이라는 남자를 보면 볼수록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비앙카가 데려 온 사람이니 확실한 사람이겠지만, 다시 한 번 경고할게요. 여기서 있었던 일을 함부로 바깥으로 옮기면 오래 살지 못할 거에요.”
“그랬던 적이 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리 없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겠네요.”
“상담이라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친구에게 하는 고민 상담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반하게 생긴 얼굴이 상담하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녀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는 미남의 얼굴에 자꾸 시선이 빼앗겼다.
경계심이 자꾸 푹푹 꺾여나가서 까칠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당신이 제 친구는 아니잖아요.”
“앞으로 친해지면 되죠? 우리가 친구가 못 될 이유는 없잖아요.”
“…….”
진이라는 남자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기분이 들떠진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 약점을 알고 저런 사람을 붙여준 거야. 비앙카한테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무 상담사나 데려왔으면 멜리사는 쉽게 입을 떼지 않았을 거다.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정신병이 있다는 걸 확답 받고 싶겠는가?
차라리 긴가민가하고 있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우겨라도 볼 수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그런데 비앙카는 어림도 없다는 듯 상담사를 데려와 버렸다.
‘순수하게 날 도와주려고 데려 온 게 맞을까?’
그녀가 딱 좋아할 외형을 가진 남자를 상담사로 데려와서 말이다.
‘비앙카를 믿으면 안 됐나?’
정신이 몰려있다 보니 별의 별 생각까지 다 하게 된다.
적어도 다른 재벌 가문들보단 친언니와의 사이가 좋다고 확신했던 멜리사는 이제 비앙카도 마냥 믿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애초에 비앙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건 상담사를 데려와서 그녀의 정신병을 고쳐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혹시 모를 문제가 생겼을 때 비앙카가 빈자리를 채워줬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앙카는 멜리사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며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담사를 데려온 게 이해가 안 가.’
더군다나 상담사라는 사람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그녀의 마음을 녹여대고 있다.
그가 상담사로 온 게 아니었다면 기꺼이 그의 유혹에 넘어가줬을 것이다.
‘비앙카가 데려 온 상담사한테 속마음을 꺼낼 순 없어.’
그러니 당장 꺼지라고 해야 하는데….
“멜리사씨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들었어요. 물론 본인에게 들은 말은 아니라서 짐작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 제가 멜리사씨한테 드리고 싶은 말은 전문가한테 확실하게 진단을 받지 않고 섣부르게 본인의 상태를 확신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제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건가요?”
“정신이라는 게 굉장히 어려운 분야에요. 그런 말도 있죠. 사람은 누구나 몇 개의 작고 큰 정신병을 앓고 살아간다고요. 아예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속에 하나 이상의 약하고 아픈 곳을 숨겨두고 살아갑니다. 그게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인지 아닌지 알아내고, 도움을 드리는 게 제 일인 거고요.”
진의 말에 홀려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문제를 입에 담을 뻔한 멜리사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남자, 위험해.’
너무 달콤하다.
저 달콤함이 자신을 망치게 할 것 같았다.
먹으면 먹을수록 몸을 해롭게 하는 달콤한 당분처럼.
너무 달아서, 단숨에 삼키고 싶어지면 역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돌아가세요. 상담은 필요 없어요.”
“…….”
“비앙카한텐 내가 잘 말해둘게요. 당사자가 거부했다고 하면 비앙카도 뭐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와 이런 식으로 만난 게 아쉬웠다.
저 정도 남자라면 연예계 쪽 사람이 아님에도 그녀의 흥미를 끌었을 거다.
아니면 그녀의 취향에 맞게 직업을 바꾸게 해서 연예계 쪽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적어도 비앙카에게 돈 몇 푼 받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앙카 때문에 멜리사씨를 돕겠다고 한 게 아닙니다. 비앙카가 절 데려온 건 맞지만, 제가 도움을 드려야 하는 분은 비앙카가 아니라 멜리사씨잖아요. 멜리사씨는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요.”
진은 놀랍게도 비앙카가 우리 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 말했다.
그녀의 사주를 받고 온 사람이 보이기엔 적절하지 않은 태도였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진의 시선에 심장이 아프게 조여 온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쿵쿵쿵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잘못한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혼이 날까봐 불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벌 받을 거야.’
‘뭐?’
또 이상한 생각이 불쑥 튀어나온다.
멜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상태가 안 좋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미쳤다는 걸 검증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 아니. 하….”
이리저리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갈피를 못 잡던 멜리사가 결국 마른 세수를 하고 말했다.
“…상담은 받을게요. 다만 오늘은 가주세요. 지금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준비가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시간은 오늘이랑 비슷한 시간이면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요.”
남자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멜리사의 표정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별장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혼자 남으니 멜리사의 정신병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도 잔잔해졌고 말이다.
언제 이상한 환청이 들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냐는 듯이 깔끔하고 명료해진 정신 상태에 멜리사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젠 변명할 수도 없게 완벽한 미친년이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멜리사는 비앙카가 준비한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그녀의 결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모른 채였다.
? ? ?
“어떠셨어요? 직접 만나보니까.”
“중간에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어.”
“아마 주인님이 계셔서 더 심했을 거에요. 기억을 자극하니까요.”
“그런 사람한테 상담을 맡기다니, 친언니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아이를 구원해줄 수 있는 분은 주인님밖에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저는 멜리사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을 데려온 거에요.”
비앙카는 멜리사가 기억을 되찾길 바란다.
멜리사를 열심히 조교시켜놨으니 그걸 썩히는 게 싫었을 거다.
지금까지 멜리사를 건드리지 않은 건 실비아와 비앙카와 합쳐졌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하필 멜리사 쪽에서 먼저 빌미를 만들었다.
비앙카에겐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명분이 됐고 말이다.
“구원해주셔야 해요. 멜리사는 주인님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울고 있는 거에요.”
“…그냥 평범한 아이템 부작용이야.”
“멜리사는 평범한 여자에요. 아이템에 저항했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고, 아무에게나 기적이 찾아오진 않죠.”
“억측이야.”
“더 강한 세뇌를 한다고 해도 멜리사가 과연 행복할까요? 영원히 영문도 모른 채 주인님을 그리워하다가 늙어 죽을 거에요. 다른 남자를 만나도 행복하지 못할 걸요? 이미 영혼과 몸은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
비앙카가 또 연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건 실비아와 비앙카 인격이 왔다 갔다 하는 식의 연기였다면 지금은 눈물 연기다.
‘멜리사를 가엽게 여기는 언니’라는 무기인데, 애석하게도 나한테는 먹히지 않았다.
쟤가 남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상상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비앙카가 사람한테 보내는 악의는 순수하면서도 무척 잔인한 편이었다.
“네 생각도 결국 멜리사 마음을 짐작한 거에 불과하잖아. 차라리 멜리사 본인한테 물어보자.”
“멜리사한테요? 걔는 주인님을 기억 못하잖아요. 답이 너무 뻔한데요? 불공평해!”
“불공평하면 네가 주인님 하든가.”
불공평해도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가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너무해에~!!”
“잘 따져보면 마냥 나한테 유리하지도 않아. 내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면서? 정신병을 만들어낼 만큼 대단한 마음이라면 좋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
정신병을 만들어내는 존재인데 설마 좋게 말할까.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정이 떨어질 상황이다.
비앙카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 내기는 시작부터 내 승리가 확정 된 거였다.
“어차피 상담사 행세를 하기로 했으니 물어보기 쉽겠어.”
멜리사의 솔직한 마음을 들으면 그 결과에 반박하지 않고 납득하기로 서로 약속했다.
비앙카는 매우 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말에 동의를 했다.
“만약 멜리사가 주인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면 제가 바라는 대로 해주시는 거에요?”
“그래, 약속 지킬게. 너도 딴말하지 않고 멜리사 놔주는 거 잊지마.”
“네에.”
결과는 이미 나온 상황.
오늘 자기 전에 세뇌 아이템 중 안정성이 뛰어난 아이템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뇌 시키는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상담사라는 위치가 있으니 아이템을 적용시키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세뇌가 풀려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아이템이 필요했다.
다음날, 약속한대로 멜리사가 휴식하고 있는 별장을 다시 찾았다.
비앙카가 있으면 속마음을 터놓지 않을 게 뻔해서 나 혼자 방문했는데, 공정한 심판을 위해서라며 비앙카가 곰돌이 인형을 내 손에 쥐어줬다.
‘얘는 제 분신이라서 청각이랑 시야가 공유 돼요. 거기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을 수 있으니까 꼭 손에 쥐고 계셔주세요! 내기는 공정하게. 아시죠?’
이미 결과가 나온 거나 다름없는데도 비앙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멜리사씨.”
“다시 왔네요, 진씨.”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네. 각오했어요.”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지 멜리사의 얼굴에 피로가 쌓여 있었다.
밤에 잠을 못 이루고 많이 뒤척인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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