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44. 신년 (2)
* * *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 해솔이! 안녕.”
“오랜만이네요. 어스타 잘 봤어요.”
옷을 갈아입고 MC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움직이니 가요대상 MC를 맡은 이호연 선배님과 윤이준 선배님이 나를 맞이했다.
윤이준 선배님은 내가 데뷔하기 전까지 남자 아이돌 비주얼 1신이었다.
내가 데뷔하자마자 1신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어서 그의 팬들이 나를 많이 싫어했다고 들었다.
의외였던 건 윤이준 선배님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날 되게 예뻐해주셨지.’
사람들이 그에게 1신에서 물러나야 한다느니, 내게 패배했다느니 하는 말을 들어도 그가 가진 프라이드엔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20대 초반이었다면 그런 말들이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30대에 접어 든, 데뷔한지 10년이 넘은 배태랑.
이쪽 세계에서 별의 별 얘기를 다 듣는 것으론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호연아, 너 오늘 호강한다? 세계 최고 미남이랑 우주 최고 미남을 양 옆에 끼고 MC를 보는 거잖아.”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나 오늘 생일인가 싶더라니까? 오빠랑 같이 MC본다고 해서 쉰내 나게 노인네들끼리 붙여놨나 했더니, 이런 상큼이가 올 줄 몰랐다니까.”
아이돌로 데뷔해서 인기를 누리다가 그룹이 해체 되고, 성공적으로 솔로 활동을 하고 있는 실력파 가수 이호연 선배님도 윤이준 선배님처럼 데뷔한지 10년이 넘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 때 대세라는 소리를 들었던 여자 아이돌 그룹의 센터 출신답게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매력은 외모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호연 선배님은 몸 자체가 굉장히 가녀린 편이었는데, 특히 허리가 굉장히 얇았다.
그래서 19인치라는 소문이 생겼는데, 예능에서 공식적으로 허리를 재본 결과 20인치로 나왔다.
‘19인치나 20인치나 대단한 거지.’
가녀린 몸은 남자로 하여금 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했고,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엄청난 가창력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를 지칭하는 말로 디바 요정, 작은 거인 등이 있었다.
“야, 나는 쉰내 안 나거든? 아직도 상큼하다고.”
“오빠도 이제 슬슬 갔어. 이젠 인정해. 저 얼굴을 보고도 상큼하다는 소리가 나와?”
“…그래도 쉰내까지는 아니야. 너 그 말 우리 팬들한테 하면 큰일 난다?”
“오빠 팬들이야 항상 어화둥둥이잖아.”
“흠흠!! 그나저나 급하게 결정 됐다고 들었는데 연습 못해서 어떡해?”
윤이준 선배님이 말을 돌리고 싶었는지 내 걱정을 해주며 화제를 돌렸다.
이호연 선배님도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도 얘기 들었어. 갑질 엄청 심하게 당했다며? 어휴, 방송국 놈들….”
“해외에서 받는 대접이 더 낫지? 방송국 놈들한테 인정받는 거 엄청 힘들어. 자기들이 을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 안 하거든.”
윤이준이나 이호연 선배님 모두 방송국에 당한 게 많은 것 같았다.
나는 후배답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미 결정 된 일인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그런 일은 회사에서 관리해주시니까요. 일을 맡았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그래그래, 맡았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잘 생각했어.”
“크! 마인드가 됐네, 됐어.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 형이 커버 쳐줄게. 대사가 갑자기 생각 안 난다 싶으면 막 뱉어. 수습은 내가 해줄 수 있어. 형 알지?”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한 때 소속사에서 그의 이미지를 지키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요즘같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방송 환경에서 그의 이미지를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윤이준 선배님은 잘 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싼 입담을 가졌던 것이다.
‘귀태 나는 얼굴에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가을을 닮은 남자….’
소속사의 철저한 마크로 예능에 몇 번 출연해서 병풍 노릇을 했던 윤이준 선배님.
신인 때는 입을 꾹 닫고 살았으나 슬슬 연차가 쌓이고 인기가 무섭게 치솟으니 점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예능에서 본인의 성격을 터트려 버렸다.
놀라운 점은 그때부터였다.
‘오히려 예능에서 터져서 더 잘 된 그룹.’
소속사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은 성격이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그의 어딘가 허술하고 동네 오빠 같은 성격에 치인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룹이 해체 된 지금도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 못해 대단했다.
“대사 맞춰볼까요, 선배님?”
“그럴까?”
리허설이 있기는 하지만 대사를 맞춰 보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미리 대본을 받아보지 못한 나에게는 특히 대사 맞춰 보는 연습이 필요했다.
? ? ?
“해솔아, 이거 좀 봐라. 벌써부터 팬들이 우리 케미 기대한다.”
“음…제가 민폐 끼치는 거 아니냐고 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대사를 맞춰보고 잠시 점심을 먹고 있는 중에 윤이준 선배님이 내게 핸드폰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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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대전 MC에 진해솔 추가 된 거 봄?]
이거 얼굴로 시청률 꽉 잡겠다, 선언한 거 아니냐?
윤이준+진해솔 와꾸합 떠올려 보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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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맘 소환!! 우리 준이 MC픽 매우 칭찬해!
└근데 해솔이 뜬금없이 왜 추가 된 거야? 스폐셜 무대 없어서 좀 실망하고 있었는데, MC 해준다고 하니까 너무 좋다.
└갑자기 MC 추가 된 거 좀 수상한 냄새 안 남?
└방송국 놈들이 갑질 한 거 아님?
└아…시발, 설마. 해외에서 국위선양하고 돌아 온 사람한테 갑질을 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국위선양 ㅇㅈㄹ
“맨 밑에 댓글은 그냥 무시해. 뭔 말인지 알지?”
“알죠.”
모를 수가 없지.
이런 악플에 신경 쓰면 아이돌 절대 못한다.
아예 안 보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멘탈이 튼튼하다면 가끔은 살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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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요대전 관람 포인트]
1. 스폐셜 무대 (여돌 센터 조합/ 여돌 메댄 조합)
2. MC 와꾸합 & 진해솔 MC 데뷔
3. 대상은 누구에게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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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222222222222
└해솔이 말 잘함? 좀 뜬금없는 MC데뷔인데.
└병풍만 해줘도 시청률 3%는 쌉가능일 듯.
└다른 MC가 이준이랑 호연이잖아. 고인물들이 알아서 케어해주겠지ㅋ
└대상 에어플레인!
└웬 에어플레인? 걔네는 해외에서 활동해서 조용하지 않았음?
└맞아, 상반기에 활동하다가 해외 나가서 잠잠했잖아. 에어플레인이 대상 받는 건 좀 아니지.
└억까 하지 마. 상반기에 활동했을 때 걔네가 다 잡아 먹었잖아.
└다들 오래 돼서 기억 안 나는 모양이네. 에어플레인 노래 몇 주 연속 1위 했는지 기억 안 나?
└이거 에어플레인 안 주면 말 안 됨.
“대상 얘기도 솔솔 나오는 것 같던데 너희.”
연말 연예인들 사이에선 ‘상’을 두고 눈치 싸움이 대단하다.
이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상’이다.
그동안 신인상도 받았고, 인기상도 꾸준히 받아왔다.
하지만 ‘대상’ 후보는 들어가지 못했다.
“저희가 이번에 첫 대상 후보라서요.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대상을 받진 못해도 후보에는 들어갈 자격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지 않아서 그런지 대상 후보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대상 후보에 들어갔는데….
‘이전 세계에선 대상이 없어서 별 생각 없었는데 애들이 생각보다 상 욕심이 있단 말이지.’
상에 무감각한 나와 달리 멤버들은 상황이 달랐다.
대상을 받는 게 꿈인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내가 살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인식이다.
“내가 보기엔 그럴 필요 없어 보이는데? 너희 이번에 대상 받을 확률 높아.”
“저희가요?”
윤이준 선배님의 말에 이호연 선배님도 한 마디 더했다.
“MC까지 억지로 시켰는데 설마 대상을 안 주려고. 그렇게까지 심한 양아치 짓은 안 할 걸? 걔네들도 허니 엔터 눈치 살피긴 해.”
“맞아, 거기다가 너희 어스타로 해외 인지도 엄청 올라갔잖아. 어스타 1등을 아무나 하냐고. 아마 위쪽에서 웬만하면 너희들 대상 주라고 했을 거야. 상반기에 엄청 좋았잖아. 계속 국내 활동 했으면 저런 말 절대 안 나왔을 정도로.”
나와 제키가 만든 곡으로 컴백하고 활동을 끝낸 이후로도 계속 국내 활동을 이어갔다면 선배님의 말처럼 우리가 대상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긴가민가할 필요도 없이 확신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나를 강제로 MC 자리에 올린 것에 대한 반발을 ‘대상’으로 막을 생각이라면 확실히 방송국의 태도가 이해가 간다.
“어…그럼 기대해도 되는 거에요?”
멤버들이 이 소식을 알면 엄청 좋아할 거다.
“해도 돼.”
“응응. 우리처럼 고인물이 되면 대충 이 바닥 생리를 할게 되거든. 이번엔 너희가 받을 수밖에 없어.”
만약 여기서 다른 그룹에게 대상을 준다?
방송국에서 허니 엔터에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 리허설 때문에.”
“어어~ 다녀와~”
MC로 리허설을 하다가 우리 그룹 무대를 위해 움직였다.
나는 멤버들과 재회해서 선배님들에게 들었던 말을 고대로 전해줬다.
“진짜여? 우리 대상 받는 거임?”
“너무 기대하고 있다가 못 받으면 좀 그런데.”
“기대 하지 말자고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맞아, 마음 한 쪽에서는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긴 해.”
“해솔이가 MC를 받아들인 게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 못했어.”
다들 한 마디씩 했는데, 마지막으로 제키가 말했다.
“우리 대상 받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한 거 맞잖아. 기대를 왜 하면 안 되는 건데? 욕심 내보자. 우리 그럴 자격 충분하잖아. 기대 하지 말자고 말해도 속으로는 다들 기대하고 있을 거고 말이야.”
“음, 인정.”
“그냥 기대 오지게 하고, 못 받으면 실망하자. 그게 더 쿨해. 표정 관리는 다들 할 줄 알잖아.”
“오케이.”
내가 대상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게 도움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는 미리 대상 수상에 대한 귀띔도 안 해줘서 사람을 쫄깃하게 만드는데,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리허설과 대기, 대기하다가 리허설, 녹화 무대 촬영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훌쩍 지나고….
해가 떴을 때 출근해서 슬슬 해가 지고 어둑한 밤이 되었을 무렵 드디어 본 방송이 시작 되었다.
20xx년 연말 가요대상.
축제의 시작이었다.
? ? ?
“애인이 생겼는데.”
나는 왜 이번 년도 연말에도 혼자인가.
“우리는사람 아니냐?”
"하아~."
친구들과 함께 호프집에 온 란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꿀꿀한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바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왜 이렇게 우울하냐. 엄청 서운하고...적어도 연락은 해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데 연락두절이야. 이거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미리 얘기 했다며. 그럼 어쩔 수 없지 않아?”
눈치 없는 친구가 자꾸 산통을 깨니, 옆에 있던 친구가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했다.
“이래서 네가 모쏠인 거야. 딱 보면 모르겠냐? 연말 늦은 밤에 시간을 못 낸다는 건, 그 시간에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잖아!”
“헉!!”
“뭘 그렇게 놀래?그럼 넌 그 얼굴로 여자가 한 명일 거라 생각했어?”
팩트 폭행으로 촌철살인을 하는 친구와 그 옆에 눈치가 없어서 꼭 상황을 설명하게 만드는 둔한 친구까지.
혼란하다, 혼란해.
“…….”
란나는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쉬고 안주도 없이 술만 벌컥벌컥 마셨다.
“만나고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연말인데, 다른 여자라니….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화내! 왜 여기서 찐따같이 술이나 푸고 있는 건데!!”
“절대 안 돼. 얘 말은 듣지 마.그 남자한텐 어쩔 수 없는 거야. 새 여자보단 기존에 사귀던 여자가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고. 이런 거에 투정 부리면 남자들은 있던 정도 다 떼고 가버린다고. 요즘 남자들이 제일 극혐하는 게 질투심한 여자인 거 몰라?”
그냥 연말은 혼자 보낼 걸 그랬다.
이런 것들한테 무슨 위로를 받겠다고….
란나는 자신의 잘못 된 선택을 한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