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85화 (285/849)

〈 285화 〉 #44. 신년 (3)

* * *

TV에서는 화려하게 꾸민 스타들이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은 진짜 좋겠다. 누가 상도 주고.”

“숨 한 번 쉬면 우리 월급을 버는 사람들이잖아.”

“우리 사장님도 저런 곳에 있을까?”

돈이 많은 사람이다.

딱 봐도 그가 입는 옷들, 평소 하는 행동들에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근사한 파티장에서 여자들 만나서 하하호호 하고 있는 걸지도.”

“야아~ 왜 이렇게 우울한 생각을 해! 당당하게 어깨 펴!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아무리 친구라지만 거짓말은 하면 안 돼.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많이 나긴 하잖아.”

“넌 왜 공감을 못해줘!!!!”

눈치 없는 친구에게 일갈을 날린 친구가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내핵까지 도달하려는 란나를 황급히 붙잡았다.

“야, 혼자서 구질구질한 상상하면서 땅 파고 있지 말고 시원하게 저질러 버려! 전화해버리라고.”

“바빠서 연락 못 할 수 있다고 했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냥 저질러버려!”

친구의 화끈한 부추김에도 란나는 선뜻 핸드폰을 들지 못했다.

“됐어. 그냥 참을래. 민폐를 끼치는 거잖아.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그럴 거면 우울한 생각을 하지 마. 네가 자꾸 확실하지도 않은 걸 상상하면서 땅을 파고 드니까 내가 걱정 돼서 전화라도 해보라고 하는 거잖아.”

시원시원하게 해결책을 제시해줘도 란나는 들어먹지를 않았다.

결국 방법은 하나.

“이럴 땐 술 퍼 먹는 게 답이다! 마셔마셔! 더 마셔!”

술을 마시는 거였다.

아주아주 많이!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TV에서는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스타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들의 박수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지만 알게 뭔가!

저 박수가 자신을 위한 박수라고 우기면 되는 거다.

“이제부터 꿀꿀한 얘기는 그만! 각자 하나씩 목표 말하고 마시는 거다? 나는 내년에 무조건 처녀 뗀다!”

“어우~! 좋다! 나도! 나도 연애할 거야!”

“그 성격에 잘도 하겠다.”

“야아앙!”

“란나 너는? 내년 목표 말해봐.”

“내 목표라….”

란나는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년에는 뭘 목표로 해야 하지?

카페는 이제 예전과 다르게 아르바이트생을 뽑아서 오전에도 안정적으로 가게를 열고 있는 중이다.

카페가 안정화 되면서 그녀가 매달마다 얻게 되는 이익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목돈 모으기?”

“뭐야, 달라진 게 없잖아! 좀 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소원은 없는 거야?”

매년 그녀의 올해 목표는 ‘목돈 모으기’였다.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아빠에 대한 집착으로 가정을 돌보는데 신경을 써주지 않는 엄마.

그녀만 바라보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두 명의 동생들.

그녀에게 가족은 커다란 짐이었고 미성년자일 때부터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만약 아빠가 양심적으로 달마다 100만원의 양육비를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대학에 가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엄마가 사고를 쳐서 점점 줄어들었지.’

아빠는 자신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엄마를 싫어했다.

그래서 엄마가 낳은 우리에 대한 정도 간당간당하다.

아빠의 책임감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그녀와 동생은 굶어 죽었을 거다.

어린 나이에 한 가정을 책임지면서 커온 란나는 ‘돈’이 필요했다.

동생들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을 정도의 ‘돈’.

동생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사줄 수 있는 정도의 ‘돈’.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정도의 돈돈돈돈.

‘통장에 처음으로 0이 하나 더 생겼어.’

매번 평소 단위를 넘지 못하고 쑥쑥 빠져나가던 돈이 처음으로 차곡차곡 모이기 시작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일한 것뿐인데, 이게 정말 내 돈인가 싶을 정도의 단위가 팍팍 들어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돈이 모인다면….’

매번 의미 없이 목표로 잡았던 ‘목돈 모으기’도 무난하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사장님은 자신을 오래 붙잡고 싶다며 점장 직위까지 주지 않았나?

“나 학교 자퇴할까 싶어.”

“뭐어?!”

“말도 안 돼.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해?”

남자를 믿어선 안 된다.

엄마가 잠들기 전, 그녀의 머리맡에서 다정하게 해주던 말이다.

안타깝지만 란나는 엄마가 바라는 대로 말을 알아듣진 않았다.

‘애초에 믿음을 안 주면 되는 일 아닌가? 싫다는 사람을 왜 붙잡는 거지? 그냥 놔주면 안 되는 거야? 왜 모든 일의 1순위는 아빠여야 하는데? 우리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해 줄 순 없어?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남자가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평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그녀이기에 대학을 자퇴하겠다는 말은 엄청난 결심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결심했어.”

결국 나도 엄마 딸이라는 거지.

하지만 결과는 엄마와 다를 거다.

‘나한텐 적어도 돈이 남을 테니까.’

사장님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을 확실하게 처리했다.

회사를 다녀서 그런가?

엄마에게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수단으로 어설픈 믿음을 샀던 아빠와 달리 사장님은 계약서라는 법적 효력이 있는 수단을 통해 그녀의 믿음을 샀다.

그 계약서에는 기간이 정해져 있고, 계약을 어겼을 시에 대한 위약금도 존재했다.

‘계약서를 쓰는 걸 유난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감정에 기댄다는 게 서로한테 참 힘든 거거든요. 우리는 이미 한 번 삐끗할 뻔 했으니까 확실하게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시간이 흐르면 믿음은 자연스레 생기겠죠. 그때까지는 이 계약서로 서로 힘들지 않게 시간을 보내봐요.’

사장님의 그러한 배려에 란나도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먼저 자신에게 ‘믿음’을 보여주었으니 그녀도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보여줌으로서 믿음에 보답하는 것.

‘내가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일은 학교를 자퇴하는 것밖에 없어.’

좀 더 대단한 걸 포기함으로서 그를 믿는다는 걸 표현하고 싶지만, 워낙 가진 게 없는 지라 내어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난 모르겠다. 반대해도 영 들어먹을 것 같지 않으니까, 입 아프게 반대하진 않을게. 그냥 네 선택이 옳았기를 빌어주마.”

“고마워.”

“어…나도!”

“그래그래. 네가 눈치가 없지,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니지. 의리!!”

“이예~! 의리!!”

술이 술술 들어간다.

술이 달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오늘 술은 정말 달았다.

남 눈치 볼 것 없이 달렸다.

1차가 끝나고 2차로 그녀의 자취방에 모여서 친구들이 술을 또 깠다.

“어우, 취한다.”

“너도? 나도! 꺄하하!”

이미 한 명은 구석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고, 독하게 살아남은 친구와 열심히 술병을 비웠다.

그리고 남은 한 친구도 쓰러져서 대충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자려던 순간이었다.

철컥­!

“우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쏟아지던 잠이 달아났다.

하지만 여전히 반쯤은 잠에 빠져 있는 상황이라 몸이 바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몽사몽인 채로 ‘무슨 소리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누가 들어왔다고?’

순간 소름이 쫙 돋으면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낯선 인기척이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친구들이랑 파티 했나보네. 혼자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익숙하고, 애타게 그리워했던 목소리였다.

그녀는 깨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술에 의해 떡이 된 그녀의 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 되는데.’

그녀는 새삼 집안 꼴을 떠올렸다.

술병이 굴러다니고, 먹다 만 안주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을 거다.

‘거기다가 친구년들은?’

란나와 마찬가지로 술에 잡아 먹혀 개가 된 친구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 모습은 보기 흉할 정도로 추할 것이다.

‘부끄러워!’

나는 어떻게 하고 잤지?

다행이 추하게 자지는 않은 것 같다.

가장 다행인 것은 그녀가 씻고 잤다는 점이다.

‘이빨 닦았어! 그거면 됐지.’

친구들 중 술에 가장 강한 나 자신, 칭찬해!

­부스럭 부스럭

무언가가 치워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이렇게 자면 허리 아플 텐데….”

그녀를 걱정하는 사장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진다.

사장님은 가벼운 물건을 드는 것마냥 그녀의 몸을 쑤욱 들어올렸다.

사장님의 품에 안기자 그에게서 남자 향수 냄새가 났다.

두근, 두근!

‘아…영원히 안겨 있고 싶다.’

그의 따스한 품이 좋다.

친구들을 불러서 연말을 술로 보낸 걸 후회했다.

늦은 시간이어도 이렇게 들려줄 줄 알았다면, 좀 더 얌전하게 기다렸을 텐데.

‘지금이라도 깨어나야 돼!’

번쩍!

“!!!”

드디어 몸을 움직여 눈을 떴다.

그리고.

짹짹­ 짹짹짹­!

원망스럽게도 창문밖엔 해가 떠 있었다.

쿠우우울­

드르렁­ 드르렁­ 컥…커컥!

“사장님!?”

집 주변을 휙휙 둘러보니 어제 일이 꿈인 건 아닌 게 확실하다.

분명 그녀가 치우지 않고 잤는데, 집이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베개만 갖고 잤는데 어느새 몸 위에는 푹신한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따끈따끈하게 돌아가고 있는 보일러까지.

모두 그녀가 자기 전 손대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가셨나?”

방이라고 해봤자 몇 개 안 되기에 인기척이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장님의 향기가 여전히 코끝을 감돌았기에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멍청하게 왜 술을 처먹은 거야!’

술을 안 먹고 얌전히 잠에 들었다면 사장님이 왔을 때 깨어났을 거다.

그리고 그랬다면?

꿀꺽!

섹스각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사장님과의 황홀하던 섹스.

한 번도 못해 본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고 확신한다.

바쁜 사장님과 섹스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고, 한 번 한 번의 만남이 귀중했다.

“아우…머리 아파.”

속이 엄청 쓰렸다.

란나는 사장님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코 골고 자고 있는 친구들을 원망스레 째려보다가 커피라도 끓여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갔다.

“엣?”

그리고 놀랍게도 주방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검은 봉지가 그녀를 반겼다.

“이게 뭐지?”

식탁에 사장님의 쪽지로 보이는 게 있었다.

[술 많이 마신 것 같아서 쓰린 속 든든하게 밥 먹어서 달래라고 사다놨어요. 냄비에 재료 넣고 끓여서 먹으면 됩니다. 연락할게요.]

흰색 국물에 고기 덩어리로 보이는 것을 풍덩풍덩 넣고 후추와 파를 넣어 끓인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서 나쁘지 않은 냄새가 풍기자 코를 골고 잠을 자던 좀비들이 꿈틀대면서 움직였다.

“하여튼 먹는 거 하나는….”

“으우우우웅…킁킁킁! 이거 먼 냄새야아?”

“우욱…! 욱!”

한 명은 화장실로 달려가고, 한 명은 엉금엉금 기어서 주방으로 와 냄새를 맡아댄다.

저 흉한 꼴을 사장님이 보셨을 걸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어나서 밥 먹어! 너희 어제 얼마나 추했는지 아냐?”

“머 새삼스럽게.”

“어우, 속 쓰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냄새가 나쁘지 않은뎅?”

“새벽에 사장님 오셨다 간 거 모르지?”

“응?”

“사장님? 네 애인?”

“어. 새벽에 오셨었어. 이것도 사장님이 사다놓은 거야. 너희 먹으라고.”

“!!!!!!!!!”

“어, 어제 그 꼴을 보셨다고?? 우리 잘 때??”

끄덕끄덕!

“으악! 지금은? 설마 숨어 있는 거 아니지?”

“당연히 가셨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너무 아쉽다. 깨우지 그랬어!”

“술로 개가 됐는데 너를 왜 깨워. 무슨 민폐를 끼치려고.”

사실 그녀도 술에 취해서 사장님과 대화 한 마디 못 나누고 보내줘야 했는데, 그 사실을 절대 말 안 해줄 생각이었다.

아쉬움을 표하는 친구들을 달래며 뱃속에 든든하게 정체 모를 음식을 집어넣은 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고 혼자 남자마자 사장님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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