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89화 (289/849)

〈 289화 〉 #45. 최면 (2)

* * *

[내면의 세계로 초대 (촛불)]

­향기를 맡으면 대상의 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면세계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함부로 손대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어서 내면세계로 들어온 것이라면 얼마든지 바꾸는 게 가능합니다. 다만 내면세계에 손을 댄 대가는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엄청나게 불안을 주는 설명문구이다.

나도 처음에는 설명을 보자마자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상품의 구매 후기를 보게 됐다.

상품 후기에 쓰여 있는 말은 살벌한 설명 문구와 많이 달랐다.

하나같이 강제 세뇌 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부작용도 덜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는 평을 한 것이다.

[***** (★★★★★) : 세뇌 초보자들에게 강추!]

[****** (★★★★★) : 잘못 세뇌시켜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막막했는데, 이거 쓰고 개 같이 부활함. 세뇌 부작용으로 골치 아플 때 이거 쓰는 거 추천드림.]

[** (★★★★★) : 세뇌 부작용으로 백치 돼서 버리려고 했던 노예 치료함. 굿!]

[****(★) : 제가 써보니까 세뇌가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를 정도로 효과가 없던데요? 왜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 (★★★★) : 다룰 줄 알게 되면 정말 무서운 아이템임. 주의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음.]

[*** (★) : (부적절한 용어 사용으로 블록 처리 되었습니다.)]

[*********** (★★★) : 왜 평가가 극단적인가 했더니 잘못 쓰면 시전자한테 부담이 와서 였네.]

[***** (★★★★★) : 반작용 있는 상품 쓰는데 설명서 추가 결제 안한 멍청한 놈이 되지 않길 바람.]

적당한 시간이 흐르고.

촛불에서 나온 향기에 멜리사의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는 것이 확인 됐다.

침묵이 머무는 방 안에서, 멜리사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멜리사?”

“…네.”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문제없어요.”

문제없다는 그녀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상태였다.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푹신한 소파에 파묻힌다.

“기분이 어떤가요?”

“…그저 그래요.”

“나쁘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지금 당신은 내면세계에 와 있는 상태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게 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내 손에는 사용 설명서가 들려 있다.

사용 설명서는 상품 구매하면 당연히 공짜로 딸려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상점은 매우 불친절해서 설명서를 따로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리뷰를 보고 설명서 없이 쓰는 건 안 되겠구나 싶어서 큰마음 먹고 설명서를 구매했다.

설명서가 부실했다면 화를 낼 텐데, 상점에 있는 상품은 코인 값을 하는 법칙이 설명서에도 적용 됐는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설명서가 책 한 권 분량일 정도로 말이다.

“그냥 환한 것 같아요. 밝은데 아무것도 없어요.”

“좋습니다. 이제부터 당신 앞에 문이 생길 겁니다.”

“갑자기 문이 생긴다고요? 그럴 리가…어?”

멜리사의 눈동자가 커진다.

“문이 진짜 생겼어요!”

“어떻게 생겼나요?”

“회색 문이 하나 있고, 안에서 빛이 세어 나오는 흰색 문이 있어요.”

설명서에서 빛이 세어 나오는 흰색 문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명확하고 또렷한 기억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건드려야 하는 것은 회색의 문이었다.

그곳에는 무의식 안에 잠겨 들어 있는 기억이 모두 깃들어 있을 거다.

내가 지워버렸던 기억조차도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

“둘 중에 어떤 문을 열어보고 싶나요?”

“…회색 문은 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른 문도 똑같은 기분이 드나요?”

“아니요. 그쪽은 아무런 느낌도 안 들어요.”

“멜리사씨, 그럼 이제 회색 문을 열어 보시겠어요?”

“…열고 싶지 않아요.”

멜리사가 움찔움찔 몸을 떤다.

나는 그녀의 코 근처에 촛불을 가져다댔다.

향기를 맡은 그녀는 한층 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순히 따를 것이다.

“열고 싶지 않아도 열어야 합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일이에요.”

“…알겠어요. 한 번 열어볼게요.”

멜리사가 굉장히 힘든 일을 하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는 촛불을 뒤로 물렸다.

촛불에서 나는 향기를 심하게 맡게 하는 건 좋은 사용법이 아니다.

적절하게 조절을 해주면서 그녀를 조금씩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용기 내 봐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에요.”

“아니, 아니에요. 무서워요. 열면 안 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무서우면 손 잡아줄게요.”

두 손 모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에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토닥토닥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다독이니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한다.

사실 진한 향기에 의해 내 말을 거스를 수 없어져서 할 수 있었던 결심이긴 하다.

“여, 열게요? 정말 열어요?”

멜리사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네. 힘줘서 미세요. 제가 지켜줄게요.”

“흐익!”

움찔!

멜리사의 몸이 크게 움찔거린다.

아마 그녀의 내면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큰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나는 흐트러져서 소파 아래로 떨어진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려서 배 부분에 살포시 놓아줬다.

그녀는 바들바들 몸을 떨다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열었어요.”

“순순히 열리던가요?”

“네.”

“문이 잠겨있는 건 아니었군요.”

설명서에는 문이 잠겨 있는 경우는 매우 까다로운 타입이니 주의가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

본인에게 심할 정도로 거북스러운 일을 시키면 세뇌 효과를 받고 있음에도 반발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럴 시에는 사용자에게 부담이 오고 말이다.

그런데 다행이 멜리사는 문이 잠겨 있지 않다고 했다.

까다로운 타입은 아닌 것이다.

“네. 잠겨있진 않았어요.”

문을 열어보니 별 개 없었는지 숨소리가 차분해졌다.

“좋네요. 문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여기서 더 안으로요?”

“네,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뭔지 말씀해주세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요.”

“앞이 잘 안 보이면 불을 켜보는 건 어떨까요?”

“아무것도 없는데 불을 어떻게 켜요. 아무리 찾아봐도 저 외에 다른 게 없어요.”

멜리사는 자기가 있는 곳이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다.

내면세계의 주인인 멜리사는 그곳에서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다만.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어.’

내면세계에서 전능해지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인의 자아가 커진다고 한다.

자아가 커지면 반작용이 나올 확률이 매우 커진다.

그럼 나에게도 큰 위험이 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숨기는 게 좋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빛을 만들어드릴게요. 자, 멜리사씨 잠깐 서서 눈을 감았다가 뜨는 거에요. 그럼 당신 앞에 빛이 있을 겁니다.”

내가 만드는 빛이 아니다.

멜리사의 무의식이 내 말을 듣고 스스로 빛을 만들어낼 거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가 뜬다.

물론 진짜 멜리사의 육체가 눈을 감았다가 뜬 건 아니었다.

“어? 정말 빛이 생겼어요.”

내 말대로 빛이 생기자 멜리사는 나에게 좀 더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시전자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믿음이 본인의 내부를 뒤집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자, 이제 주변이 환하게 다 보이죠?”

“네. 잘 보여요. 근데 빛이 생겨도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는 이유는 내가 세뇌해서 기억을 지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깨우는 것이 내 목적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녀의 무의식에 잠겨 있는 기억을 깨울 필요가 있었다.

“그럼 한 번 찾아볼까요?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잖아요.”

“네, 맞아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죠.”

그녀의 코에 촛불을 가져다 댔다.

향기를 듬뿍 마신 그녀가 좀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멜리사씨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맞아요. 그 사람…그 사람 얼굴을 알고 싶어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 봅시다. 그 사람은 당신한테 어떤 존재인가요?”

“제…제 소중한 사람이에요.”

곧장 주인님이라고 하지 않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멜리사가 아직 내 말을 무조건 따르는 정도로 빠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나요?”

“모르겠어요. 존재하기는 하는 사람인지 제가 더 궁금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지워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그곳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잊어버리게 될 기억이지만요. 셋까지 숫자가 세어지면 그 순간부터입니다. 하나 둘 셋.”

“!!”

멜리사의 얼굴이 굳어진다.

충격을 받았다는 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한 멜리사의 기어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기억이 되돌아오면서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멜리사씨, 멜리사씨?”

“흑…흐흑!”

“진정하세요. 괜찮습니다. 다 잘 될 거에요.”

“흐…흑흑…!”

“잃어버린 기억은 돌아왔나요?”

“네…흑…전부 돌아왔어요.”

“멜리사씨한테 무척 슬픈 기억이었나요?”

멜리사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설움이 몰려오는지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요. 슬픈 기억이 아니에요. 잊어버리면 안 될 소중한 기억이었어요! 제가 왜 기억을 잃어버린 거죠? 너무 답답해서 속이 꽉 막힌 것 같아요.”

역시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멜리사는 기억을 잃어버린 것에 절망했다.

“아마 당신의 주인님이 그걸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

그녀의 얼굴 근처에는 또 다시 촛불이 가까이에 놓여 있다.

이제부터 멜리사는 내 말에 저항하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직까진 또렷하던 멜리사의 정신이 점점 침체되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아는 듯이 말한 나에게 당장이라도 따질 것 같았던 멜리사의 몸이 축 늘어진다.

“멜리사, 내 말이 들린다면 대답하세요.”

“들…려요.”

“좋아요, 이제부터 궁금한 걸 물어볼 거에요. 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해요. 시키는대로 할 거죠? 얌전히 있어 줄 거라고 믿어요.”

“네에….”

멜리사가 얌전하게 대답한다.

완전히 지배권을 가진 지금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다.

“잊어버렸던 기억을 왜 억지로 떠올리려고 한 건가요?”

“…잊으면…안 되는…기억…이었어요. 내…기억…이야….”

“잊으면 편하게 살 수 있잖아요. 재벌 딸로. 메이드 교육 받을 때 괴로워했던 거 잊었어요?”

“아…니에요.”

멜리사가 고개를 젓는다.

정말 비앙카가 말했던 게 사실이었을까?

내기에서 졌지만, 솔직히 그건 비앙카가 운이 좋아서 이긴 거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메이드로 살래, 재벌 딸로 살래 하면 당연히 후자여야 하는 게 맞지 않겠나?

그런데 정말 멜리사는 메이드로 사는 삶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그럼 정말 주인님을 모시고 싶어서 기억을 되찾으려고 했던 거에요?”

“기…억이 없을 땐 몰랐지만, 맞아요. 저는 기억하고 싶었어요. 잃어버린 걸 되찾고 싶었어요.”

“주인님이 원망스럽지 않나요?”

“절대!!”

이젠 정말 멜리사를 받아줘야 할 때인 것 같다.

“끝까지 주인님과 함께하길 바랐군요.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인정할게요. 고생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

멜리사는 내가 사과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당신이 사과하시는 거죠? 절 여기서 꺼내주세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멜리사가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를 바로 꺼내줄 순 없다.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멜리사는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당신을배려한다는 핑계로 한 번 떠나 보내놓고, 괴로워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나서야 겨우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네?”

멜리사는 이미 망가졌다.

비앙카의 교육이 그녀를 뼛속 깊은 곳까지 변화시켰고, 그걸 단순히 기억을 삭제하는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주인인 내가 그녀를 관리해줘야 하는 게 맞는 거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