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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290화 (290/849)

〈 290화 〉 #45. 최면 (3)

* * *

멜리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

눈을 뜬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이 ‘비정상’이었고, 현재 상태가 ‘정상’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님은 안 계시겠지?’

그녀는 낯선 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하게 방을 나섰다.

앞으로 이곳이 그녀가 지낼 곳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 그녀는 집 탐방을 시작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며 집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일어났니?”

“비앙카.”

초보 메이드인 멜리사는 아직 배울 게 많았다.

때문에 비앙카와 함께 지내면서 교육을 해줄 예정이었다.

정식 교육은 주인님이 참관하는 가운데 진행 될 것이고, 중요도가 높지 않은 교육은 지금 당장 받아도 괜찮았다.

“잘 잤어?”

비앙카는 멜리사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비정상’이었던 자신을 ‘정상’으로 되돌리느라 주인님이 힘을 냈다는 걸 알고 있다.

“응.”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다시 주워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얼마나 행복하겠어. 덕분에 주인님께 잔뜩 폐를 끼쳐버렸지만 말이야.”

“…내가 폐를 끼쳤다고?”

멜리사의 행복했던 기분이 비앙카와의 대화로 수직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 주인님이 자애로우셔서 널 다시 받아준 거야. 버림받았으면 주제를 알고 살 것이지 왜 질척인 거야?”

“…….”

비앙카는 팔짱을 낀 채로 멜리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기억이 없는 관계로 멜리사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당연히 그렇겠지. 주인님께서 자비롭게 기억을 지워주셨으니까.”

“내가 기억이 없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뜻으로 자비를 내려주셨지. 그러니까 절대 사라진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 마. 이번에도 실수하면 이번에는 주인님이 손쓰기 전에 내가 널 죽일 거야.”

살벌한 말이다.

하지만 비앙카에게 짜증이 나는 한편,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이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복잡한 생각 하지 마. 앞으로 네가 할 일은 정해져 있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게 있었다.

“주인님을 모시는 일.”

“맞아, 그거야.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모시는 거. 한 때 네가 잃어버렸던 기회이기도 하지.”

“!!”

‘비정상’이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다시 떠오른다.

주인님이 배려를 해주셨는지 당시 고통이 두루뭉술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배려가 멜리사에게 참담함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자상하신 주인님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걸까, 과거의 나는.’

기억이 없었기에 살짝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로 혼이 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지가 뭔데 날 혼내? 나한테 화를 낼 사람은 주인님이지 비앙카 너는 아니라고!’

오기가 생긴다.

지금은 비앙카에게 고개를 숙이겠지만 나중에는 그녀보다 더 총애를 받는 메이드가 될 거다.

과거의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다.

‘날 다시 받아주셨잖아. 그건 내 잘못을 용서해주셨다는 뜻 아니야?’

비앙카는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의 우위를 다지려고 하는 듯한데, 멜리사는 비앙카에게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용서 받은 과거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멜리사가 지금부터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가르쳐줘. 주인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물론 그래야지. 예전보다 더 완벽한 메이드로 만들어줄게.”

멜리사의 도전적인 눈빛을 본 비앙카가 야릇하게 혓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 ? ?

잠깐 서로 신경전을 나누던 것도 잠시.

곧 비앙카의 알찬 메이드 교육이 진행 됐다.

주인님이 오늘 저녁에 잠시 방문한다고 했기에 두 사람 모두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멜리사는 기억 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주인님’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는 두근거림과 동시에 아무런 교육이 되지 않은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적극적으로 교육에 임했다.

또한 비앙카는 주인님에게 ‘멜리사의 메이드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기에 교육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교육은 반드시 주인님이 참석한 상태로 해야 한다는 제한이 걸려있다는 게 불만이 매우 큰 비앙카다.

‘바쁜 사람이 교육 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러니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결국 그녀에게 모든 교육을 순순히 맡겨 줄 것이다.

애초에 진해솔, 그녀의 주인은 그리 팍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꽤 많이 건방진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지 않았나?

그렇게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여자가 합심을 하니 수업 진도가 쑥쑥 나갔다.

“이 정도면 급한 건 대충 다 가르친 것 같네. 물론 여전히 가르칠 것들이 많아. 급하게 오늘 주인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만 알려준 거야. 그래도 예전에 가르쳤던 게 무의식 속에 남아 있나봐.”

“아직 주인님 안 오셨잖아. 더 가르쳐줘.”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려면 주인님 허락이 필요해.”

“교육을 받을 땐 주인님이 계실 때여야 한다는 것 때문이야?”

“응.”

“여태까지 받은 것도 교육이잖아.”

멜리사의 순진한 말에 비앙카가 꺄륵 웃었다.

“지금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생각한 거야? 지금 가르친 건 기초라고 했잖아. 이럴 땐 네가 예전 일을 기억 못하는 게 좀 아쉽다. 그땔 기억하면 이렇게 순진한 소리는 절대 못했을 텐데.”

비앙카는 조교를 하는 것을 즐긴다.

때문에 멜리사를 다시 교육해야 하는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기세등등해서 건방지고 앙칼진 반항을 하는 멜리사를 보니 절로 가학심이 솟아났다.

저 기세등등해 하는 고개를 꺾어서 바닥에 꿇리고 발로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었다.

“주인님 앞에서 하는 교육이 지금 받은 교육이랑 무슨 차이인 거야?”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불길하게 웃는 비앙카를 보며 멜리사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교육 때는 예전보다 더 엄하게 할 생각이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너야 말로 똑바로 교육해야 할 거야. 주인님을 위해서 받는 교육이지, 네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교육 받는 게 아니거든.”

“후후후, 물론이지. 모든 건 주인님을 위해서란다.”

교육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또 다시 팽팽한 신경전을 한다.

두 사람은 친자매 사이지만, 피보단 주인님이라는 존재가 더 중요했다.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서로를 향해 칼도 찔러 넣을 수 있는 사이인 것이다.

쫑긋!

“주인님 오셨다!”

그때, 비앙카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외쳤다.

“주인님이 오셨다고?”

멜리사는 비앙카의 외침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게 누군가가 왔다면 당연히 들렸어야 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부터 갈아입자.”

“잠깐,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갑자기 주인님이 오셨다고?”

“주인님이 왔다는 걸 모른다는 건 네가 아직 메이드로 한참 부족하다는 뜻이야. 모르면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나 해. 어서!”

비앙카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메이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복장이었지만, 멜리사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능숙하게 옷을 착용했다.

“…예쁘네.”

메이드복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니 누가 봐도 예쁘다고 말할 모습이 비춰졌다.

“야한 걸 좋아하시나?”

검은 스타킹과 가터벨트, 가슴이 푹 파지고 어깨는 훤히 드러나 실용성은 제로에 가깝다.

코르셋이 그녀의 허리를 꽉 조이고 있으며 허리 아래로는 팔랑이는 검은색 치마와 그 끝엔 흰색 레이스가 팔랑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메이드복임을 알 수 있는 그런 옷인 것이다.

“왜 하나도 안 불편하지?”

누가 봐도 실용성 제로인 메이드복.

그러나 이상하게도 착용을 하고 나니 하나도 불편하지가 않았다.

허리를 꽉 조였는데도 숨은 편하게 쉬어지고,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고급 옷인가보네.”

그럴 리가 없지만, 자신의 체형에 맞춰서 만들어진 맞춤 옷 같았다.

‘예전의 내가 입었던 옷인 걸까?’

사용감이 없는 메이드 복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잘 맞는다는 건 과거의 자신이 착용했던 옷일 확률이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데….”

주인님은 과거 실수를 기억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었다.

벌컥!

“다 갈아입었으면 빨리 나와. 주인님 거의 다 도착하셨어.”

비앙카가 예의없이 문을 벌컥 열어서 들어와 재촉한다.

비앙카의 행동에 짜증이 난 멜리사가 뾰족하게 말했다.

“예의 좀 지키지 그래?”

“메이드 주제에 예의 따지기는.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할 분은 주인님밖에 없거든? 우리끼리 예의를 왜 지키니? 거추장스럽게.”

“하아.”

이런 애한테 밀려야 할 정도로 과거의 자신은 형편없는 메이드였던 걸까?

비앙카의 재촉에 현관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오늘 배운 바에 따라 무릎을 꿇고 자세를 잡았다.

현관문 앞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기에 무릎이 아프진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자존심 상하지만 비앙카가 말한 것처럼 주인님이 오고 계시는지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어? 오는 거 알고 문 열은 거야?”

“네, 주인님. 어서 오세요.”

“…응. 멜리사는 좀 어때?”

“안으로 들어가세요. 멜리사가 주인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둘이 있을 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주인님 앞이라고 내숭을 부린다.

멜리사는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주인님 앞인지라 다시 집어넣었다.

‘나한테는 첫 만남이란 말이야. 예쁘게 보이고 싶어.’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는 좀 더 몸에 힘을 줘서 허리를 곧게 뻗었다.

그로인해 멜리사의 뽀얀 가슴이 야하게 드러났다.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 볼 테니, 아마 가슴이 더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가슴을 내보이는 것으로 주인님의 예쁨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뻐해 주세요, 주인님.’

“어서 오세요, 주인님.”

“쿨럭! 메, 멜리사. 예쁜 옷 입었네요.”

“부디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멜리사가 바닥에 고개를 더욱 더 조아렸다.

“알았어. 편하게 할 테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왜 현관에 그러고 있는 거야? 비앙카 또 너지?”

“메이드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주인님께서 불편하시다고 하면 무릎은 꿇지 않을게요.”

“응. 엄청 불편하니까 평범하게 인사하자.”

주인님이 일어나라는 말에 멜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인님을 바라봤다.

기억을 잃었기에 멜리사는 주인님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네에~ 그나저나 저녁은 드셨어요?”

“시간이 몇 시인데 설마 안 먹었을까. 너희는?”

“저희도 다 먹었어요. 주인님 배고프시면 제가 맛있는 음식 해드리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너 요리 할 줄 알았어?”

“아니요?”

“하…그래놓고 나한테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다고 한 거야?”

“제가 곱게 자랐잖아요. 그런 건 사람 시키면 되는 거에요.”

멜리사는 주인님의 얼굴을 보고 굳었다가 비앙카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주인님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주인님은 누가 봐도 비앙카에게 더 정을 주고 계셨다.

멜리사 자신에게는 존댓말을 쓰며 거리감을 보였고 말이다.

‘내가 노력해야 돼.’

비앙카가 자신만만해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멜리사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비앙카와의 우위를 다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것.

그게 멜리사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급한 과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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