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47. 망나니 재벌들 (6)
* * *
잠깐 쉴 수 있을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먹고 싶은 거 있는 사람!
노래를 부르느라 열량을 많이 써서 다들 배고파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휴식하는 사이 나는 **패드를 들고 뚝딱뚝딱 음악을 찍어냈다.
간단한 멜로디 작업이었지만 영감을 받았던 음악이 구체화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하는 거야?”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들어봐도 돼?”
내가 **패드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음악이었으니 제키가 호기심을 보이는 게 당연한 일.
영감을 받아 귓가에 들렸던 멜로디를 거의 다 찍었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의 다 찍었거든? 잠시만.”
빠르게 마무리 작업을 하고 제키에게 넘겼다.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완성 된 멜로디가 대단한 퀄리티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영감을 받아 귓가에 들렸던 멜로디는 지금 이것보다 훨씬 음이 풍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키는 이 멜로디의 가치를 금방 알아차렸다.
리듬을 타는 제키의 어깨춤이 신나 있었다.
“좋은데?”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어디 들어 본 적 있거나 그렇진 않아?”
“적어도 어디서 들어 본 멜로디는 아니야. 근데 이거 혹시 방금 생각해낸 거야?”
“응. 우리 녹음한 거 듣고 생각났어.”
“…형은 여전히 재능충이네.”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나야 치트키로 반칙을 쓴 거고, 제키는 순수한 천재 작곡가다.
제키는 전혀 나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
‘인마, 치트키를 쓴 나랑 수준이 비슷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거라고.’
제키는 내가 찍은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연신 감탄을 뱉었다.
“이거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데.”
“그럼 이거 너 줄 테니까, 네가 끝까지 만들어볼래?”
작곡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지금 내가 만든 게 뼈대라면, 제키가 이제부터 할 일은 살을 붙여서 예쁘게 꾸미는 일이었다.
“이걸 나한테 준다고? 아깝지 않겠어?”
“너한테 주는 건데 아까울 게 뭐가 있어.”
“이런 곡은 반주 올리는 게 진짜 재밌는 건데.”
원래 취미가 일이 되면 재미가 없어지는 법인데, 제키는 여전히 작곡을 하는 걸 재밌어 한다.
그렇다고 내가 작곡을 하는 게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영감을 받아서 하는 작곡은 술술 진행이 돼서 만드는 게 참 재밌다.
하지만 너무 쉽게 얻은 능력이어서 일까?
아현이나 제키처럼 온전히 작곡이라는 것에 빠져서 한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서 작곡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가 이 멜로디로 어떻게 곡을 만들어 올지 기대하는 것도 재미거든. 지금처럼 영감을 받아서 작곡할 때는 이미 결과가 내 머릿속에 들어있어서 재미가 없어. 근데 너한테 맡기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쪽으로 곡이 완성 되잖아.”
“와~ 혼자서 그런 걸 비교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되게 고마워했는데.”
내 곡을 제키에게 맡겼던 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야, 그래도 곡을 준 건 준 거잖아.”
“그래서 형이 생각했던 거랑 내가 만든 것 중에 뭐가 더 좋았는데?”
“당연히 네가 만든 곡이 더 좋았지. 별로였으면 별로라고 말했을 거야. 상처주기 싫어서 별로인 걸 좋다고 하는 성격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내 말을 듣고서야 제키가 안도한다.
둘이 뭐해? 음식 왔어! 밥 먹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음식을 가져왔던 모양이다.
작곡은 뒤로 미뤄두고 밥을 먹기 위해 움직였다.
? ? ?
갑작스럽게 영감을 받았던 건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밥을 먹다가 우연히 내가 10분 만에 뚝딱 만들었던 멜로디가 화제로 올랐다.
줌베이는 내가 작곡도 한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가 작곡도 한다고?! 나도 들을래! 들려줘! 들려줘!!
대충 만든 거야. 완성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걸 왜 들려 달래?
벌컥!
줌베이!
노래를 들려달라는 줌베이와 밥부터 좀 먹자는 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 부산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작업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낯선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줌베이를 부르면서 말이다.
셰인?!
작업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본 줌베이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갑자기 와서 싫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멍청아! 말도 없이 와서 놀란 거잖아.
나 다시 가?
아니야! 마침 잘 왔어.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소개시켜 줄게.
줌베이가 먹던 걸 던져놓고 달려가더니 남자와 포옹을 한다.
그녀가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짐작이 됐다.
‘쟤가 걔구나.’
‘딱 봐도 남자친구네.’
‘잘 어울리는데?’
‘키가 좀 작다. 아직 성장기니까….’
갑자기 작업실을 방문한 남자.
바로 줌베이가 말했던 남자친구였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두 번째였다.
어제 줌베이의 부탁으로 통화를 했었다.
안녕! 어제 통화하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와~ 잘 생겼는데?
줌베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구나?
줌베이의 남자친구 셰인을 설명하자면 간단하게 ‘미소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금발에 에메랄드 눈동자는 왕자님을 연상시켰고, 차림새도 곱게 큰 도련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윽!
셰인은 여자친구와 재회의 포옹을 나누고 나서 우리를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꼬맹이 주제에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게 보여서 너무 웃겼다.
“오늘도 우릴 경계하려는 모양인데?”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어련 하려고.”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줌베이한테 허튼 짓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제법 야무진 태도를 보여주던 셰인은 결국 못 참고 작업실까지 들이 닥친 것으로 보였다.
줌베이가 기분 나빠했으면 몰라도, 남자 친구가 여기까지 와준 것이 기쁜 모양인지라 우리도 뭐라 하고 싶지 않았다.
‘귀엽다, 귀여워.’
셰인은 제법 사납게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우리를 유심히 관찰했다.
한 명 한 명 주시하다가 이내 나에게까지 시선이 닿은 순간,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젠장,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심하잖아! 줌베이, 난 바람은 용서 못해!!
내가 널 두고 바람을 왜 펴? 오해야.
오해라고? 나한테 허락받지도 않고겉 번지르르한 저 놈들이랑 작업을 해놓고선? 오늘 오길 잘 했네. 내가 다 감시하고 있을 거야!
고지식한 꼬맹이가 줌베이를 마구 쫀다.
슬슬 귀여운 연애에서 벗어나 질척한 집착이 묻어나오는, 미성년자들이 하기엔 다소 문제가 많아 보이는 상황이 펼쳐지기 전에 상황을 수습하고자 말했다.
여자친구를 그렇게 못 믿어서야. 남자답지 못하네.
뭐?
어느 여자가 일하는 거에 일일이 따지는 남자를 좋아하겠어. 차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해.
오빠! 왜 그래. 하지 마.
여기서 어처구니없게도 줌베이가 남자친구 편을 든다.
이래서 남의 연애에 참견하면 손해인 거다.
까도 내가 깐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넌 우리한테 남자친구 자랑을 그렇게 많이 해댔는데, 정작 네 남자친구는 오자마자 널 추궁하느라 바쁘잖아. 그리고 저 자식이 하는 말 들어보면 네가 바람을 피울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은데? 넌 네 여자친구를 뭐로 보는 거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전전긍긍 하면서 저자세로 구는 게 즐겁냐?
!!
누군가한테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거면 네 자존감을 높여. 여자한테 억지 투정 부리지 말고.
나는 사정상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한 상황 속에서 여자들과 사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여자들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울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그냥…그냥 나는!
내 말에 한동안 말을 잃고 충격 받은 표정을 짓던 셰인이 울컥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한다.
그저 질투가 나서 투정을 부린 거였는데 이런 심한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 못했나보다.
역시 아직 어려도 너무 어리다.
당연히 그래야지. 진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으면 나한테 한 대 맞았어, 인마.
네, 네가 뭔데 날 때린다 만다야? 줌베이는 괜찮다고 했어!
오빠 자격으로 하는 말이다. 멍청한 놈아. 괜찮다고 말하면 진짜 괜찮은 건 줄 알면 어떡하냐?
제 3자로서 과한 참견이라는 건 알고 있다.
본인이 원하지 않은 참견일 수도 있고.
하지만 어른으로서 이 정도 훈수는 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 아이들을 위한 자비였다.
‘저런 태도가 계속 되면 당연히 해도 되는 권리인 줄 알게 된다고.’
줌베이도 첫사랑이고, 저 친구도 연애는 처음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사랑이 서툴러서 생긴 해프닝이겠지만, 이번 일로 저 친구의 투정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버릇들기 전에 고쳐줘야지.’
어스타로 인기에 탄력이 받은 줌베이는 앞으로도 계속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갈 거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고 말이다.
‘우리랑 작업을 한다는 말에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질투심이 많은 친구인 것 같은데, 그 꼴을 얌전히 볼 리가 있겠어?’
지구에서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에서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줌베이가 혹여 저 녀석 때문에 활동에 문제가 생긴다면 함께 협업하는 입장에서 많이 곤란하다.
‘질투심이 계속 되면 결국 헤어짐밖에 없으니까.’
사랑을 했을 뿐인데, 그로인해 서로 상처만 받고 헤어지는 결말을 맞이하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이미 한 번 언급했지만, 저 둘은 서로가 첫사랑이다.
그러니 좀 더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쌓기 위해서라도 지적해서 고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저놈 때문에 줌베이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보기 싫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내가 저 녀석을 언제 또 보겠는가?
생활하는 공간이 너무 다른데 말이다.
…….
이제 안 그러겠대. 그러니까 그만해.
셰인은 입 한 번 벙긋대지도 않았지만, 줌베이가 만류한다.
저렇게 말리면 더 화가 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셰인 본인도 무척 쪽팔릴 것이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셰인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숙여진다.
머릿속이 꽤나 복잡한 모양.
내가 한 말에 울컥해서 반박하면 더 심하게 수위를 높이려고 했는데, 의외로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듯했다.
…….
…….
“…….”
“…….”
살벌한 침묵이 맴돈다.
좋았던 분위기는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씹창나서 다들 눈알만 굴리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인정할게. 분하지만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아.
셰인!
감사 인사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덕분에 줌베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질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야.
읏! 셰, 셰인 멋있어.
그냥 외형만 왕자님 같은 건 줄 알았는데 행동 자체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그 모습에 줌베이의 눈동자가 하트로 바뀐다.
‘귀한 집 자식인가?’
저 나이에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줌베이가 영 이상한 놈이랑 연애를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좋아, 더 이상 참견은 안 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이리 앉아. 같이 먹자.
툭툭!
내 옆자리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서 앉으라고 툭툭 쳤다.
자기 잘못은 인정해도 내 옆에 앉기는 싫었는지 셰인이 뚱한 표정을 짓는다.
셰인?
줌베이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제야 한숨을 푹 쉬더니 내가 빼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싫지만, 자기 때문에 줌베이가 안절부절 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작 잘했으면 됐을 걸. 쯧쯧!’
나는 의자에 앉은 셰인의 어깨에 냉큼 팔을 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