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47. 망나니 재벌들 (9)
* * *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현재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없을 터다.
“비앙카, 나한테 이런 거 말해준 적 없잖아. 너무 갑작스럽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어도 얘기를 하긴 했어. 내가 보호해주겠다고 했잖아.
비앙카가 갑자기 전화를 하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갑자기 반말을 했다.
그때 이상함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이후에야 파악이 됐다.
“이런 화끈한 방법을 쓸 줄 몰랐지.”
잠깐, 제가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 설마 해솔인가요?
맞아요. 진해솔.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조연주씨가 해솔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짓궂은 장난을 좀 쳤어요.
“장난을 쳤다고? 너 또 나쁜 짓 했지? 연주 누님, 괜찮아요?”
비앙카가 짓궂은 장난을 쳤단다.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일이다.
그녀의 비틀린 성격으로 고생한 적이 한 두 번인가?
나쁜 짓 안 했어.
“내가 널 몰라?”
…두 사람 굉장히 친해보이네요.
해외에서 녹음을 하는 중이라서 당장 비앙카와 연주 누님이 만나고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일단 통화에서라도 비앙카가 더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막아야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나중에 누님한테 다 물어볼 거야.”
알았어. 이상한 짓 안 해.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히 증명은 된 것 같네요. 보시는 바와 같이 해솔이랑 저랑 친해요.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죠? 설마 해솔이 너 나 몰래…!
“그런 거 아니에요.”
연주 누님에게 데뷔조에 들기 위해 했던 좋지 않았던 행동 말이다.
‘내가 한 게 아닌데….’
그때의 업보가 쌓이고 쌓여서 자꾸만 연주 누님이 나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장난을 쳐서 그런 오해를 하셨나본데, 그런 사이였으면 해솔이가 저한테 편하게 말을 못했겠죠?
그럼 정말 두 사람이 순수하게 친구라도 된다는 건가요?
네, 바로 그거에요. 제가 좀 못된 짓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어요. 연주씨가 해솔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궁금했거든요.
비앙카가 생각 없이 연주 누님과 1:1로 대면을 한 건 아니었는지 현란하게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때문에 만났는지는 알겠는데,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용건만 딱 해결하고 헤어져.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지?”
연주 누님 괴롭히지 마라, 이 노예야!
녹음만 아니었어도 당장 그쪽으로 이동해서 비앙카의 엉덩이를 때려줬을 거다.
알겠어용~! 걱정하지 말고 녹음 잘해! 빠이?
뚝!
나와의 사이를 연주 누님에게 증명 시킨 것으로 내 쓸모가 끝났는지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어서 어쩔 수 없긴 한데 무지하게 불안했다.
연주 누님이 아무리 튼튼한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비앙카의 순수한 악의를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걱정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연주 누님의 번호에 메시지를 하나 날렸다.
[비앙카가 이상한 짓 하면서 괴롭히면 저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연주 누님 : 걱정 하지 마.]
비앙카가 정말 심한 짓은 하지 않았는지 메시지로 온 대답이 의외로 덤덤하다.
“형,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되게 심각해 보이는데.”
남은규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쭙쭙 빨면서 내게 다가와 물었다.
녹음이 잘 풀린 덕분에 멤버들 모두 긴장이 많이 풀린 상태였다.
이제 녹음은 마무리 단계에 왔다.
“아…그냥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 심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설마 여기서 더 큰일을 만들겠는가?
비앙카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니 큰 문제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 ? ?
에어플레인의 팬들은 줌베이와 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번 작업이 에어플레인에게 큰 이득이 되어 돌아 올 것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일해라, 허니 엔터!’
그들은 다음 활동 소식도 곧 발표 됐다.
멤버 유닛 활동도 깜짝 놀랄 소식인데 그 외의 멤버는 개인 활동에 전념 할 예정이라는 것이 말이다.
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자연스레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보게 됐다.
그건 바로 ‘연기’
에어플레인은 멤버들 중 연기돌이 두 명이나 있었고, 실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개인 활동이면 준이랑 해솔이 연기를 볼 수 있는 건가?’
팬들 모두 준이와 해솔이는 카메라에 오랫동안 기록 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못하면 말리겠지만, 곧 잘 하는 편이니 그 귀한 모습을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기를 하게 되면 가장 좋은 점이 더 있었다.
‘해외로 나가질 않잖아! 일 잘 하네.’
해외에서 너무 잘 나가서 국내 활동에 소홀해질 만도 한데, 이렇게 유닛 활동도 해주고 멤버들 개인 활동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니 팬들 입장에선 고마울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 활동을 싫어하고 완전체로 활동해주길 바라는 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였다.
‘완전체 활동하면 국내 몇 주 돌다가 해외로 나갈 게 뻔하잖아.’
회사는 이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고, 국내 활동보다 해외 활동이 훨씬 큰돈이 된다는 건 바뀌지 않는 진리다.
그렇게 국내 팬들은 다음 활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운데, 해외 팬들은 뿔이 났다.
“왜 노래를 냈으면서 함께 활동하지 않는 거야!”
칸나는 콩! 하고 탁자를 내려쳤다.
줌베이와 협업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거다.
근데 왜 활동을 안 하냔 말이다.
“꼭 만나보고 싶은데….”
언니가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벌써 그와 만났을 거다.
여전히 CF 제의가 불발 된 게 언니의 방해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는 칸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사실 칸나는 이미 잔뜩 화가 나서 언니를 만나러 갔었다.
하지만 정작 언니 앞에선 아무 말도 못했다.
‘내, 내가 봐준 거야.’
언니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위협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경쟁자를 견제하는 건 후계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그런 걸 따지는 건 좀 쪽팔리지.’
그래서 칸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그녀가 아는 언니라면 따진다고 해서 견제하는 걸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꿈틀거렸다고 더 압박할 사람이야.’
자신이 왜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나왔던가.
이성을 되찾은 칸나는 다행히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기 전에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다만 언니에게 반기를 들게 만든 진해솔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끝까지 버리지 못한 집착과 아쉬움 때문에 칸나는 생전 처음으로 ‘덕질’이라는 걸 하게 됐다.
낯선 동양 나라의 아이돌 가수의 덕질을 말이다.
‘더 구할 수 있는 게 없나? 소속사 일 안 해?’
돈 많은 사람의 덕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원활한 덕질을 위해 통역을 고용했고, 에어플레인의 굿즈를 모았다.
해외에서 오는 택배를 기다리는 사이, 칸나는 에어플레인이 데뷔부터 시작해서 출연한 프로그램을 전부 모아서 자막을 달아 감상했다.
그녀의 진해솔에 대한 집착은 당연하지만 영상과 굿즈로 끝나지 않았다.
진해솔의 홈마의 사진을 구매하는 건 기본이오, 그에 한 발 더 나가서 대리찍사를 고용해 진해솔의 사진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질에 돈이 쑹텅쑹텅 나갔지만, 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갑은 고작 이 정도로 문제가 생길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더…더!!!”
시작은 가벼워도 그 일에 점점 몰입하다보면 문제가 되는 법.
칸나는 온갖 것들을 다 모아다가 집에 전시해놨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더 이상 만족스러운 덕질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스네이크 클럽 해체 됐다고 너무 집에만 있는 거 아니야? 안 심심해? 나와! 오랜만에 애들 뭉쳤어.
“난 됐어, 모여봤자 술밖에 더 먹어? 그런 거 이제 시시해.”
넌 뭐 대단한 거라도 하냐?
대단한 걸 하진 않는다.
그래봤자 ‘덕질’이니까.
‘젠장.’
할 말 없지? 풋! 빨리 나와, 이년아. 이쁜이들 불렀으니까.
친구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칸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친구가 불렀다는 이쁜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진해솔보다 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까?’
칸나는 웬만하면 진해솔을 갖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접고 싶었다.
이미 너무 먼 길을 오긴 한 것 같지만, 언니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직전에 멈췄던 것처럼 진해솔에 대한 관심도 문제가 터지기 전에 멈출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
꿍! 꿍! 꿍! 꿍!
심장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익숙한 리듬에 칸나가 눈을 감고 술맛을 즐겼다.
꺄르륵!
와하하!!
리듬에 몸을 맡긴 여자들이 한 손에는 술을, 나머지 한 손에는 남자를 끼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네이크 클럽이 해체 되면서 분위기가 살벌한지라 한동안 다들 자재를 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 모여서 클럽파티를 하게 된 거였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오늘 다 풀고 갈 셈인지, 친구들이 한껏 풀어져서 온갖 지랄을 다 해대고 있었다.
여기가 호텔방도 아닌데, 파트너의 옷 안에 거침없이 쑥쑥 손을 집어넣어 욕망을 풀어댔던 것이다.
클럽의 구석에는 어김없이 남녀가 들러붙어서 혀를 섞어대고 있었다.
“야, 재미없어? 오랜만에 파티라서 재미없을 리가 없는데? 오늘 물 엄청 좋아!”
다들 쌓인 게 많아서 작정하고 남자를 왕창 데려왔단다.
클럽에 있는 사람의 성별 비율이 여자 반, 남자 반인 것 자체가 엄청난 돈이 들어간 파티임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나는 흥이 나질 않았다.
“쟤네 얼마주고 불렀어?”
“급에 따라 다르지. 그래도 기본 9천 달러는 넘는 애들이야!”
“저런 것들을 그 값 주고 불렀다고?”
“마음에 드는 애가 한 명도 없어?”
“어.”
“갑자기 왜 까다롭게 굴어? 아무나 데리고 잘 놀았잖아.”
친구는 갑자기 비싼 척 구는 칸나가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사실 누가 봐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서 파티를 준비한 주최자 입장에서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긴 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놀아. 천천히 고를 테니까.”
“여유부리면 속 꽉 찬 놈 다 뺏기니까 빨리빨리 골라 잡아.”
친구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를 낚으러 사라졌다.
칸나는 친구가 사라진지 한참 뒤에도 남자를 곁에 두지 않았다.
남자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다들 눈이 어떻게 됐나? 저런 빻은 놈들을 데리고 노는 게 재밌다고?’
그 친구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스네이크 클럽이 해체 되고 몸을 사리는 사이에 칸나의 눈이 엄청나게 높아져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하루 종일 진해솔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사진을 보며, 노래를 들었다.
매일매일 보는 남자가 진해솔이다.
기준이 망가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칸나도 연예인과 일반인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그럽게 기준을 낮춰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준에 차는 놈이 없었던 게 안타까울 뿐.
“혼자 계시는 건가요?”
그때, 남자를 많이 데려왔다더니 파트너를 끼지 않고 있는 남자가 칸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칸나는 힐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들어 꺼지라며 휘휘 저었다.
누가 봐도 거절하는 뉘앙스였으나 남자는 뻔뻔하게 싱긋 웃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혼자 술 마시면 재미없잖아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됐으니까 얼굴 치워. 눈 썩을 것 같으니까.”
“!!”
이 파티에 초대 된 것만으로도 중상급은 되는 미모인 남자다.
이런 심한 모욕을 들어 본 게 처음이었던 남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뚝!
남자가 소리를 지른 순간 애석하게도 음악이 잠깐 끊어졌고, 덕분에 파티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의 귀에 남자의 외침이 또렷하게 전달됐다.
웅성웅성
“뭐야, 시발.”
“??”
“저 자식 지금 칸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아무리 남자와 노는 게 좋다고 해도,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까지 참아 줄 만큼 마음 넓은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파티장 분위기가 서늘해진 건 순식간이었다.
“아.”
남자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으니 당황하지 않고 베길 수 없었다.
“분위기 좋았는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끼어서 씹창을 내네.”
“자,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야! 뭐해, 쫓아내!”
“네, 아가씨!”
남자가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찰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남자는 경호원에게 양 팔이 붙잡혀 끌려갔다.
“아악! 아파요! 자, 잠깐만! 난 억울해! 억울하다고! 저쪽에서 먼저…아악!”
남자가 끌려갔지만, 파티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발, 어떡하지?'
문제를 일으킨 자신이 수습하는 게 가장 좋다.
친구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줬지만, 문제가 생긴 이유가 자신인 건 바뀌지 않는다.
기분이 나빠서 친구들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이대로 파티가 흐지부지 끝나게 되면, 소문이 좋지 않게 날 것이고 그럼 파티에 참석하기가 어려워진다.
재벌들이 뭉쳤다고 따돌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굴린 칸나가 겉으로는 여유있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품에서 지갑을 꺼내 달러를 번쩍 들어올렸다.
두둑하게 챙겨오길 잘했다.
“시시하게 다들 이럴 거야? 분위기 살리는데 성공하면 천달러!”
와아아아악!!!!!!!!!!!
언제나 그렇듯 인생을 쉽게 사는데에는 '돈'만 한 게 없었다.
남자가 사라진 클럽 안이 다시 흥겨워지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