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 #47. 망나니 재벌들 (11)
* * *
내 작업실, 가보고 싶은 사람?
내가 셰인의 혼을 쏙 빼놓는 사이.
로잘린이 갑자기 흥을 내서는 작업실을 가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다.
제키와 나는 당연히 거절 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기에 바로 콜을 외쳤다.
누나!! 이놈들 뭘 믿고 작업실에 들여?!
발작하는 셰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우리는 동시에 우렁차게 외쳤다.
실례가 아니라면 작업실을 구경해보고 싶습니다. 제 평생 소원이 작업실을 갖는 거거든요.
저도 꼭가보고 싶습니다! 프로 작곡가 작업실은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좋았어!그럼 당장 가자. 이 근처라서 걸어서 갈 수 있어.
로잘린은 바이크 때문에 먼저 이동하고 셰인이 우리를 이끌고 작업실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걸어서 약 5분 만에 로잘린의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빌보드 프로 작곡가라는 대단한 위명이 허튼 것은 아니었는지 제키와 나는 작업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돌아갔다.
그녀의 작업실에 설치되어 있는 온갖 기계와 악기들의 수준이 우리의 눈을 현혹시켰기 때문이었다.
대단하네요. 이걸 갖고 계실 줄이야.
벽에 걸린 싸인 된 기타를 보며 넋을 놓은 제키에게 로잘린이 저 기타를 얻기 위해 어떤 모험을 했는지 자랑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쪽 계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대도 모두가 알 정도로 대단한 기타리스트의 싸인이 담긴 애장품이라고 한다.
부러워요. 이 공간이 딱제가 꿈꾸던 작업실이에요.
로잘린의 작업실을 구경하는 재미는 스타 애장품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흔쾌히 자기 작업물도 우리에게 들려줬다.
이건 셰인한테 까인 음악들.
까였다기엔 퀄리티가 굉장한데요?셰인이 듣는 귀가 엄청 좋다고 듣긴 했는데, 이런 음악이 묻히기엔 너무 아깝네요.
처음엔 나도 그랬어. 좀 욱하기도 했지. 이 음악이 왜별로라는 거야?! 하면서 말이야.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무시하고 음악을 팔았어. 아무리 내 동생이라지만 프로 작곡가도 아닌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순 없잖아? 근데 어이가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더라. 쟤가 별로라는 음악은 절대 대박을 안 치는 거야.
아예 반응이 나빴던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대박을 낸 곡들은 모두 셰인이 인정한 음악이었다고 한다.
그걸 몇 번의 경험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 로잘린은 이후로 동생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로잘린은 지금까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잘 나갈 수 있었던 건 내 동생 덕이 커. 쟤가 곡을 골라주지 않았으면 지금의 명성은 불가능했겠지.
셰인과 로잘린은 남매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였다.
동생을 칭찬하는 로잘린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아무리 남자가 귀한 세계라지만, 저렇게까지 남매 사이가 좋은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나저나셰인한테 들었는데 얘한테 완성 된 곡이 듣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며?
아직 완성 되지 않았어요. 그냥 멜로디만요.
부럽다. 난 얘한테 그런 소리 들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 퇴짜를 맞거든.
대부분 퇴짜를 맞는다고?
활동은 꾸준히 하고 계시잖아요.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에요? 이번 노래도 엄청좋았는 걸요.
외국 애들은 대부분 겸손하기보단 자기 능력을 뽐내는 걸 좋아한다.
빌보드 작곡가인 로잘린이니 더더욱 그랬어야 하는 게 맞다.
로잘린이 내 말에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옛날에 써놨던 곡을 다듬고 다듬어서 겨우 낸 곡들이야. 아! 이번에 줌베이한테 준 곡은 빼고. 덕분에 오랜만에 좋은 곡을 썼어.
항상 유행을 선도하는 작곡가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누나가 만든 곡은 언제나 최고야!! 그런 말 하지 마!
셰인이 자신 없어 하는 누나를 보며 울컥 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로잘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셰인의 손을 꽉 붙잡아줬다.
그래, 여전히 내 음악은 최고지. 다만 이제 지쳐버렸어. 더는 좋은 음악을 만들 수가 없을 것 같아.
누나...!
미안하다, 셰인. 너한테는 영원히 든든한 누나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셰인은 음악을 평가할 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누나가 힘들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로 괜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셰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고, 누나를 싸고돌게 되는 현재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확실히 서로한테 굉장히 괴로운 시간이었겠네.’
솔직하게 음악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동생과, 그런 동생에게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 누나.
로잘린의 슬럼프가 사라지면 해결 될 간단한 문제였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즘엔 새로운 자극을 받아 보려고 애쓰고 있어. 남자도 만나고, 바이크 타면서 여행도 다녀보고, 낯선 사람도 많이 만나보면서 말이야.
그 덕을 저희가 본 거였군요.
아무리 그녀가 만든 곡을 작업하게 됐다 해도 로잘린이 이런 자리에 나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영감을 받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로잘린이기에 우리에게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응, 너희처럼 잘 생긴 애들을 보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어.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로잘린의 고백을 듣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제키가 말했다.
같이 노래를 만들어보는 거에요.
노래를 같이 만든다고?
여태까지 로잘린은 혼자서 음악을 만들었잖아요.
당연하지.
누구도 그녀의 노래에 참견할 수 없었다.
…동생 빼고.
로잘린한테는 색다른 경험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으음….
낯선 사람만 만나고 다니지 말고, 색다른 작곡을 시도해보는 게 어떠냐는 거에요.
작곡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의견 다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다툼까지도 로잘린씨한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
…….
우리를 경계하느라 정신이 없던 셰인도 지금은 섣불리 뭐라 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의견이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너희만 괜찮다면 해보고 싶어!
로잘린이 생각을 끝내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내가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되면, 꼭 은혜 갚을게. 나한테 바라는 게 뭐든 다 들어 줄 거라고!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슬럼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은 그녀는 한껏 희망으로 가득찼다.
? ? ?
로잘린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우리는 스케줄에 따라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쉬운 대로 화상 채팅을 이용해서 교류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만나서 노래를 만드는 것보단 못할 게 뻔하기에 아쉬움이 컸다.
제키는 멤버들이 개인 활동에 들어가면 로잘린이 있는 곳으로 아예 갈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제키는 이 기간에 작곡에 집중하겠다고 말을 해놓은 터라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작곡가랑 같이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는데 스케줄이 눈에 들어오겠냐고.’
해외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얻게 된 이틀의 휴식 시간.
나는 란나씨에게 달려갔다.
“사장님!”
미리 말을 하지 않고 깜짝 등장해서 그런지 란나가 굉장히 좋아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짧은 단발이 되어 있었다.
“머리 잘랐네요? 잘 어울려요.”
“앗!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로 알아봐주실 줄은 몰랐는데…. 사장님은 오늘도 잘 생기셨네요.”
란나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배시시 웃는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얼굴이다 보니 변화가 생길 리 없다.
“뭐하고 지냈어요?”
“잘 지내고 있었어요. 카페가 완전히 안정화 돼서요. 저도 이젠 음료 개발보다는 맛을 높이는데 신경 쓰고 있어요.”
“학원 다니고 있다고 했었죠?”
“네!”
카페에 점점 진심이 되고 있는지 란나씨는 요즘 바리스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니 확실히 맛이 달라진다며 재잘재잘 떠드는 게 굉장히 행복해보였다.
“손님들이 맛이 점점 좋아진데요.”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네요. 커피 한 번 마셔 봐도 될까요?”
“그럼요! 혹시 배 안 부르시면 간식도 좀 드릴까요?”
“란나씨가 괜찮다면요.”
날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는지 하나씩 나르기 시작하니 테이블이 어느새 꽉 찼다.
“이 케이크, 유명 베이커리 건데 겨우 뚫어서 납품 받은 거에요. 카페에서 정말 인기 많아요. 마진을 크게 잡진 않았는데, 미끼 상품으로 효과가 대단해요. 이 케이크 먹으려고 카페 오는 손님들이 계실 정도로요.”
“한 번 먹어볼게요.”
유명 베이커리에서 만든 케이크.
입에 넣고 꿀떡 삼키고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생각보다 달지 않은데요? 근데 굉장히 부드럽네요. 맛있어요.”
내가 생크림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 생크림이 평소 내가 먹어대던 생크림과는 다른 종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죠? 그 베이커리가 케이크를 정말 맛있게 만들어요. 우리 카페 손님들한테 이 케이크를 맛보게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카페에서 팔 수 있게 된 대신 마진이 거의 남지 않을 수준으로 단가를 높여줘야 했지만 란나는 후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흠, 이 케이크 많이 나가요?”
“오늘 하나 남은 게 특이한 거일 정도에요. 거의 대부분 케이크는 마감 전에 다 팔려서 못 파는 편이에요.”
“다른 간식 종류는요?”
“케이크 다음으로 잘 나가는 건 스콘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스콘을 떼서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신경 써서 구하셨나보네요.”
“맛으로는 어디가도 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욕심이에요.”
란나씨가 운영하는 카페가 빠르게 안정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외모로 홍보가 된 덕분도 있지만, 가게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라 커피를 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도 컸다.
그런데 심지어 란나씨가 바리스타 학원까지 가면서 커피 맛을 높이는 중이기까지 하다.
거기에 맛있는 케이크까지 마진 생각하지 않고 판매한다?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지.’
어쩌면 그녀의 능력을 펼쳐 보이기엔 카페 하나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당장 2호점을 생각하는 건 너무 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미리 언급해서 그녀에게 확실한 목표를 만들어주는 건 나쁘지 않을 듯 하다.
“혹시 카페 2호점 생각 있어요?”
“네? 뭐가요?”
란나씨는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내가 재차 2호점을 말하자 눈이 커졌다.
“2호점이요!? 설마 프렌차이즈 말씀하시는 거에요?”
“네. 맞아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란나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난색을 표한다.
“왜 못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란나씨는 충분히 할 능력이 돼요.”
“아직 이 카페에도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여기서 2호점을 더 낸다고요? 감당하지 못할 거에요.”
“지금 당장 하자는 게 아니에요. 란나씨가 바라는 대로 커피 맛을 좀 더 높이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다 해결 됐을 때를 말하는 거죠. 아마 몇 년 후가 되지 않을까요?”
“몇 년 후….”
“그때쯤이면 란나씨도 여유가 생길 거에요. 그럴 때 2호점을 목표로 삼아보자는 거죠. 제가 보기에 란나씨라면 2호점도 충분히 잘 운영할 수 있을 거에요. 지금의 카페가 증거니까요.”
가게는 얼마든지 내가 구해줄 수 있다.
지금 이 카페보다 더 접근성이 좋은 곳에 말이다.
카페를 이곳에 연 것은 오로지 란나씨와의 원할 한 접촉을 위해서였다.
2호점은 그럴 필요 없으니 훨씬 더 크고 좋은 곳에 낼 수 있을 거다.
“좀 생각해봐도 될까요? 지금 당장 2호점을 내자고 해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쉽게 답이 나오질 않아요.”
“물론이에요. 나중에 다시 물어볼게요. 2호점 생각이 있는지. 그때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처음에는 기겁을 한 그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정리 되는지 긍정적인 느낌으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 생크림, 정말 맛있네요.”
“그렇게 맛있으세요? 헤헤.”
뿌듯해 하는 란나씨에게 말했다.
“란나씨도 한 입 해요.”
“아…살 쪄서요.”
“에이, 뺄 살이 어디 있다고요. 한 입만 해요.”
“그으럼 딱 한 입만 먹어볼까요?”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케이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포크로 생크림을 푹 찍어서 내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입술을 란나씨에게 쭈욱 내밀고 말했다.
“자, 맛보세요.”
“!!”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먹으라는 의미였고, 그렇게 했을 때 뒤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얼굴을 붉힌 란나씨가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내 입술로 다가온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입술을 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