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 #48. 아가씨들의 남자 (5)
* * *
며칠 후.
“그래서 준비는?”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서의 다크서클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칸나는 비서가 호텔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푸드 트럭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그녀의 비서는 칸나의 명령으로 뒤늦게 해외로 출국했고, 도착하자마자 푸드 트럭 섭외라는 황당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일을, 언어도 통하지 않은 타국에서 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촉하는 칸나의 행동이 익숙했던 비서가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업체를 섭외는 끝난 상태입니다. 다만 주문이 밀려 있어서 돈을 많이 주고 순서를 바꿨습니다.”
“내가 언제 돈 많이 들었다고 뭐라 한 적 있어?”
“아뇨. 그리고 음식 수준을 최고급으로 맞췄고, 아가씨가 보내주신 사진으로 플랜카드 제작도 가장 빠른 순서로 제작 될 예정입니다.”
“웬일로 일을 잘 했네. 통역사 못 구해서 못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 이 정도는 별 거 아닙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비서는 거의 처음으로 들어보는 칸나의 칭찬에 순간 울컥해 말을 더듬었다.
칸나에게 하도 멍청하다고 욕을 들어서 그녀가 별 생각 없이 뱉은 ‘일 잘했네.’ 라는 칭찬 한 마디에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인의 미래를 알지 못한 비서는 칸나의 칭찬에 더욱 더 의욕이 치솟았다.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겠어!’
돈 쓰는 거에 신경을 안 쓰는 분이니 그쪽을 더 닦달해서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맞추기로 했다.
비록 급하게 일을 처리하느라 통역을 끼지 않고 일을 처리한 탓에 과정이 많이 힘들긴 했지만 자신감이 붙으니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비서는 때마침 오늘 통역사를 구해놓은 참이었다.
“앞으로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래, 돈은 얼마가 들던 상관없어. 내가 명령하면 그 명령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란 말이야. 나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네! 알겠습니다.”
칸나는 제법 똘똘하게 대답하는 비서를 보며 만족스레 웃었다.
쟤도 해외 공기를 맡더니 정신이 바짝 드는 모양이다.
그리고 며칠 후.
비서는 통역사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다.
“근데 이거 소속사랑 얘기 돼서 준비하는 거 맞나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역사는 어설프지만 푸드 트럭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진행 되는지 얕은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보통 이런 건 소속사랑 현장에 양해를 구하고 보내는 거잖아요. 근데 그쪽 통역은 맡은 기억이 없어서요.”
비서는 통역사의 이해할 수 없는 조언에 고민했다.
‘아가씨께서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저것도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나?’
일 잘 한다고 칭찬 받은 지 얼마나 되지 않았는데 또 멍청이라며 정강이를 까이고 싶지 않았다.
“그 부분은 제가 따로 알아보죠.”
일단 의문을 보낸 통역사를 퇴근시키고, 비서가 관광을 하고 호텔로 돌아 온 칸나에게 찾아갔다.
“아가씨,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설마 너 또 일 망쳐놓은 건 아니지? 아무 문제없다고 했었잖아!”
당장 이틀 후가 약속 된 날짜였다.
비서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 아뇨. 그게…통역사가 이상한 말을 해서요.”
“이상한 말?”
“예, 푸드 트럭을 보내는 걸 소속사한테 허락을 받았냐는 거였습니다.”
“…내가 그딴 걸 왜 받아야 하는데?”
칸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서는 식겁하며 목을 움츠렸다.
누가 봐도 자존심이 심하게 상한 눈치였다.
“그쪽 얘기를 들어보니 보통은 그렇게 한다고들 합니다.”
“내 돈 주고 음식 대접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못해서 허락을 받아라? 그럼 깜짝 선물을 못하잖아! 난 해솔이가 내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그리고 내가 그 따위 회사에 허락 받고 다녀야 할 급이니?”
아무리 진해솔이 소속 된 회사라 해도 ‘허락’을 받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까라면 까야지, 어디서 허락을 받으라 마라 한단 말인가?
그녀의 모친이 운영하는 회사가 손을 쓰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 회사였다.
“거기 주식회사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모르면서 대충 대답 하지 마, 머저리야!”
비서가 더욱 더 어깨를 움츠렸다.
“이, 이제 어떻게 하죠?”
일을 최대한 빨리 진행하려고 돈을 왕창 썼다.
푸드 트럭과 플랜 카드는 전달 받은 날짜에 배달이 될 것이다.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난 그날 거기 가서 해솔이 만날 거니까. 만약 문제 생기면…알지?”
꿀꺽!
어떻게 해서든 일을 해결해놔야 한다!
비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컴컴한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문제없이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그때부터 비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뛰어다녔다.
일단 소속사가 문을 열자마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하지만 고작 이틀 남겨두고 소속사에서 푸드 트럭을 허락 할 리 없었다.
개인이 보낸 푸드 트럭이요? 죄송하지만, 현재 개인이 보내는 조공은 받고 있지 않고 있어서요.
더군다나 팬클럽에서 보내는 게 아닌, 개인이 보내는 푸드 트럭이지 않은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기에 소속사 직원은 예의 바른 태도로 푸드 트럭을 거절했다.
비서는 이미 모두 돈이 지급 됐다고 말을 해봤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팬클럽게서 푸드 트럭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어, 어떻게 하지? 이대로 포기한다고 아가씨가 그렇구나 하실 리 없는데….”
초조해진 비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속사를 직접 찾아가서 다시 한 번 문의를 넣어봤으나 마찬가지로 거절을 당했다.
이렇게 무작정 오셔서 우긴다고 받아줄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
“어…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상황파악이 끝난 통역사가 난감해 하며 비서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하지만 비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 아가씨가 엄청 대단한 분이라는 걸 어필해주세요.”
“그래도 안 될 거에요.”
“말이라도 해보시라고요! 돈을 받았으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
“…….”
그 상사에 그 부하라고.
항상 속으로 쌍욕을 하던 비서가 칸나와 똑같은 갑질을 하고 있었다.
통역사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소속사 직원에게 고스란히 통역을 해줬다.
개인 팬이 좀 사는 집 딸이라면서 푸드 트럭을 받아줘야 한다고 우기네요.
어휴, 그런 식으로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안 된다고 하네요. 이 정도로 거절하는 거면 정말 안 되는 것 같은데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포기도 방법 중에 하나일 겁니다.”
이미 마음이 상한 통역사가 꼬시다는 듯 말했다.
다급해진 비서는 통역사의 태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소속사에서 퇴짜를 받고 나온 비서는 머리를 굴려서 드라마 관계자들의 번호를 구했다.
참 신기한 게 돈으로 안 되는 게 없어서, 이곳저곳에 돈을 뿌리니 번호가 구해졌다.
통역사도 ‘이게 되네?’ 하면서 드라마 제작진과 통화를 했다.
하지만….
“거절 당했어요.”
“왜!!! 또!!! 항상 안 된다는 말만 하는 겁니까!!! 돈을 더 많이 준다고 전한 게 맞습니까?”
“예예. 분명히 전달했어요. 그래도 안 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포기하시죠?”
“안 됩니다! 절대!”
절대 안 된다고 지 혼자 우긴다고 안 되는 게 되는 걸로 바뀌지는 않는다.
비서의 미래가 깜깜해졌음이 확정 되는 순간이었다.
? ? ?
“난데없이 외국인한테 전화 와서 푸드 트럭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고?”
“네, 진해솔씨 개인 팬이래요. 어떻게 할까요?”
“개인 팬이라면 소속사 쪽이랑 얘기가 안 됐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런 거 함부로 받았다가 나중에 구설수 오르면 어떡하려고. 받지 않는다고 해. 소속사 쪽이랑 연락해보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잠시 소란이 있었고, 그 소식은 소속사에도 전달이 됐다.
“걔가 거기도 왔어요?”
“아무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조심시키셔야겠어요.”
“뉘 집 딸인지 몰라도 돈 좀 있는 집인가 봐요. 그래서 당분간 해솔이 경호원 한 명 더 늘리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액땜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속사는 진해솔의 매니저에게 상황을 주지시켰다.
절대 혼자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속사의 이런 행동은 다음 날 해솔이의 첫 드라마 촬영 때 벌어진 일로 소용없어졌다.
“아니, 얘기 들은 게 없다니까요?”
“그럼 뭐 어쩌라는 겁니까! 난 돈을 받았다니까요?”
“돌아가세요.”
“돌아가면, 이 음식들은요? 이 아까운 음식을 전부 버립니까?”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죠. 돈 준 쪽에 연락을 해보세요.”
“아씨, 외국인이라서 대화가 안 된다고!!! 그쪽에선 앵무새처럼 계약대로 이행하라고만 한다니까요?”
푸드 트럭 주인도 환장할 일이고, 제작진도 환장할 일이었다.
푸드 트럭 주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제작진에게 최대한 설명했다.
“젠장, 돈을 많이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러 촬영장에 푸드 트럭을 가져갔던 경험이 있는 푸드 트럭 주인은 고용주가 현장과 얘기도 안 나누고 무작정 돈을 써서 트럭을 보냈음을 알고 뒤통수가 당겨 뒷목을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차를 다시 몰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받은 돈이 평소 푸드 트럭 운행비의 몇 배였기에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일찍 자리 떴다가 계약 이행 안했다고 배상하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최대한 여기서 버티고 있기라도 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푸드 트럭 때문에 촬영 준비가 더뎌지는 상황이 되자 감독도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거 해솔씨 쪽에서 해결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매니저 누나가 스태프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푸드 트럭 사장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촬영을 위해 현장에서 대기 중이던 진해솔의 귀에도 푸드 트럭을 몰고 온 무개념 팬의 등장 소식이 전달되었다.
? ? ?
“괜찮아, 해솔아?”
주아 누나도 소식을 들었는지 내가 있는 곳에 찾아와 물었다.
누나는 메이크업을 하다가 왔는지 머리에 귀여운 핀을 달고 있었다.
“누나도 소식 들었어?”
“응. 네 팬이 그런 거라며.”
“외국인 팬이라서 더 난감한가봐. 대화가 안 통한대.”
“와~ 진짜 난감하겠네. 그래도 좀 부럽긴 하다. 팬이 푸드 트럭 보내주고. 아까 얼핏 보니까 엄청 큰 플랜카드 두르고 있더라. 거기다가 푸드 트럭도 한 대가 아니라 세 대던데?”
일을 저렇게 크게 저질렀으니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어 보인다.
“기사 날까?”
“헉! 진짜 그럴 수도 있겠는데?”
“드라마 홍보상 좋다고 봐야하는 건지, 괜히 구설수에 오를 테니 안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제작진들이야 사람들 입에 한 번이라도 더 오르는 걸 반기겠지만, 소속사나 나에게는 달가운 소란이 아니었다.
“매니저 누나가 갔으니까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지.”
촬영이 지연 되는 건 현장에서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건 언제나 지루한 법이고, 내 극성 팬이 저지른 민폐로 제작진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뭐라도 하나 돌려야겠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곧 일이 해결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매니저 누나가 나섰는데 일이 복잡해질 리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가볍게 본 나와 달리 현장 일은 해결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푸드 트럭을 3대나 고용한 외국인 극성팬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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