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48. 아가씨들의 남자 (9)
* * *
“이제 돌아가셔야죠, 아가씨.”
칸나가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않기를 벌써 사흘 째.
통역사가 출근하지 않게 된지 사흘이 된 상태이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비서까지 해고해버릴 줄 알았는데, 칸나는 의외로 비서를 해고하지 않았다.
어쩌면 해고해주는 게 비서한테는 더 나은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비서는 칸나가 침대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나흘간 호텔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해고를 당했다면 집에 돌아가기라도 하지.
‘벌을 서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그냥 네 할 일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비서가 자리를 잠깐 비우면 어딜 다녀온 거냐고 캐묻는다.
고로 자리를 비우는 걸 허락하는 건 그녀가 잠을 자러 갈 때뿐인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비서가 편하게 있는 꼴을 볼 순 없다는 심보인 듯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시려고요.”
“시끄러워! 내가 알아서 해.”
칸나는 비서에게 입을 다물라고 외친 후 다시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제 오늘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흘이 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칸나는 여전히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어리석었다.
가까이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이가 있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때의 내가 자꾸 생각나서 이불을 차고 차도 잔상이 남아 칸나를 괴롭혔다.
“왜 말리지 않은 거야?”
누군가를 대신 원망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비서를 옆에 두고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담아 욕을 했다.
비서는 익숙한 아가씨의 원망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쉬면서도 겉으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됐어! 필요없어! 그딴 마음에도 없는 사과 따위!”
진심이 묻어 나오지 않는 사과.
사실 비서는 충분히 뜯어말렸다.
그저 칸나가 들어도 들은 척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했을 뿐.
실제로 비서는 칸나가 해외로 출국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허겁지겁 뒤 따라왔던 입장이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칸나의 실수였고, 잘못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윗사람의 잘못이 어디 그들의 잘못이겠나.
침대 위에서 흐물흐물 의욕 없이 늘어져 있던 칸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녀가 사흘만에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너 그 말 다시 해봐. 진짜 언니랑 연락 하냐?!”
“아…!”
칸나가 자신이 했던 말을 까마득히 잊었다고 생각해 마음을 놓고 있었던 비서는 칸나의 매서운 질문에 몸을 움찔 떨었다.
“빨리 설명해. 그때 그 말! 언니한테 연락하겠다는 거였잖아.”
“한 번도 연락드린 적 없습니다. 따로 만난 적도 딱 한 번뿐이고요.”
“네가 왜 언니랑 만나는데!! 그동안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하고 다녔지?”
“제가 아가씨 비서로 발탁 됐을 때,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그분께선 아가씨를 잘 보필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혹시나 자기가 나서야 할 만큼 큰 문제가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을 해달라고요. 전부 아가씨가 걱정 돼서 하신 말씀이셨어요.”
“그딴 거 누가 필요하대?! 결국 언니는 나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었을 뿐이야. 너는 언니의 새치 혀에 놀아나서 스파이 짓을 한 거고!!”
내 돈을 받아서 생활했으면서 언니를 위해 일을 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비서는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계속해서 항변했다.
“그 만남 이후로 한 번도 따로 연락을 하거나 얼굴을 뵙고 대화를 나눈 적 없습니다.”
“스네이크 클럽에서 일이 생겼을 때도?”
“그, 그때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움찔 몸을 떠는 비서.
칸나가 그걸 캐치하지 못할 리 없었다.
“역시 연락 했잖아.”
“거, 걱정 돼서 메시지를 보낸 겁니다. 아가씨가 평소 자주 어울려 놀았던 스네이크 클럽에 문제가 생겼는데 아가씨께서 연루 되어 계시니까 걱정 돼서요. 그래서 결국 문제 없이 빠져나오셨잖습니까.”
“나 스스로도 빠져나올 수 있는 일이었어. 언니가 알아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된다고! 됐어. 당장 나가! 너 같은 스파이 필요 없어!”
“아가씨…!”
“나가, 나가라고!!”
칸나가 비서를 향해 베개를 던졌다.
맞아도 아프지 않은 걸 던져준 걸 자비로 생각해야 했다.
비서는 결국 해고를 선언한 칸나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지긋지긋했다고 욕이라도 한 방 날려줄까 고민 했지만, 비서는 예의를 차리고 덤덤하게 호텔 방을 나섰다.
일이 꼬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미련이 없다보니까 해고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았다.
그냥 칸나가 있는 쪽으로는 다리도 안 뻗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욕 한 번 박고 싶어도 후환이 두려워서 못하겠지.’
지금 비서의 심정은 뭐랄까 그런 거다.
‘도비는 이제 자유에요!’
문득 떠오른 말에 비서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비가 뭐지?
해고당했으니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진 시간이 많을 터.
오랜만에 여유롭게 소설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 ? ?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칸나의 곁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을 구해본들 비서보다 더 나은 사람이 구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해고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비서를 또 해고해버렸다.
‘다음에는 언니랑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면 무조건 해고라고 고용조건에 넣어놔야겠어. 그래야 저런 말도 안 되는 변명 따위 하지 않겠지.’
나를 위해 언니와 연락을 했다는 개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오늘 칸나에게 찾아 온 불행은 비서를 해고해버린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대체 외국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니?
칸나에겐 너무나도 끔찍한 존재, 언니가 직접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무슨 상관이야. 그냥 여행 온 건데?”
여행 갔다는 애가 이런 사고를 쳐?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진해솔? 그 새끼는 또 뭐야?
“어, 언니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나한테 항의가 들어왔으니까. 동생 단속 좀 잘 하라는데? 너 남자 문제로 속 썩인 적 없잖니. 스네이크 클럽이 사라져서 그런 거야? 정 그렇게 심심하면 지원해줄 테니까 네가 만들어. 예전에 같이 놀던 친구 중에 한 명 골라서 대신 시켜도 괜찮고.
재벌가문의 망나니들을 모아 둔 모임.
여태까지 칸나는 그런 망나니들과 어울려도 엄연히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걔네들이 왜 내 친구야?”
그럼 같이 어울려서 놀아놓고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니?
“!!”
클럽이 해체 된 이후로 흩어져서 각자 다양하게 사고를 치고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었어. 그래도 우리 집 애는 얌전하니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지. 그런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네?
언니에게 자신은 그런 쓰레기들과 다르게 분류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칸나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칸나를 휘감았다.
“…그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이야?”
언니가 말했지. 네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그런 짓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여전히 명심하고 있는 말이다.
여태까지 잘 지켜오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나도 알아. 그래서 여태까지 잘 지켰잖아.”
그랬지. 그래서 이번에 맞은 뒤통수가 제법 얼얼하다. 하필이면 건드려도 그 가문을 건드리니?
에어플레인이라는 그룹을 비호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제한 거였다.
“도대체 그 가문이 어딘데?!”
언니가 바로 칸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화를 낼 정도면 심상치 않은 곳으로부터 가호를 받는 것 같았다.
말하면 네가 감당할 수나 있고? 그쪽이 화가 많이 나있어. 아직 비행기 안 탔다고 들었는데, 직접 가서 사과드려.
“그쪽에서 내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한 거야?”
그럼 남자를 함부로 건드려놓고 사과도 안 하려고 했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곳이야?”
스네이크 클럽을 해체 시킨 곳이야. 별 거 아닌 곳인 줄 알았니? 네가 가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경솔할 줄은 몰랐다. 사과하자마자 곧장 들어와. 당분간 바깥에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있어. 시집 갈 준비나 해.
칸나는 예상하지 못한 언니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도 아직 안 간 결혼을 나한테 시킨다고??
“싫어! 결혼 안 해!”
남자 때문에 사고를 쳐놓으면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네가 고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넌 만나보고 그 중에 결정만 하면 돼.
언니는 자기 할 말을 끝내놓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 일로 칸나는 비서를 해고시켰고, 강제로 결혼도 해야 했다.
고작 진해솔과 밥 한 번 먹어보겠다고 치른 대가인 것이다.
‘억울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데….’
제대로 진해솔과 식사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칸나는 홀로 남은 호텔방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비서에게 화풀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미 해고를 해버려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게 뭐야아…흐아아앙!”
결국 칸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베갯잇을 눈물로 적실 수밖에 없었다.
? ? ?
“고생했어요, 영상 봤는데 정말 멋지던 데요?”
요즘 나를 본 사람들마다 엄지를 치켜들며 저렇게 말을 한다.
촬영장에 등장한 극성팬 얘기는 예상대로 기사에 났다.
누군가가 찍었는지 잠깐 동영상이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해프닝도 있었는데, 덕분에 이번 사건이 더 크게 화제가 됐다.
남자가 이런 사건에서 용기 있게 나선다는 게 평범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감명 받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쑥스럽네요. 마주치는 분마다 칭찬을 하셔서요.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워낙 자극적인 일이 많이 벌어져서 부정적인 여론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다.
일단 극성팬을 제대로 막지 못한 소속사가 욕을 먹을 것이고, 현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작진도 욕을 먹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극성팬은 말해서 뭐하겠나, 가루가 되게 까일 것이다.
까이는 대상에는 나 또한 포함 되어 있었다.
얌전히 있지 않고 위험하게 나댔으니 말이다.
“멋진 모습이었어요.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까 받는 거고요.”
그런데 의외로 다들 나를 엄청 칭찬하더라고.
“선배님! 해솔이는 예전부터 멋있었어요. 용감하기도 하고요.”
“그래요? 민영씨는 해솔씨랑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아시나보네요. 뭔가 에피소드라도 있어요?”
오늘 촬영은 민영 누나와 촬영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사람들이 날 칭찬 할 때마다 자기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나보다 더 뿌듯해 하고 있기도 하다.
“누나, 앞에서 그렇게 금칠을 하면 어떻게 해. 사람들이 주책이라고 그러겠어.”
“하나도 주책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어휴, 감사합니다, 선배님. 별 거 아니었는데….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호호호! 그럴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어느 정도 선을 긋고 행동하던 선배님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나는 엄청 욕먹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부’로 어그로를 돌리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말이다.
‘기부한 것도 칭찬을 많이 받긴 했는데….’
막무가내로 구는 극성팬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게 더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 세계에 남녀역전임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요즘 남자답지 않은 색다른(?) 모습에 반했다고 내 팬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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