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 #49. 흰색 쥐 (2)
* * *
한편, 칸나는 비앙카의 말에서 악의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저자세로 사과를 했다.
언니에게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을 때 큰 문제가 생길 거라고 경고를 받았기에 확실하게 엎드린 것이다.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고 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저쪽에선받아줄 생각이 없다는 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왜 사과를 하러 오라고 한 거지? 날 조롱하는 게 목적인 거야?’
제대로 사과를 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곤란하다.
칸나의 언니는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제 사과가 많이 부족하셨나봐요.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 좀 더 정중하게 사과드릴게요.”
칸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움찔!
다시 한 번 정중한 사과를 했음에도 비앙카는 어림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냉정해서 뱀 앞에 선 쥐새끼마냥 숨이 턱! 막혀왔다.
하필이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비앙카의 눈빛이 언니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차갑고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덜덜덜
비앙카가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칸나의 몸이 솔직하게 반응해왔다.
비앙카는 그 연약한 모습을 자비가 1%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시큰둥하게 지켜봤다.
겁먹은 흰색 쥐가 덜덜 떨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으나 비앙카의 감정을 건드리기엔 부족했다.
“내가 기분이 나빠서 해솔씨한테 사과를 하라고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그럼 아닌가요? 굳이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상식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한테 사과를 하라는 게 과한 명령은 아니지.”
“우,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으시잖아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참 구질구질한 삶이라고 해야 할까?
칸나는 덜덜 떨면서도 비앙카의 냉철한 눈빛을 받아내며 대답하고 있었다.
아마 언니의 차가운 눈빛을 억지로 견뎌내야 했던 세월들이 지금을 버티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오줌을 지렸겠지.’
칸나는 꿋꿋하게 부당한 요구를 들었다는 듯 항의를 했다.
실제로 비앙카는 칸나에게 요구한 것을 이행하기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실비아와 비앙카의 정신이 합쳐지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생겼으나 그 변화가 근본적인 가치관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참 이상하네요. 여태까진 사과하러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아직도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걸 보니 말이에요.”
“자존심 세우고 있는 게 아니에요! 고개 숙여서 사과드렸잖아요. 이만큼 했으면 받아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저희 가문이랑 척이라도 지실 셈이세요?”
피차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입장이 아니다.
정치라는 게 1+1의 올바른 정답이 2가 아닌 것이다.
‘칸나가 사과를 하러 케이 가문의 후계자에게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 중요한 거다.
그러니 이미 이익을 다 취한 비앙카가 칸나에게 또 다시 사과를 하라고 한 건 과한 요구였다.
칸나의 언니조차도 지금 상황을 듣게 되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 분명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쪽 사람들 사이에선 과한 요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그쪽한텐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당신이 한 짓에 대한 책임을 지세요. 당신이 건드린 그 사람, 나랑 결혼할 사이거든요.”
“!!”
케이 가문의 후계자로 촉망 받고 있는 비앙카다.
그런 어마어마한 가문에서 남자 아이돌 출신인 자를 결혼하는 대상으로 진지하게 볼 줄은 몰랐다.
‘겨, 결혼?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숨겨둔 내연남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부족한 세상이지만 있는 자의 세계에선 여전히 선택을 받고 싶어 하는 남자들로 넘쳐난다.
그렇기에 케이 가문 정도라면 출신을 따져서 결혼을 시키는 게 정상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떨거지가 아니지 않은가?
‘거짓말일 거야!’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자신을 엿 먹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들으니 거짓말이라고 우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장난감이었으면 제가 가문을 움직여서 스네이크 클럽을 해체시켰을까요? 가문이 나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 남자한테 접근했죠. 거하게 민폐를 끼치기까지 했고요. 만약 그이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이미지에 큰 손상이 왔을 거에요. 당신 때문에.”
“…….”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를 챘어야죠. 아니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용기라도 있던가.”
“아, 아니에요. 그렇게 깊은 관계일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제, 제가 좀 멍청해서…그래서 몰랐어요.”
“멍청하다라….”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비하할 줄은 몰랐기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귀엽게 굴지 않는가?
“그래도 그 사람만 피해를 입었던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날 창피를 당한 건 저였다구요. 그 사람이랑은 대화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봤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제 욕만 잔뜩 하잖아요. 언제 신상이 털릴지 몰라서 조마조마해야 하는 마음을 아세요?”
패닉이 온 칸나가 되도 않는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다고 비앙카가 받아줄 리 없지 않은가?
“그걸 내가 알아야 하나요?”
필사적인 변명에도 꿈쩍하지 않는 비앙카를 보며 절망한 칸나가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제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알면 속 시원하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해주시면 안 될까요? 잘못했어요. 사과하러 오라고 해서 왔잖아요. 근데 왜 받아주질 않으시는 거에요!”
칸나는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저 여자는 용서해줄 생각이 없는 채로 자신을 부른 게 분명했다.
칸나의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런 여자한테 사과하라고 보낸 언니가 원망스럽다.
만약 자신이 가문의 후계자였다면 굴욕적으로 사과를 하러 올 필요도 없었을 거다.
가문이 칸나를 지켜줬을 테니 말이다.
“하아, 대화가 통하질 않네요. 내가 큰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비앙카씨!”
칸나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비앙카의 말을 끊어버렸다.
애석한 일이지만, 이런 무례한 행동을 가만히 당해주고 있을 비앙카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비앙카가 칸나의 멱살을 잡아챘다.
“꺅!”
“야.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 어따대고 감히 언성을 높이는 거야. 너 정말 죽고 싶어?”
“히익!”
겁에 질린 칸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흥분을 가라앉힌 비앙카가 덜덜 꺼는 칸나의 멱살을 놓고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내가 네 자존심을 바닥에다 굴려야 속이 좀 시원할 것 같다잖아. 그래야 용서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이야. 그러니까 내 명령을 들어. 가문에서 버림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
칸나가 왜 이곳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를 하고 있는가.
당연히 언니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버림받는다는 건 가문에서 버림받았다는 것과 같다.
“하, 할게요.”
칸나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약점을 제대로 찔린 이상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했다.
“정말요?”
“네, 상했던 마음이 풀어질 수 있게 제대로 사과하겠습니다.”
이 상황을 언니한테 말한다 해도 보호 받지 못할 거다.
결혼을 한다지 않은가?
‘분명 내연남한테 사과하는 게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
저쪽의 명분이 너무 유리하다.
물론 비앙카의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자신이 숙이는 게 맞았다.
칸나가 완전히 굴복했음을 알았는지 비앙카가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어떻게 사과를 했는지 물어볼 거니까 제대로 해야 할 거에요. 제가 화를 풀지 안 풀지는 칸나씨한테 달린 거랍니다.”
굽힐 때 제대로 굽히라는 듯.
비앙카는 칸나에게 여지도 주지 않았다.
대충 시늉으로 사과를 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칸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하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끝내는 게 낫다.
이젠 사과를 할지 말지를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사과를 해야 깔끔하게 일을 해결할지를 고려해봐야 하는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저쪽에서 나를 만나줄지 확신을 못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저지른 일로 고생을 했을 테니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거다.
만나는 것조차도 싫어할 수 있었다.
“근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제가 따로 찾아가는 걸 싫어할 거에요. 만나지도 못하게 하면 어떡하죠?”
권력을 써서 억지로 만나게 한들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쪽에선 칸나를 극성팬이라고 생각하니 이 또한 극성팬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소속사가 호구도 아니고, 당연히 막아설 것이다.
당사자와 직접 만나는 것조차도 칸나에겐 힘든 여정이 될 터.
비앙카는 칸나가 괴로워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사과를 하러 가는 것조차도 불쾌하게 여긴다면 첫 단추를 잘못 꿰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부디 비앙카씨가 조금만 배려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과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건가요?”
“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만족하실 만큼 제대로 사과를 하겠습니다.”
사색이 돼서 덜덜 떨고 있는 흰색 쥐가 머리를 제법 쓰기 시작한다.
쥐가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도 문다더니 그 상황이 아닐까 싶다.
‘들어주기 싫은 부탁을 하네. 듣던 대로 쥐구멍 찾는 솜씨가 좋은 걸?’
이미 조사를 통해 칸나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 그녀다.
부족한 능력과 대범하지 못한 소심한 성격으로 싸움을 해보지도 않고 백기부터 들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대세를 알고 살아남기 위해 미리 배를 까는 것은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살기로 했으면 끝까지 쥐구멍에서 나오질 말았어야 하는 거다.
‘이거 말고 다른 걸로 충분히 괴롭힐 수 있으니까 좀 봐줄까?’
흰색 쥐처럼 연약한 생물을 갖고 놀려면 정도를 봐가면서 괴롭혀야 했다.
그래야 오래 갖고 놀 수 있으니 말이다.
비앙카는 초조하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칸나를 여유롭게 응시했다.
‘거기다가….’
단순히 절망만을 주는 것보단 희망을 주었다가 무너트리는 게 더 큰 짜릿함을 선사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비앙카가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요, 사과를 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 부탁을 못 들어줄 건 없죠. 자리는 제가 만들게요. 대신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도 되겠죠? 두 사람을 1:1로 대면하게 하는 건 좀 불쾌하거든요.”
평범한 연인이 할 법한 말이었기에 칸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였다.
임자 있는 남자를 건드리다가 걸렸으니 이 정도 의심은 이해해줘야 하는 게 맞다.
“네, 그러세요.”
비앙카의 허락에 칸나는 이미 사과가 다 끝난 사람처럼 좋아했다.
속마음이 악의에 가득 차 있는 비앙카에게는 한 입에 넣고 꿀꺽 삼키고 싶을 만큼 군침 돌게 하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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