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 #49. 흰색 쥐 (3)
* * *
현재 비앙카와 멜리사는 내 집에서 메이드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이 항상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그녀들 모두 각자 자기 사업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위해서 24시간을 모두 쓰기엔 그녀들이 지고 있는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며칠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비앙카가 오늘은 원하는 게 있는지 메이드 복을 입고서 나를 반겼다.
봉사를 해드리겠다며 앙큼한 유혹을 하더니 결국 펠라로 한 발을 빼고서야 목적을 털어놓았다.
“극성팬을 만나달라고? 갑자기 왜?”
“왜라뇨. 사과 받으셔야죠. 전 아직도 생각하면 열 받아서 손발이 덜덜 떨려요.”
“네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솔직한 말에 비앙카가 나를 째려봤다.
“크흠, 그 사람이 나한테 사과를 하겠대?”
“당연히 그래야죠.”
“내가 그날 봤던 극성팬은 쉽게 사과하겠다고 할 스타일이 아니던데.”
“주인님께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제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제가 사과하도록 만들었어요.”
사과하도록 만들었다?
비앙카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면 꽤나 섬뜩한 말이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저는 주인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칭찬을 해줘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동안 비앙카에게 하도 당하다 보니 뭔 일을 벌였다고 하면 걱정부터 들었다.
“침울한 척 하지 마. 연기인 거 티나. 그리고 네가 평소에 잘했으면 나도 안 그래. 너한테 당한 게 많아서 잘한 일도 걱정부터 들잖아!”
“흠.”
내 말에 아니나 다를까, 침울해 하는 연기를 벗어던진 비앙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거 아니니까 칭찬해주세요.”
“옛다, 칭찬! 수고했어.”
“후후, 보람차네요. 아무튼 만나보실 거죠?”
“글쎄다. 고민 되네.”
“이게 고민할 거리가 돼요? 사과 못 받으셨잖아요. 받아야죠.”
“사과를 받는다고 속이 시원할 것 같진 않은데? 안하무인으로 굴던 여자가 갑자기 진심으로 뉘우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압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잖아. 그런 사과는 받는 게 더 불쾌할 것 같아.”
비앙카가 압박을 가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사과다.
과연, 진심이 아닌 사과를 시간을 내서 받을 가치가 있을까?
더군다나 소속사에선 극성팬과 관련 된 일은 묻는 걸로 결론을 낸 상태다.
그 결정엔 내 동의도 들어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번 일 대응도 좀 그래요. 이런 일이 있으면 곧장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야죠.”
“굳이 너한테?”
“네! 기사가 나고서야 알았을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세요? 주인님을 노리는 스네이크 클럽을 가문의 힘으로 해체시켰어요. 이건 주인님이 제 보호 아래에 있다는 걸 알리는 거나 다름없죠. 그런데 그 년이 주제도 모르고 주인님을 건드렸잖아요. 이건 제 가문을 우습게 봤다는 거에요.”
비앙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다소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그런 해석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어?”
“네. 해야 해요. 이번 일을 무르게 끝내면 다른 것들도 그래도 되는 줄 알 테니까요. 다른 평범한 계집이 저지른 일이었으면 몰라도 걔가 재벌 가문 출신이라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생기면 저한테 미리 말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기왕 보호 받기로 한 거, 제대로 책임을 지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지킴 받는 것도, 보호하는 것도 그것이 더 편할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했기에 그쪽에서 사과를 하겠다고 한 거야?”
자존심이 있으니 쉽게 굴복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많이 괴롭혔어?”
“아직 덜 괴롭혔어요. 그런 년 상대하는 건 너무 간단하거든요.”
“간단하다고?”
“그쪽 사업채에 압박을 줬어요. 마침 그쪽이 우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협력 건이 몇 개 있었거든요. 아주 사색이 돼서 찾아왔더라고요. 쩔쩔 매면서 고개 숙이는 꼴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답니다.”
역시 잔뜩 괴롭혔구나.
명분이 만들어졌으니 누군가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비앙카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나한테 보내기 전부터 가지고 놀면서 혼을 쏙 빼놨을 거다.
“사과 받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내가 아는 비앙카는 고작 사과시키는 걸로 만족하고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사과 받는 걸로 용서해주시려고요? 왜 이렇게 무르게 구세요? 남이 나한테 엿을 줬으면 주인님은 똥이라도 뿌리셔야죠!”
쿨럭!
‘…똥이라니.’
역시 괴롭힐 생각이 만만하다.
“똥을 어떻게 뿌리는데.”
“후후, 사과를 받아들이지 마시는 거에요.”
“사과하러 온 사람인데?”
“제가 강요하지 않았으면 사과할 생각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잘 먹고 잘 살았겠죠. 반성도 하지 않고요.”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거면서 굳이 부르는 이유는?”
비앙카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야 더 깊게 절망할 테니까요! 지금은 자기가 한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결국 거절당하는 거에요. 사과도 제대로 못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으니 가문에서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죠? 어쩌면 주인님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뭐든 다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비앙카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떨 때 나오는지 알고 있다.
나와 섹스를 할 때,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지금 네 표정, 엄청난 거 알아?”
“후후후! 주인님은 짜릿하지 않으세요? 복수하는 거잖아요.”
무섭다, 무서워.
얘가 내 노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독한 걸 이 세상에 풀어버린 것 같다.
‘…어쩐다?’
비앙카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
그리고 극성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일이 나쁘지 않게 수습이 됐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이라면서. 더군다나 재벌 걱정만큼 쓸데없는 게 없고. 내가 똥 좀 뿌린다고 그 사람 인생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잖아?’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렇게 해도 후환이 없겠어?”
“저 못 믿으세요? 부담 되는 일 아니에요. 그리고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부담 되는 일도 마다 할 생각 없어요. 물론 이 일이 부담 되는 건 아니지만요.”
결국 비앙카가 마련한 자리에는 나가기로 했다.
‘일단 만나서 사과를 들어보고 결정해야지.’
비앙카를 풀어놓을지 말지는 극성팬의 태도를 보고 결정할 것이다.
만약 성의없이 사과를 한다면?
이후로 비앙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음껏 갖고 놀다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고 아예 신경에서 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 마음에 들만큼 크게 뉘우치는 모습과 제대로 된 사과를 한다면….
‘그땐 비앙카가 너무 심하게 날뛰지 않게 조절은 해줘야지.’
미성년자라고 오해를 할 정도로 작은 체구의 소녀였던 극성팬.
내 양심이라는 녀석이 비앙카의 먹잇감으로 주기엔 너무 연약한 소녀이지 않냐고 항의해오고 있었다.
물론 이 동정심은 극성팬 소녀가 제대로 사과를 했을 때만 제 기능을 할 것이다.
‘비앙카가 본격적으로 갖고 놀면 인생 망하는 건 순식간이잖아.’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갖는 순간부터 비앙카는 폭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비앙카의 엄청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도 여전히 흠칫흠칫 놀라곤 하지 않은가.
‘이건 인도적인 거지. 인도적인 거. 부디 내 마음에 들만큼 제대로 사과했으면 좋겠네.’
나한테 피해를 준 사람에게까지 너그러울 필요는 없으나, 그 소녀가 저지른 일의 대가가 비앙카의 관심이라면 조금 버거운 징벌이 아닐까?
? ? ?
사과를 받는 건 받는 거고.
나는 스케줄에 맞춰서 촬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드라마는 한참 재밌는 부분을 찍고 있었다.
‘희성이 워낙 특이한 캐릭터라 연기하기 재밌단 말이지.’
첫 만남 때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던 두 사람은 서로를 희성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방귀소리가 나는 방석을 설치해서 망신을 주거나 둘이서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를 하는 등의 방해였다.
문제는 그렇게 투닥거리는 것을 희성이 매우 재밌어 한다는 점이었다.
‘눈새로 사는 삶,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방귀 소리가 나는 방석은 꺄르르 웃으면서 직접 사용해볼 정도로 열렬하게 반응했고, 뜬금없이 데이트를 하다가 나타나면 정말 엄청난 인연이라며 박수를 짝짝 치고 자연스럽게 함께 데이트를 즐겼다.
희성이 상대편 여자에게 정이 떼어지기는커녕 세 사람의 투닥거림을 즐거워하니 두 여자는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영영 상대 여자를 떼어놓는 건 불가능해질 것 같아진 두 사람.
결국 그녀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다 함께 동거를 하기로 한다.
원래 적은 더 가까이에 둬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작가님이 한 집에서 벌어지는 환상의 콜라보를 잘 표현해준 덕분에 촬영장은 항상 화기애애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청률이었다.
“드디어 첫 방영이네.”
초반에 생겼던 문제가 정말 액땜이 되었던 것인지, 극성팬 이후로 별다른 사건 없이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꽤 넉넉하게 분량을 만들고 첫 방영 날을 기다릴 수 있었다.
멤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면 아현이가 작곡한 노래로 에어플레인의 유닛 그룹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이고, 준이도 촬영장에 적응하는 걸 힘들어하긴 해도 연기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좀 침울해 해서 큰 문제라도 있는 건가 걱정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이돌 출신은 연기자들 사이에서 환영해주는 상대는 아니다.
다만 ‘잘 생기고 연기 잘 하는 아이돌 출신’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촬영장에서 충분히 예쁨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준이가 촬영장에 적응하는 걸 힘들어 했던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연기가 되지 않아서였다고.
‘걔는 확실히 걱정이 많아. 그래놓고 실전 들어가니까 칭찬만 잔뜩 받았다지.’
자기 스스로에게 주는 목표 기준이 워낙 높아서 그렇다.
그리고 저 멀리 해외까지 가서 작곡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제키는 소속사 직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기계처럼 곡을 뽑아내는데 퀄리티는 하나 같이 대단했던 것이다.
덕분에 녀석의 해외 체류는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로잘린이랑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는데 여자를 못 넘어트렸다?
‘고자지, 고자.’
이 세계 남자는 고자처럼 성욕이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우리 멤버들은 나름 건강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서 그런지 비실비실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한 똘똘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같이 부대끼고 살다 보니 알기 싫은 걸 알 수밖에 없단 말이지.’
녀석의 연애 상황은 나중에 따로 전화해서 알아보도록 하고.
지금은 첫 방송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첫 방송을 기념으로 촬영을 접고 일찍부터 회식하러 가게에 모였다.
“잘 나오겠죠?”
“잘 나올 거에요. 진짜 잘 찍었어.”
“그뿐이야? 저 완벽한 얼굴이 한 장면에 잡히는데 이걸 안 보고 베기겠냐고.”
그뿐인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노이즈 마켓팅까지 된 드라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같은 시간에 방영 되는 드라마들의 인기가 생각보다 저조하다는 거다.
“이게 바로 킹기지. 킹기야.”
제작진과 배우진 모두 방영 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가씨들의 남자’는 잘 될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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