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 #49. 흰색 쥐 (4)
* * *
다 함께 첫 방송을 시청하는 건 꽤 긴장 되면서도 재밌는 일이었다.
우리가 직접 촬영을 한 드라마지만, 편집이 들어간 결과물은 색다를 수밖에 없다.
“와~ 색감 미쳤다.”
“해솔씨 예쁜 것 좀 봐.”
“카메라가 미모를 다 못 담는다는 평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평이 쏙 들어가겠어.”
“카감님이 혼을 갈아 넣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
드라마 내용상 희성은 엄청난 외모를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내 얼굴을 빡샷으로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로도 이걸 1분 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내 얼굴만 계속 나오는 것 같은데, 이거 기분 탓이야?”
인물 소개가 끝난 이후로도 유난히 내 얼굴이 자주 화면에 나왔다.
빠르게 스토리가 전개 되다가 내 얼굴이 나올 때만 유난히 오랫동안 화면이 전환이 되지 않다 보니 시청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노골적인 의도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분 탓 아닌 것 같은데?”
주아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맡은 캐릭터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서 연기 할 때마다 얼굴 근육을 많이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얼굴들은 누나들에게도 그렇고 스태프들과 감독님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했다.
잘 생긴 애가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게 참 볼 맛 난다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 얼굴을 저렇게까지 강조할 건 없지 않았을까요, 감독님.’
예쁜 건 주아 누나나 민영 누나도 마찬가지인데, 유난히 내 얼굴만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서 머쓱하다.
하지만 남녀 역전 세계에서 남자 얼굴만큼 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게 없는 모양이다.
민영 누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말했다.
“그래도 효과는 있어 보여. 주변 사람들 봐봐.”
이미 나와 제법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서 익숙해진 스태프들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나오는 내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 왜 그래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물으니 스탭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볼 때마다 새롭고 짜릿하달까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한다.
“시청률은요?”
화려한 영상미와 빠르게 진행 되는 스토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이제 방송 걱정보다는 시청률이 걱정 됐다.
기세가 좋다며 다들 잘 될 거라고 의견을 모으긴 했지만 그게 진짜 벌어진 일은 아니었기에 걱정이 됐다.
이 세계도 미디어가 발달 되어 있어서 TV 시청률은 10%가 넘기 힘든 상황이었다.
즐겁게 회식을 할 수 있으려면 나쁘지 않은 시청률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 감독님의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예, 여보세요?”
드디어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당연하지만 방송국이다.
“오! 예, 알겠습니다. 하하! 예…예예….”
감독님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으로 적어도 망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들이 설렘을 가득 담고 통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예, 알려줘야죠. 다들 잔뜩 걱정하고 있거든요. 예, 들어가세요.”
“감독님! 그래서 시청률은요?”
모두의 시선이 감독님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낸 감독님이 돌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번쩍!
두 팔 모두 들어 올린 만세 포즈다.
“평균 시청률 9.3%!! 최고 시청률은 11.4%까지 올랐었답니다!”
“헉!”
“우와앗!”
“이야~!”
9.3%의 평균 시청률이라.
나는 주아 누나의 귀 가까이에 다가가 물었다.
“나쁘지 않은 수준인 거야?”
“엄청 잘 나온 거야. 앞으로 더 재밌어질 거잖아. 다음 화엔 10%도 도전해볼 만 해.”
주아 누나도 센스있게 작은 목소리로 정보를 알려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족스레 웃었다.
“다행이다.”
“두 번째 작품에 첫 주연까지 맡아서 걱정 많이 됐지?”
“응. 적어도 망하지만은 않았으면 했거든. 내 얼굴이 열일 하긴 했나봐.”
마지막에 장난기를 담아 애교를 부렸다.
시청률을 들은 스태프들이 다들 긴장을 풀고 회식을 즐기기 시작해서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이 없는 상황이었다.
민영 누나가 배시시 눈웃음을 지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진짜 해솔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담. 네가 희성이라서 시청자들도 납득할 수 있었을 거야.”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담으로 받으면 내가 뭐가 돼.
애석하게도 민영 누나는 진심 100%를 담은 솔직한 발언일 것이다.
평소에도 날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이다.
“사실 내 얼굴 덕이라는 건 장난이었고, 누나들 덕분에 잘 된 것 같아. 특히 화려한 액션씬에 마지막에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건 최고였어.”
나는 엄지를 치켜들고, 누나들의 화려한 액션씬을 칭찬했다.
사람들에게서 듣는 일상적인 칭찬은 익숙해졌지만, 진심 100%가 담긴 민영 누나의 칭찬은 부담이 됐다.
누나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 칭찬이라서 그럴 거다.
“우리가 좀 잘 싸우긴 했지?”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 기뻐.”
누나들도 내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건배합시다! 감독님!! 건배사 해주셔야죠!”
스태프들이 본격적으로 벨트 풀고 놀 생각인지 목소리 높여 감독님을 울부짖었다.
촬영 날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놀 수 있을 때 화끈하게 놀아야 하는 것이다.
배우진들도 빼지 않고 분위기를 살리는데 한 몫 해야 했다.
“여기 노래방 기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연 배우가 아이돌인데 노래 안 시켜볼 수 없지!”
노래해! 노래해!
그리고 분위기를 살리는데 한 몫 해야 하는 대상은 나도 빠질 수 없었다.
? ? ?
사과 준비는 잘 했어요?
…네.”
비앙카는 프릴 없이 민무늬의 검은색 옷을 입고 온 칸나를 고고하게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안색과 까칠한 입술이 칸나의 마음고생을 엿볼 수 있었다.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비앙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칸나가 보여줄 모습이 기대 돼서 일까?
비앙카의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대고 있었다.
주인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하면서도 속으로는 분해 하고 있을 뒤틀린 마음을 떠올린 비앙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잘 됐으면 좋겠네요. 응원할게요.
기회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 출연하는 드라마가 잘 돼서 기분이 좋을 거에요. 시기가 참 좋았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희망에 차오른다.
비앙카는 기뻐하고 있는 칸나의 얼굴을 기억에 새겼다.
이제 저 얼굴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구경만 하면 됐다.
얘기는 들었어요.
바쁜 촬영 스케줄 중에 잠깐 시간을 낸 거라서 아마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순 없을 거에요. 각오는 됐나요?
물론이에요. 애초에 시간을 많이 뺏을 생각도 없었어요.
칸나는 비앙카의 예상대로 상황을 너무 편하게 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 사과를 주인님께서 당연히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도 여유를 부릴 만큼 대단한 걸 준비한 모양이네.’
비앙카는 그녀가 준비한 사과가 무엇일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가진 거나 내세울 것이 돈 밖에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번에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겠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자기 잘못을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돈을 그렇게 불려줬는데, 주인님한테 돈으로 사과를 할 생각을 해?’
그녀의 사과는 주인님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매우 괘씸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과는 무용지물이 될 거고, 넌 내 손아귀 위에 놓이게 될 거야.’
저 흰색 쥐를 어떻게 괴롭혀야 재밌게 즐길 수 있을까?
즐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 되는 게 아니라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집이 아늑하고 좋네요.
아기자기한 맛이 있죠?
해솔은 이 집을 처음 보고 흡족해 했지만, 재벌 딸인 두 사람에게 이 정도 크기의 집은 별장 수준밖에 되질 못했다.
그나마 별장 수준이 된 것도 비앙카의 손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고용인들은 없는 건가요?
지금은 없어요.
사실 이 집에 따로 고용인을 두진 않는다.
믿을만한 사람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만, 결국 돈 주고 고용하는 사람인데 그 속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리고 굳이 고용을 하지 않아도 이 넓은 공간은 항상 청결이 유지 된다.
해솔의 능력을 아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기에 남들 시선을 고려할 필요 없이 아이템을 마음껏 사용한 것이다.
나쁘지 않죠?
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피차 사정을 고려한 거죠.
칸나는 자신이 사과를 하는 것을 남들이 보지 않기를 원했다.
재력이 있기에 가게를 빌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앙카가 그럴 필요없다며 일방적으로 약속 장소를 해솔의 집으로 결정해버렸다.
집에서는 누가 볼 리 없으니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경우에는 칸나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단 주인님의 안전을 위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주인님이랑 저 극성팬이 또 만났다는 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누군가는 극성팬과 주인님 사이에 ‘스폰’을 의심할지도 몰랐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들한텐 씹을 수 있는 게 생기는 게 진실보다 더 중요할 테니까.’
진해솔을 위한 결정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비앙카와 진해솔이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칸나의 부담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동거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두 사람의 결혼설에 신빙성을 더해졌기 때문이다.
“어서와.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왔네.”
집 안에는 진해솔이 비앙카와 칸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칸나는 사과하러 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해솔을 다시 만나게 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좋아하는 거야, 멍청아!’
황당하게도 거칠게 뛰는 심장의 원인은 긴장감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와 밥 한 번 먹겠다고 무리하다가 이 꼴이 됐는데도 말이다!
‘여전히 멋있네.’
기껏 만나러 온 사람한테 웃는 얼굴 한 번을 안 보여줬던 매정한 상대다.
칸나는 자신이 너무 호구같다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쪽에 앉아요.”
저쪽에 앉으라네요.
비앙카가 진해솔의 말을 칸나에게 통역해줬다.
칸나는 순간 서운함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려버렸다.
…영어 할 줄 알잖아요. 잘 하는 거 알고 있단 말이에요.
해솔씨가 당신을 위해서 영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움찔!
비앙카의 매서운 지적에 칸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지적을 받고서야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모양이다.
이 자리는 투정을 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사과를 하기 위함인 자리인 것을 말이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본론만 말해달라고 해줘.”
스케줄이 있어서 오래 있을 수 없어요. 이대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낼 건가요?
비앙카는 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약속을 잡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칸나도 이 자리가 비앙카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말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했나봐요.
그럼 어서 준비해온 걸 보여줘요.
칸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챙겨 온 핸드백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 서류를 진해솔의 앞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과’를 시작했다.
만약 제가 저지른 일로 피해를 입었을 시에 받았을 지도 모르는 피해 수준을 조사해봤어요.
칸나의 말이 시작 되자마자 진해솔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자신이 준비한 말만 열심히 내뱉었다.
마치 회사원이 상사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듯이 말이다.
아마 칸나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항상 누군가가 발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감상하는 입장이었을 테니까.
서류를 보면 아시겠지만, 최대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피해 수준을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는지 미숙한 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썩 나쁘지 않은 매끄러운 말들이 이어졌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비앙카가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만약 그 표정을 봤다면, 칸나도 뭔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가 받고 있는 압박감과 긴장감 그리고 부담감이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빨리 끝내자.’
칸나는 어서 사과를 끝내고 지긋지긋하고 악몽 같은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 조급함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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